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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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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철 대란

노인들의 이삭줍기마저 메마른 철 수거,
올 초 원자재 인플레이션으로 구조 악화된 데 불황이 기름 부어
등록 2008-12-19 14:49 수정 2020-05-03 04:25

“강물이 딱 말라버린 꼴이지요.” 12월11일 오전 10시께, 짐승의 발톱을 닮은 대형 집게가 달린 5t 트럭이 서울외곽순환도로를 빠져나오는 참이었다. 도로 턱을 넘느라 차체가 한 번 덜컹거렸다. 홍승현 무진금속 이사가 말문을 열었다. “건설경기가 확 죽어버리니 덩달아 창틀 새시를 뜯어올 철거현장 찾기가 힘들어졌습니다. 물량이 나와도 예전 상황하고는 달라요. 최근 수원시 인근의 중소기업 한 군데서 자동차 변속기의 알루미늄 커버를 대량으로 넘긴 적이 있는데, 납품하던 중견기업이 부도나 대금을 떼일 처지라 재고·불량품을 고철로 처분하는 거라더군요.” 경기도 인근부터 강원도 속초까지 지방 출장을 다니느라 지난해 주행거리가 4만8천km나 됐다는 홍 이사도 지난 9월 이후 운전대를 못 잡는 날이 많아졌다.

인천 동구 송현동 현대제철 북문 쪽 도로에 10여 대의 고철 운반 차량들이 세워져 있다.

인천 동구 송현동 현대제철 북문 쪽 도로에 10여 대의 고철 운반 차량들이 세워져 있다.

고물은 나오지 않는데 가격은 폭락

경기 남양주시의 ㅎ고물상에 도착한 뒤엔 엉뚱한 작업이 시작됐다. 원래 ‘대상’(고철을 납품받는 업체)인 무진금속은 ‘중상’(중간수집상)에 들러 물건을 실어내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집게 모양 중장비의 운전석으로 옮겨앉은 홍 이사는 자신이 싣고 온 알루미늄 새시들을 되레 고물상 뒷마당에 부려놓기 시작했다. 주객이 전도된 격이랄까.

ㅎ고물상 정아무개 사장은 “알루미늄 스크랩(고물) 거래가 뚝 끊기다 보니, 이물질 제거작업을 하던 직원들을 그냥 놀릴 수만은 없어 역구매를 했다”고 설명했다. 무진금속에 남아있던 B급 알루미늄 스크랩을 비싼 값에 되사서 이물질 제거작업을 하려는 것이었다.

“외환위기 때요? 그땐 좋았죠. 망하는 기업들이 많아 고물도 많고 수출도 잘됐어요. 고물상엔 불황이 없다고들 했죠. 지금은 달라요. 사채까지 끌어쓰며 버티다 결국 자살하는 고물상 사장들이 많다고 하잖아요. 소문이 흉흉하죠.”

고물 대란이다. 한때 전세계적 원자재값 폭등을 틈타 철스크랩(고철), 비철금속, 폐지 등을 사재기하는 불한당으로 지목됐던 동네 고물상들. 이들 중 상당수가 최근엔 폐업과 부도의 벼랑 끝에 몰려 있다. 불황의 발톱은 고물을 수거해 다시 원료로 순환시키는 밑바닥 서민경제 활동에까지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는 셈이다.

‘산업의 쌀’로 불리는 철은 다른 자원에 견줘 압도적으로 높은 재활용 비율을 자랑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새벽 거리를 돌아다니며 고철을 손수레에 싣는 노인들의 ‘이삭 줍기’마저 씨가 마를 판이다. 올 초 동네 고물상에서 kg당 200~300원을 쳐주던 고철은 이제 10원이라는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곤두박질했다. 수거하기 쉬운 음료수 캔 종류는 이물질이 많아 품질이 떨어진다며 고물상에서 받아주지도 않는다. 고물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가정이나 점포에서 버려진 캐비닛, 음료수 페트병, 신문지, 라면박스 등은 일단 동네 고물상에 모인다. 인천 서구 경서동에 위치한 ‘겸손자원’은 이런 고물들이 고이는 첫 번째 웅덩이 중 하나다. 신호등 2~3개 거리 안에 재활용품을 1차 분류해 분야별 ‘중상’들에게 넘기는 고물상들이 수십 개 모여 있다. 서민들과 영세공장들이 모인 동네여서 아파트촌보다 고물 줍기가 수월하고, 땅값이 싸서 고물상 부지를 얻기 쉽기 때문이다. 겸손자원만 해도 60대 후반부터 80대까지 스무 명 남짓한 어르신들이 고물을 팔기 위해 들른다.

제조업 위기를 반영하는 지표

겸손자원은 폐지를 kg당 30원에 사서 중상에 40원에 넘긴다. 5t 트럭에 실린 물건들이 다시 대상에게 팔릴 때는 10원의 마진이 더 붙는다. 폐지값은 올 봄과 여름에 170원 선을 오르내렸다. 신문지의 경우 지난 10월 초 겸손자원에서 사들일 때 가격이 kg당 240원이었지만, 최근엔 80원까지 떨어졌다. 지난 7월 초 kg당 650~700원에 거래되던 고철값은 이제 상태가 가장 좋은 ‘상품’도 kg당 100원 안팎에 불과하다. 12월 초 현재 고철을 재활용해 만든 철근 도매가격이 kg당 920원 선인 데 견줘 10분의 1밖에 안 된다. “쌓아놓아 봐야 돈이 안 되니 곧 골목마다 음료수 캔이 수북이 쌓이고 굴러다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이정오 겸손자원 사장은 말했다.

연도별 철스크랩 재활용 실적

연도별 철스크랩 재활용 실적

겸손자원을 비롯한 동네 고물상들의 물량은 삼화철강, 태양상사 같은 ‘중상’들에게 넘어가는데, 상당수 중상들이 가격 폭락의 직격탄을 맞았다. 김동창 삼화철강 사장은 “현대제철, 동국제강 등 전기로 업체들이 올해 원자재 급등 시기에 고철 수입 물량을 대거 늘려놓았는데, 최근 철강 수요가 급격하게 줄어들다 보니 국내산 고철 매입에는 거의 손을 놓은 상태”라고 말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매출액 3천억원대의 기전산업을 비롯해 대신철강, 대한철강 같은 대상들이 납품량을 제한하고 있고, 그 여파가 수백 개 고철 중상들에게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가격 상승세가 지속될 것으로 기대해 지난 8월 초 뒤늦게 수백~수천t씩 사재기에 나선 중상들은 올해를 넘기기 힘들 것이라는 게 김 사장의 설명이다.

폐플라스틱 쪽도 마찬가지다. PVC·스티로폼 등을 수거하는 태영상사의 김근태 사장은 “음료수를 담는 페트병의 경우 지금 시세가 kg당 200원꼴로 한 달 전의 딱 반값”이라고 전했다. 재활용해 캐시밀론 솜을 틀 수 있는 페트병의 경우, 지난 2~3년 새 중국에서 캐시밀론이 유행하며 수출이 활발했지만, 베이징올림픽 이후 수요가 급감했다. 고공 행진을 이어가던 국제유가가 떨어지면서 재활용의 가격 장점이 사라진 것도 악영향을 끼쳤다. 김 사장은 “35년간 고물상을 했는데 이런 폭락은 처음”이라며 “제조업이 침체되니 재활용품 확보도 힘들고 판로도 막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라고 덧붙였다.

그의 말마따나 재활용 업계의 고난은 제조업의 위기를 반영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예컨대 주물사(주물용 모래) 재처리 업체들의 목소리에서는 주물제품 생산업체들이 최근 대폭 감산에 들어갔음을 엿볼 수 있다. 33개 재활용 업체가 밀집한 인천서부환경사업협동조합의 이사장이기도 한 김장성 신세계자원 사장은 “인근 주물공단에서 매달 1만2천t씩 나오던 주물사가 10월 이후엔 8천t 정도로 줄었다”며 “그만큼 조업 시간이 단축됐다는 방증인데, 조선·자동차·산업기계 등 업종 전반이 심각한 침체를 맞았다는 명백한 신호”라고 풀이했다. 재생 처리된 모래의 판로도 막힐 조짐이다. 주요 수요처인 시멘트 업체와 아스팔트콘크리트 회사들이 건설경기 침체와 계절적 요인에 따른 감산에 들어갈 참이기 때문이다.

올 초엔 가격 폭등으로 조업 중단

흥미로운 대목은 시계를 6개월~1년 전으로 되돌려보면 산업계에선 지금과 상반된 갈등과 문제들이 쏟아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고철, 폐지 등 최근 가격이 급락한 재활용 자원들이 연초 가격 고공 행진에 따른 사재기 논란과 대·중소기업 간 충돌을 불러온 품목들이었기 때문이다. 고철과 철근의 경우, 지난 3월부터 지식경제부·국세청·지방자치단체의 합동 ‘사재기’ 단속 대상에 올랐다. 2007년 초 t당 47만원대이던 철근 가격이 1년 새 79만원대로 급등하면서 건설사들의 불만이 극심해지자 ‘액션’을 취한 것이다. 정부는 7개 전기로 제강업체 등 생산업체와 250개 유통업체를 대상으로 단속 시점 직전 30일간 평균 재고량이 전년 동기 대비 10% 이상 많으면 일단 시정명령을 내린 뒤 개선이 안 되면 고발 조처했다. 또 고철 가격이 치솟으면서 자동차·조선 등 주요 대기업들에 납품하는 중견·중소기업들이 올들어 수차례 공동 납품 중단, 항의집회 등을 벌인 바 있고, 지난해 말엔 골판지 제조업체들이 재활용 폐지를 확보하지 못해 공장 가동을 중단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경기 구리시 토평동의 한 고철 처리업계 야적장 모습.

경기 구리시 토평동의 한 고철 처리업계 야적장 모습.

한때 동네 고물상에 쌓인 더럽고 하찮은 고물들은 대기업들엔 가격통제를 해야 할 중요 원자재였고, 일부 유통업자들에겐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는 기회였다. 거대한 욕망과 욕망이 부딪치는 투기판이 벌어졌던 셈이다. 정부 환율정책의 ‘헛발질’이 원자재 인플레이션을 키우던 올 초만 해도 고철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일부 고물상 주인들이 자기 집을 담보 잡히고 사채까지 끌어쓴 것도 당시엔 나름대로 합리적 선택이었을 것이다. 다시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세계적 경기침체로 이어지는 지금, 시장 참여자들에게 외면받아 산더미처럼 쌓인 고물은 새로운 종류의 고민을 던지고 있다.

“근력이 조금 남아 있는 노인들은 손수레를 끌고, 그보다 몸이 더 불편한 할머니들은 유모차를 밀고 고물·폐지를 줍지요. 한 끼 더운밥을 먹기 힘든 처지인 분들도 많을 거예요. 정부가 그분들을 내치지 말고 고물을 줍는 일자리라도 지켜줘야 합니다.” 김근태 태영상사 사장의 말이다.

그렇다면 영세 자영업자인 동네 고물상들과 고철 줍는 노인들이 현재보다 나은 삶의 조건을 얻도록 지원할 방법은 없을까. 일단 한국의 ‘동네 골목길’에서 발생하는 고철이 산업적으로 무시하지 못할 양을 형성한다는 점은 희망적이다. 국내 고철의 총수요는 2007년을 기준으로 2900만t에 이르며, 가격상승을 기대한 가수요가 많았던 올해의 경우엔 3000만t을 돌파했을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고철 자급률은 70% 안팎으로 추산되는데, 이중 절반이 동네 할머니들이 수거하거나 건축물 철거현장에서 얻어지는 ‘노폐 스크랩’이다. 철판을 자르고 남은 자투리 등 제조업 생산공정의 부산물(25% 안팎)이나 전기로 업체의 쇳물 생산과정에서 나오는 ‘자가발전 스크랩’(10% 안팎) 비중을 압도하는 수준이다.

한국 고유의 재활용 모델 새로 짜야

전문가들은 서구 국가들과 달리 한국에선 고철 중 노폐 스크랩 비중이 높고, 고물상이 대중화돼 그 숫자가 1만여개를 헤아리는 만큼 고유의 재활용 모델을 새로 짜내야 한다고 제안한다. 산업연구원의 정은미 박사는 “노인분들이 고철 등을 일정수준 이상 끌어모아 좋은 가격을 받아낼 수 있도록 지역별 수거 거점을 따로 마련해주고, 동네 고물상들의 경우엔 인천서부환경사업협동조합처럼 한데 모여 규모의 경제를 이루고 친환경 기술을 접목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밝혔다.

글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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