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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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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딸

등록 2014-12-16 16:52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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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버지가 대신 사과하는 걸까?’ 마감 작업에 한창이던 금요일(12일) 오후, TV 화면에 잡힌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모습을 보며 떠오른 생각이다. 긴장한 표정의 조 회장은 몰려든 취재진 앞에서 몇 마디를 꺼냈다. “회장으로서 아버지로서 사과한다” “교육을 잘못 시킨 죄” 등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조 회장은, 이른바 ‘땅콩 리턴’ 사건으로 세간의 조롱을 받게 된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기내 난동 사건에 대해 직접 사과했다. 이로부터 몇 시간 뒤 조 전 부사장이 사건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국토교통부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 건물로 들어서며 취재진 앞에서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사과의 뜻을 밝히기 전이다.
이날 대한항공 건물 로비에서 이뤄진 조 회장의 기자회견을 꿰뚫는 열쇳말은 결국 ‘아버지’란 세 글자다. 자식의 잘못에 대신 머리를 조아리는 아버지라는 이미지를 내세워 난국을 돌파해보겠다는 뜻이다. 국민 정서상 그다지 손해 볼 것 없는 전략이라고 판단했음직하다. 국내 재벌 가문의 자제들 가운데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행동을 하는 경우가 꽤 있는데, 조 회장 3남매의 평소 행동거지는 특히나 많은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곤 했다.
하지만 이번 기내 난동 사건의 본질은 단순히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재벌 가문 자제들의 못된 버릇이나 삐뚤어진 심성의 문제로 치환될 수 없다. 재벌 가문 자제들에게 뒤틀린 자의식을 심어주는 현행 재벌체제 자체가 근본 원인이다. 조 전 사장의 머릿속엔 ‘아버지=총수’ ‘직장=내(우리네) 회사’란 의식이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굳어져 있다. 직원들을 일터의 동료가 아니라 종이나 머슴으로 대하는 행동의 비밀이다. 쥐꼬리만 한 지분으로도 회사를 장악하도록 만드는 후진적 지배구조, 내부 견제 세력의 부재, 제어받지 않는 세습체제 등은 이들의 뒤틀린 전근대적 자의식을 더욱 왜곡시키고 병들게 하기 마련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근대적 의미의 ‘개인’이 아니다. 존재의 근거를 ‘아버지’에게서 찾는 한,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도, 그 ‘해결’도 결국 아버지일 뿐이다. 그 때문에, 아버지가 대신 나서 머리를 몇 번 조아린다 한들, 이들의 버릇은, 심성은 결코 고쳐지지도 개선되지도 않는다.
조 전 부사장의 행보를 지켜보노라니, 어쩔 수 없이 누군가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자신의 존재근거를 오로지 아버지에게서 찾는 또 한 명의 전근대적 ‘딸’ 말이다. 출신이나 배경까지도 불분명한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을 가능케 하는 배경도, 이미 드러난 국정 농단 문제를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도, 모두 ‘개인’이 되지 못한 뒤틀린 자의식의 결과물이다. 재벌과 유신체제라는 불행한 쌍생아가 느닷없이 땅콩과 진돗개의 몸을 빌려 다시 조우하는 셈이다. 형식적 사과만으로는 말끔히 지워지지 않는 너무도 진한 얼룩이라는 점에서, 대수술과 종말만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 ‘끝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는 점에서, 둘은 참 많이도, 지독히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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