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월요일 편집회의를 한다. 이번주 회의는 이상했다. 남성 기자들은 말하지 않았다. 고개 숙이고 회의 자료만 봤다. 여성 기자들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누가 기사를 쓸 것이냐’는 대목에선 손드는 이가 없었다. 하나 마나 한 이야기만 반복됐다. “누가 어떻게 쓰건 잘 써야 한다.”
불운하게도 이날 박수진 기자는 휴가를 냈다. ‘어떻게든 잘 써야 하는’ 기사의 책임을 우리는 부재 중인 박 기자에게 떠안겼다. 물론 박 기자는 여성·소수자·인권 등에 정통하다. 그럼에도 “그것은 부당한 결정이었다”고 휴가에서 돌아온 박 기자는 항의했다. 분명 어려운 기사인 것이다. 박 기자는 이번주 내내 우울해 보였다.
일련의 과정에서 내가 결정한 것은 딱 두 가지다. ‘데이트 폭력’을 표지이야기로 다룬다는 것, 그리고 그 기사는 여성 기자가 쓴다는 것. 심지어 이 글조차 여성 기자에게 맡기고 싶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나를 괴롭힌 질문이 무수하다. 폭력은 무엇인가. 정의는 무엇인가. 사실은 무엇인가. 그런 질문에 괴롭힘을 당하다 문득 깨달았다. 남자들은 당분간 입 좀 닥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입을 닫고 귀를 열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어쨌건, 남자인 것이다.
폭력은 나의 마음대로 너의 뜻에 반해 너를 통제하려는 행위다. 문명은 대부분의 폭력을 금지한다. 민주주의 국가의 폭력(물리력), 그리고 위해에 처한 개인의 자기방어(정당방위) 정도만 예외다. 그 외 사적 폭력은 법의 이름으로 처벌한다. 시민의 규율 아래 국가의 물리력을 길들여, 그 물리력으로 사적 폭력의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 문명사회다. ‘개인 영역’에 있는 것으로 여겼으나 공적 처벌의 대상이 된 폭력의 유형과 범주가 많고 넓을수록 문명사회다. 사장이 직원을, 교사가 학생을, 부모가 자식을 때려선 안 된다. 남편이라고 아내를 때려서도 안 되며, 교제 중이라 해도 남자가 여자에게 폭력을 행사해선 안 된다.
그러나 문명은 사적 폭력과 함께 사적 처벌도 금지한다. 그런데 법이 정의의 반대편에 서 있을 때가 있다. 사적 처벌을 금지하는 법률이 정의 구현을 막아설 때가 있다. 그 경우, 우리는 어떤 절차와 수준으로 정의를 관철할 수 있을까. 사실 검증, 징벌의 정당성, 절차적 합리성 등에 대한 그런 고민을 여기자들과 나누다 발견하게 됐다. 남자와 여자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아왔다. 남자가 모르는 그 세상에서 여자는 끔찍했던 개별의 경험을 투사해 작금의 사태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들의 삶에는 가증스럽고 지긋지긋한 남자가 너무도 많았다. 그리고 나는 남자다.
이런 경우에 쓰라고 철학자 후설은 ‘판단 중지’라는 개념을 만든 것 같다. 그 이전 철학자들은 세계의 진실을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 후설은 진실을 인식하려는 인간의 마음에 주목했다. 진실을 파악하려면, 무엇이 진실인지 판단하는 이 마음부터 깨트려야 한다. 인간의 마음은 이미 ‘오염된 선험적 판단’을 갖고 있다. 그러니 모든 판단을 잠시 중지(유보)하고 세계 자체를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그것이 진실을 향하는 길이다.
여러 질문에도 불구하고 나는 박 기자의 기사를 그냥 읽을 것이다. 많은 이들에게 언어폭력을 저질렀음을 환기하며, 비록 기억에는 피해의 순간이 남았지만 실제로는 가해의 장면이 더 많았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상대가 여성이었다면 언쟁이 아니라 폭력으로 이해했을 것이라는 점을 새로 깨달으며, 판단 중지하고 읽을 것이다.
그 결심에 힘입어 이 글을 썼다. 다만 자신은 없다. 그리하여 그녀의 세상에 가닿을 수 있을까. 정말 남자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좋은 사람인가.
추신. ‘노 땡큐!’ 필자 한윤형씨가 원고 게재를 중단하겠다는 뜻을 알려왔다.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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