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른다. 내 입에서 나는 구취와 살집이 붙은 내 뒷모습, 주름이 헐거워져 자주 벌어지는 항문 따위를 나는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무심코 거울을 자주 보게 된다. 그사이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모르는지 알게 된다. 나와 마주하는 사람이 얼기설기 남은 내 머리털을 보며 ‘불쌍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쪼그라든 고환을 볼 때마다 아내가 흠칫거리는 이유를, 그리고 어느덧 다 큰 딸은 자신만의 말(言)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요컨대, 나는 모르는 게 많은 사람이다.
나는 모르는 게 많지만 슬프지 않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약속과 사고(事故)와 당신들이 오고 갔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손에 쥔 게 없다. 가끔 길을 걷다 나와 같은 빈손을 볼 때가 있다. 그것이 당신이든, 누구든 나는 그저 물끄러미 빈손을 바라본다. 고개를 올리는 순간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당신을 마주하게 될 것을, 나는 안다.
내 딸처럼 사람들은 말을 만들어낸다. 도시의 숨은 곳곳에서 각자의 말들이 작게 부르르, 부르르 떨고 있을 상상을 하면 어쩐지 덩달아 몸이 떨리곤 했다. 저기 나무의 싹이 나려다 얼어버린 잎에도, 그리고 그 나무 아래 횟집 수족관 안 돔에도 각자의 말이 있을 것 같다. 물고기가 똬리를 틀며 말을 뱉어내는 순간, 비릿한 내가 코를 찌를 것 같다.
예쁘게 나온 초밥을 연신 찍어대는 선을 보며 뭐하는 거냐고 묻지 않았다. 선은 식탁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 자판을 꾹꾹 눌렀다. 자기가 찍은 사진을 올리는 듯했다. 페이스북이든 트위터든 선이 만든 말은 그렇게 둥둥 도시 어딘가에서 떠다닐 거였다. 나는 선의 정수리를 보며 묵묵히 초밥을 씹었다. 구청장이 된 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매일 구청에 나와 사람들과 점심 한 끼 먹는 것이 내 일이 될 줄도 몰랐다. 고만고만한 작은 지방시지만 그래도 구의 장인 만큼 내 어깨에 무언가 묵직하게 얹혀질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그저 선임을 ‘본’ 것밖에 없었다. 근무시간에 자고 있는 선임의 벌어진 컴컴한 입안과 진득하게 묻어나온 침 따위를 봤다. 선임은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아는 영민한 아이 같았다. 실제로 그는 키가 작아 아이 같기도 했다. 허가를 받으러 온 건설업자들에게 받은 배즙이나 도라지즙 같은 것을 쪽쪽 빨아먹으면서 발을 까딱까딱하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왠지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약삭빠른 사람답게 그는 무언가 받아먹고 또 받은 걸 쓸 줄 알았다. 도저히 허가를 내릴 수 없는 건물자재나 크기, 공유지 침입 같은 것이 쉽게 이뤄졌다. 실제 측정보다 작게 그려진 설계도를 보면서 나는 묻지 않았다. 그의 주위에는 늘 사람이 모였다. 어느 날 그가 부인이 아닌 여권과에 있는 여자의 손을 잡고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을 볼 때도 있었다. 나는 ‘보는’ 사람이지 말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선임은 어느덧 알아주는 인사가 됐다. 작은 키에 맞지 않게 배가 나오고 재규어 랜드로버를 몰고 다녔다. 그가 지방선거에 나왔을 때도 나는 그에게 투표했다. 시장이 된 그와 고운 그의 아내가 나에게 밥을 사기도 했다.
“고마워.”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하며 내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입에서 단내가 났다. 그는 나를 구청장으로 지목했다. 나는 얼떨떨하게 발령받았다. 아내는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갓 고등학생이 된 딸도 잠시였지만 날 보는 눈빛이 달랐다. 한참 지랄을 하던 딸이었다. 빤한 반항과 빤한 상처들이 오고 갔다. 하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새끼였다. 내가 잘나서 된 게 아니었다. 누구나 그랬다. 모두들 선임이 뒷돈을 받고 공정하게 일하지 않는 것을 알았다. 굳이 선임이 아니어도 그랬다. 누군가는 몰래 예산을 훔쳤고 청소를 하지 않았고 회식에서 도망갔다. 서로 부적절한 애인이었고 늙은 부모를 길에다 버렸다. 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 거대한 관대 앞에서 나는 묻지 않았다. 어쩌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홀로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입을 벙긋거린다. 말하고 싶다. 평생 이 자리에 앉아보기만 해야 할 것 같았다. 마치 하나의 커다란 눈 같다. 거대하고도 툭 튀어나온 동공. 팽창된 눈알은 뒤룩뒤룩 여기저기를 본다. 홍채가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며 조리개를 맞춘다. 부푼 눈알은 시큰한 듯 몸을 떤다. 나는 끔뻑거린다.
밥을 먹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선은 영양드링크와 초콜릿을 함께 내왔다. 드시면서 하세요, 라고 말하는 선이 밉진 않다. 하지만 저 깊이, 아랫배에 주먹만 한 돌 하나가 박혀버린 것 같다. 대장에서 꼼짝도 못한 채 장을 막아버려 그 주위에 흐르지 못한 음식물이 썩어갈 것 같다. 나는 썩은 물이 고인 장을 생각하면서도 초콜릿을 집는다. 선은 내 딸보다 여섯 살이 많다. 처음 봤을 때 선은 미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근사근한 성격이 딸과는 달랐다. 이것저것 챙겨주기를 좋아하고 꼼꼼하기도 했다. 복사기에 종이가 떨어지지 않게 항상 종이를 채우고 할 필요가 없는 비질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늘 웃는 낯으로 사람을 대했다. 민원봉사과에서는 그녀가 찾아오는 손님들을 붙잡고 수다를 떤다고 흉을 봤다. 시간이 많고 사람이 고픈 노인네들이 찾아와 하루 온종일 앉아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녀는 그런 노인들의 말상대를 했다. 나는 내 딸이 그랬으면, 싶다. 적어도 웃는 낯으로 나를 봤으면 했다. 딸은 소파에 앉아 아내가 깎아준 과일을 먹고 있는 나를 보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배 봐. 먹고 싶어?”
“….”
“존나 똥 같아.”
딸은 소리 나게 방문을 닫아버렸다. 나는 멍하니 사과를 찍은 포크를 든 채 내 배를 내려다봤다. 여러 겹 접힌 것도 아닌 커다랗고 둥그렇게 동선이 있는 배였다. 아이를 품은 산모처럼 나는 둥근 배를 끌어안고 있었다. 정말 딸의 말대로 길가에 개가 누고 간 대변이라도 된 것 같았다.
“고마워.”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하며 내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입에서 단내가 났다. 그는 나를 구청장으로 지목했다. 나는 얼떨떨하게 발령받았다. 아내는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갓 고등학생이 된 딸도 잠시였지만 날 보는 눈빛이 달랐다. 한참 지랄을 하던 딸이었다. 빤한 반항과 빤한 상처들이 오고 갔다.
딸의 말대로 살 좀 빼야 할까, 라고 묻는 말에 선은 아뇨, 귀여우세요, 하고 배시시 웃었다. 전 좀 살집 있는 남자가 좋던데…. 얼핏 예전 어렸을 때 본 딸의 웃는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했다.
조그만 도시다. 그렇고 그런 상가가 있고 사람들이 있다. 도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리된 노선을 심어주었다. 잘 구획된 4차선 도로와 코너에서 우리는 어느 일정한 동선을 갖게 됐다. 우리는 그것에 안심했다. 왜 이곳에서 살게 됐는지 모르겠다. 그저 나는 살았다. 자연스럽게 아내를 만났고 아이가 생겼다. 사람을 먹여살리는 것은 꾸준하고도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일이었다. 우리는 벌어진 입안으로 무수히 음식들을 넣었다. 매끼 밥을 짓고 김치를 담그고 고기를 구웠다. 정말이지 나만 해도 끊임없이 먹었다. 자박자박하게 조린 돼지갈비나 씹히는 맛이 좋은 오이소박이, 갓 구운 과자나 케이크, 미어터지게 속을 넣은 오징어순대…. 딸은 새가 모이를 받아먹듯 입을 더욱 벌리고 더 달라고 애를 썼다. 무심코 아내가 여섯 살 된 아이에게 밥을 먹이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아내는 물 만 밥 위에 잘게 자른 김을 얹어 먹였다. 아이는 빼꼼히 입만 벌릴 줄 알았다. 그러곤 씹지도 않은 채 얼른 삼키고는 아내의 손을 뚫어지게 봤다. 무서웠다. 아내가 미처 다시 숟갈을 푸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제야 조금, 사람을 먹여살리는 일에 대한 무게가 느껴졌다. 갑자기 밥을 삼키는 목구멍이 콱 줄어드는 듯했다. 모두들 그럴 터였다. 도시의 곳곳에서 그렇게 살아갈 거였다. 질름거리며 파지를 줍다, 종이가 날아가 아… 하고 입을 벌릴 노인이 있을 수도, 같은 반 친구에게서 뺏은 패딩 점퍼를 입어보면서 가슴 떨리게 좋아할 아이가 있을 수도 있다. 집 앞, 아파트 상가에서 불콰한 얼굴을 가진 취객들이 침을 튀겨가며 말하는 모습을 본다. 튀긴 닭을 앞에 두고 그들은 할 말이 많은 듯 번들거리는 입술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과 같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말을 섞고 싶었다. 신랄하게 아무 말이나 내뱉고 싶다. 나는 혀뿌리를 꾹 눌러 참는다.
집에 들어왔는데도 딸은 내 쪽을 보지도 않은 채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아내는 딸의 그런 태도를 알면서도 못 본 척했다. 아이는 무슨 말을 찍어내는지, 한순간도 쉬지 않고 자판을 꾹꾹 눌러댔다. 아내는 피곤하죠, 하고 가방을 받는다. 어차피 가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내의 얼굴이 잠깐 묘했다. 아내도 자기만의 말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낮 동안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이불을 빨고 침대 밑에 깊숙이 청소기를 넣어 먼지를 없앤다. TV를 보거나 장을 볼 수도 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를 학원에 바래다주고 내가 입을 옷을 다린다. 그리고 어쩌면 젊은 애인을 만날 수도 있다. 그의 손을 꼭 잡거나 그가 하는 말에 귀기울이려고 그쪽으로 몸을 튼 아내를 상상해본다. 아내는 대낮에 속절없이 그와 살을 섞는다. 서로의 귓가에 부는 입김, 아내가 꽉 움켜잡는 그의 엉덩이 근육…. 화가 난다거나 아내를 탓할 마음은 없다. 다만 서로가 열심히 살을 섞고 있을 때 불쑥 들어온 내가 미안해질 것 같다. 그녀와 그가 안타깝게 잡은 손이나 희부옇게 빛나는 벌거벗은 몸을 보면서 나는 숨죽인다. 이윽고 그가 깊은 숨을 토해낸다. 나는 조용히 자리를 비켜준다.
소파에 앉자, 딸은 힐끗 나를 보더니 더럽다는 듯 나에게서 멀찍이 떨어진다. 아내는 그런 딸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빨래를 갠다. 이 모든 것과 상관없다는 듯 아내는 우아하게 보송보송하고 하얀 옷들을 개킨다. 순간 울컥 아내가 진짜 바람이라도 피운 것처럼 아내를 노려봤다. 그녀는 접은 수건들을 차곡차곡 올린다.
“그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아내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 말한다. 선임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말에 나는 의아했다. 아내는 이제 막 접은 수건들을 제자리에 놓기 위해 일어선다.
“일 때문이래요. 당신이랑 하고 싶은 얘기가 있나봐요.”
아내는 선임에게 언제나 고마워했다. 명절 때마다 꼬박꼬박 차갑게 냉장한 신선한 쇠고기나 볕에 잘 말려 포장한 홍삼 같은 것들을 보냈다. 한번은 선임의 집에 김장을 도와주러 간 적도 있었다. 그의 아내와 일하는 도우미들까지 함께 했다고는 하지만, 한눈에도 선임의 아내는 멀찍이서 그들이 일하는 요량을 보기만 했을 것 같았다. 아내는 몇 번이나 그녀가 고마워했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바쁜 철이잖아요, 손이 부족하다고요. 아내는 힘없이 웃으며 누웠다. 그러고는 사흘 동안 물 한 모금도 넘기지 못하고 몸살을 앓았다. 며칠 감지 않은 부스스한 머리와 푸석푸석한 볼을 보며 나는 시집살이 하냐고 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녀는 내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물기 없는 아내의 몸에 조금도 닿고 싶지 않았다.
구청은 짜임새 있게 돌아간다. 날실과 씨실처럼 촘촘히 얽히고설켜 꽉 엇물려 있다. 기획예산과에서 1년 예산을 정하고 그 안에 계획을 세운다. 승용차 요일제를 정하고 구정 홍보를 한다. 재무과에서 관리를 하고 복지를 위해 학습교육원을 세우고 도로를 정리한다. 그리고 도시의 상하수도를 위해 설치를 하고 주민에게 문서를 발급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이 피부에 와닿진 않았다. 이런 것 없어도, 사람들은 각자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도시에 한두 개 새로운 공원을 조성하지 않아도, 멍청하게 번호판에 있는 숫자가 짝수인지 홀수인지를 정해 차를 몰게 하는 것도 부질없어 보였다.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다 밖을 보면 우리들은 알아서 잘 산다, 네가 신경 쓸 거 없어, 하고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꼭 필요한 일도 마찬가지였다. 구획과 구획에 버려진 쓰레기들을 없애고 수도에서 선선한 물이 나오게 하는 모든 것들이 당연했다. 나는 가끔 상상했다. 도시에 치우지 않은 쓰레기들 위로 들끓는 파리떼와 벌레들이 하늘에 드글드글 기름 낀 것처럼 날아가는 모습, 지면 아래로 매끄럽게 돌지 않는 수도와 검붉은 녹물을 생각하면 조금, 위안이 됐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도시는 죽어가는 생선처럼 비릿해질 거였다. 하지만 이런 씨실과 날실 속에도 빈틈은 있다. 내가 할 일은 없었다. 나를 포함하지 않은 열한 명이 각자 알아서 자기가 할 일들을 했다. 내 일은 명목상 감사담당뿐이었다. 계획 승인과 조직 관리를 위해 날아오는 종이에 사인을 하는 게 다였다. 나는 그냥 멀거니 바라봤다. 이 모든 것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선임은 자네 얼굴 보기가 힘들어, 하고 웃었다. 그러곤 내 말을 듣기도 전에 자기 혼자 웃음을 터뜨렸다. 수화기 너머 그의 더운 숨이 느껴지는 것 같아 불편했다.
“많이 바쁜 것 같아.”
아닙니다, 하고 대꾸했다. 그러곤 차분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건물이 들어설 거야.”
규모가 꽤 큰 걸로 알고 있어. 자네 구에 들어설 건데… 한번 만나고 싶군. 나는 묵묵히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아는지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리자 투실투실한 팔뚝에 오스스 소름이 돋은 게 보였다. 벌겋게 조그만 점들이 털 사이로 따다닥 돋아났다. 징그러웠다.
시끄럽다. 사무실 바깥으로 난처한 선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러시면… 안 되는데. 무슨 일인지 보기 위해 문을 열자, 웬 할머니가 눈물을 찔끔찔끔 짜고 있는 게 보였다. 남자 직원이 완강하게 할머니의 팔목을 붙잡는다.
“팔지 마세요, 이런 것.”
그는 고갯짓으로 그녀가 갖고 있는 봉투를 가리킨다. 할머니는 손에 쥔 검은 봉투를 더욱 꼭 끌어안는다. 선이 안된 얼굴로 할머니에게 말을 건넨다. 할머니 원래 아무 데서나 파는 거 아니에요. 할머니는 겁먹은 얼굴로 선과 남자 직원을 번갈아 본다. 그러곤 알겠다고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한다. 검은 봉투가 바스락거린다. 선은 신고가 들어오면 어쩔 수 없다고, 거듭 설명한다. 남자 직원이 할머니를 모시고 나간다. 나는 서둘러 뒤따라나간다. 남자 직원이 일부러 굳은 얼굴로 한 번 더 주의를 주고 간다. 저, 잠시만. 그녀는 잔뜩 굽은 어깨로 뒤돌아본다. 봉지 좀 볼 수 있냐는 말에 그녀는 숙제를 덜한 아이가 검사받듯 봉투를 조심스럽게 연다. 대추다. 이거 2천원어치만 살 수 있을까요, 란 말에 그녀가 반색한다.
“달고 단단해.”
“그리고 시원하고 맛있어.”
그녀는 뿌듯하게 자부심 섞인 얼굴로 대추를 다른 봉지에 담아 건넨다. 양이 많다.
선은 내가 들고 온 대추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러곤 빠득빠득 씻어 그릇에 담아 모두가 먹기 좋게 휴게실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선은 참 단단하네요, 하면서 대추를 집는다. 나도 덩달아 대추를 집어 한입 문다. 달다.
아내는 선임이 무슨 일로 전화했는지 궁금해했다. 잘 지내신데요? 이 물음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내는 답답해했다. 안부도 좀 묻고 그쪽이 연락하기 전에 연락했어야 하는 거라고 했다.
“고마워해야 해요.”
사람은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요, 아내는 볼멘소리로 타박했다. 그녀의 성화에 별거 아니라고, 그냥 큰 건물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답했다. 그녀는 잘됐네요, 하고 답했다. 이 기회에 집값이 올랐으면 좋겠어요. 아내의 눈이 잠깐 희망에 번득거리는 것 같았다. 갑자기 요의가 느껴졌다. 나이를 먹을수록 소변이 더 자주 마려워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소변을 눌 때마다 허리춤까지 오는 찌릿하고 싸한 한 줄기 아픔이 느껴졌다. 나는 서둘러 화장실 문을 열었다. 딸이 몸을 씻고 있었다. 뿌연 김 속에서 몸의 곡선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물줄기 소리에 문이 열린지도 모르고 아이는 고심하는 얼굴로 몸을 씻었다. 꼼꼼하고도 차분하게. 그것은 어느 단계가 있는 듯했다. 팔과 겨드랑이, 허리춤까지 아이는 차근차근 거품을 묻혔다. 봉긋 솟은 젖가슴과 부푼 엉덩이, 그리고 앙증맞게 그 자리에 있는 털…. 아이는 다리까지 모두 꼼꼼하게 거품칠을 하고 나서야 나를 봤다. 아이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나는 서둘러 문을 닫았다. 딸의 벗은 몸을 본 적이 처음은 아니지만 나쁜 짓을 한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딸이 아닌 이제 막 망울을 터뜨리려는 식물을 본 것 같았다. 벌게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 내쉬는 꼴이 부끄러웠다. 아이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싼 채 나왔다. 사과를 해야 했다. 딸은 내 쪽을 홱 지나쳤다. 머리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바닥에 투둑 떨어졌다. 나는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절대 고의가 아니었다고 단지 오줌이 마려웠을 뿐이라고 얘기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아… 어… 요야…. 간만에 부르는 딸의 이름이 낯설었다. 요!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딸이 신경질적으로 돌아봤다. 딸이 벌게진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아이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미안하다.”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요는 입 모양으로 시발, 하고 웅얼거렸다. 그러곤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요가 말한 시발은 시발시발시발시발 하고 귓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어느새 오줌은 마렵지 않았다. 대신, 딱딱하게 굳은 조그만 돌이 요도에 콱 박혀버려 다시는 나올 거 같지 않았다.
요의 싱싱한 몸과 달리 내 몸은 늘어질 대로 늘어진 것 같았다. 배만 단단하고 둥그레었다. 배를 눌러보면 살이 차올라 손가락이 들어가지 않았다. 축 늘어지고 주름진 고환이 징그러웠다. 나는 몸을 갖고 있어, 부끄럽다는 듯 움츠렸다. 거울에 비춰 살펴보니 곳곳에 튼 살이 있었다. 나는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아이는 대놓고 나를 피했다. 딸과 아무 말이나 했으면 싶었다.
구에서는 더 이상 건물이 들어설 수 없었다. 선임은 더 살이 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단단하고도 하얗게 건강한 빛이 나는 몸이다. 늘어지고 기름 낀 내 몸과는 달랐다. 그는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얼굴이 좋아 보인다고 했다. 나는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한다. 선임은 소파에 앉고는 다리를 벌린다.
“건물이 꽤 커.”
그는 대강의 구조를 설명한다. 총 24층짜리야. 이 구를 떠나 시에서도 그 정도의 건물을 보기 힘들었다. 그는 침을 튀겨가며 말했다. 언뜻언뜻 튀기는 침이 느껴지면서도 나는 티를 내지 않는다. 지하로 다섯 층을 내고 그중 지하 1층은 고급 스파가 들어선다. 전반적으로 대리석으로 코팅한 느낌의 인테리어를 내고 1층에는 T사의 빵집과 외국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이 들어온다. 각각 26평과 67평씩, 빵집과 레스토랑치고 꽤나 큰 실평수다. 2층에는 전통 한정식, 3층, 4층에는…. 대강 들어가는 업종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다채롭고 월세를 꼬박꼬박 잘 내는 업종으로 꽉꽉 채웠다. 스크린골프, 노래방, 유료 어린이 놀이시설, 전시장…. 병원만 빼고 다 들어가네요. 선임은 입맛을 다신다. 그 점이 아쉽네. 치과나 피부과, 성형외과가 들어간다면 건물가는 더 높아질 거였다. 하지만 암만 생각해도 이 구에 그런 것을 세울 땅이 없다. 나는 잘 정비된 도로와 구획들을 떠올리며 고민했다.
“공립유치원 쪽이야.”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슬쩍 내 눈치를 본다. 건물을 세우는 D사가 그쪽 땅은 다 샀는데 공립유치원을 침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에 있는 유일한 유치원이었다. 해마다 사람들은 아이를 낳았다. 조금 있으면 시 인구가 50만 명이 넘어갈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서류상에는 없는 아이들도 드글드글할 거였다. 부모들은 상대적으로 사립보다 싼 공립에 아이들을 보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유치원인데도 대학 합격자 예비 순번처럼 숫자를 매겼다. 내 딸도 이 유치원을 나왔다. 언뜻 저 멀리서, 어린 요가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 나를 보고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인다.
“그래서… 어떻게….”
선임은 운영 문제를 얘기해 유치원을 밀겠다고 했다. 그건 그가 알아서 위쪽과도 얘기를 끝낸 모양이었다. 그는 내 승인만 기다린다는 듯 빤히 내 얼굴을 본다.
말이 돌았다. 도시에 갑자기 큰 건물이 들어설 거라는 걸 알 사람은 알았다. 선은 인터넷 뉴스를 보고 알았다고 했다. 커다란 복합상가 조형도를 내걸고 D사는 광고를 했다. 시의 경제가 활성화될 거라는 의견도 있었고 환경단체 쪽이 반발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유치원을 언급하지 않았다. 포털 사이트에서 시의 이름을 검색만 해도 연관검색어로 건물이 나왔다. 선임은 승인할 수 없다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구에 있는 하나뿐인 유치원이라는 말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그는 듣지 않았다.
“개새끼.”
그는 씹어뱉듯 말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다리가 달달 떨렸다. 선임은 지나가는 똥개 보듯 나를 봤다. 그는 잊은 듯했다. 그동안 철철마다 아내가 부쳤던 선물들도, 시장이 되기 전 그의 비리를 말하지 않았던 것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굴었다. 사람은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해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는 듯 편안한 얼굴로 나중에 다시 보지, 하고 내 어깨를 짚었다.
어린 요만 한 아이들이 부모들에게 인사를 한다. 조그만 손이다. 내 손바닥의 반도 안 되는 꼭 들어오는 손. 부모들은 이제 일하러 나가는 사람의 피곤이 숨어 있는, 하루를 각오한 얼굴이다. 그래도 새끼의 인사에 웃는다. 아이들은 아이답게 자신을 향해 웃는 모습에 속는다.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노래를 부르고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는다. 아이들의 볼은 발갛고 터질 것 같다. 자기들끼리 단순하게 똥, 오줌, 방귀라는 말에 숨넘어갈 듯 웃어댄다. 그때 갑자기 지붕이 내려앉는다. 아이들은 기겁하듯 소리를 지른다. 엄마! 피곤한 웃음으로 인사하던 엄마를 있는 힘껏 부른다. 건물이 무너지면서 석면 가루가 부옇게 날린다. 떨어진 전등에 다리가 달궈진 아이가 비명을 지른다. 부연 공기 속에서 어슴푸레 밖이 보인다. 추가 계속 벽을 친다. 벽을 뚫고 비죽 솟아난 벽 철심에 아이의 눈이 찔린다. 투둑 하고 터져버린 눈알에 아이는 어? 하고 어리둥절해한다. 그러곤 아픔이 느껴지는 듯 눈 쪽에 손을 갖다 댄다. 벌겋게 벌어진 배의 상처 안을 들여다보고 소리를 지르는 아이도 있다. 미처 다 자라지 못한 말캉말캉한 어린아이의 내장을 생각하자 눈이 질끈 감긴다. 아빠 살려줘. 어린 요가 몸을 웅크리고 있다.
“세우지 않을 거야.”
내 말에 선은 네? 하고 의아해했다. 그런 것, 필요 없어. 선은 이상하다는 듯 내 얼굴을 살핀다. 토지·건설 쪽 사람들한테도 허가하지 말라고 얘기할 참이었다. 개가 되려고. 나는 조용히 웃는다.
요의 싱싱한 몸과 달리 내 몸은 늘어질 대로 늘어진 것 같았다. 배만 단단하고 둥그레었다. 배를 눌러보면 살이 차올라 손가락이 들어가지 않았다. 축 늘어지고 주름진 고환이 징그러웠다. 나는 몸을 갖고 있어, 부끄럽다는 듯 움츠렸다. 거울에 비춰 살펴보니 곳곳에 튼 살이 있었다. 나는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아이는 대놓고 나를 피했다. 딸과 아무 말이나 했으면 싶었다. 딸은 뚱한 얼굴로 TV를 보고 있다. 요? 나는 겁이 난 듯한 목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아빠 잠바 좀 줘. 요는 못 들은 척 TV 채널을 돌린다. 용돈 좀 주려고 그래. 그제야 아이는 일어나 옷방으로 간다. 잠바 왼쪽 주머니에 지갑이 있어. 옷방으로 간 요를 향해 힘주어 말한다. 그래도 내 말을 듣는 것 같아 기분이 나아진다. 잠시 후 요는 오른손에 무언가 꼭 쥔 채 나온다.
“이게 뭐야, 아빠?”
요는 손에 쥔 자신의 팬티를 건넨다.
“이게 뭐냐고!”
아이는 하얀 팬티를 내 얼굴을 향해 집어던진다. 이 변태 새끼야! 훔쳐보니 좋든? 좋아? 아이는 악에 받쳐 어쩔 줄 모른다. 요는 나를 할퀴기 위해 덤빈다. 아내가 시끄러운 소리에 무슨 일이냐며 나온다. 아빠 잠바 주머니에 내 팬티가 들어 있었어, 엄마. 요는 엄마를 보자 더욱더 소리를 높인다. 변태 새끼! 요는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듯 분에 못 이겨 다시 나에게 덤빈다. 아내가 재빨리 요의 손목을 움켜쥔다. 그만해라.
“아빠한테 그만해.”
아내는 화가 난 듯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 어디 누가 아빠한테 그러냐. 그리고 차분히 아이를 다독인다. 빨래 돌리다가 잘못 들어간 거야. 아님 엄마가 실수로 정리하다 어쩌다 들어간 거다. 딸은 엄마의 손을 가볍게 툭 치고는 방으로 들어간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내 얼굴에 집어던진 요의 팬티를 줍는다. 하얀 천에 조그만 분홍 리본이 달려 있다. 하루 종일 잠바 주머니 안에 딸의 팬티를 넣고 다닌 꼴이다.
“이리 줘요.”
아내는 잔뜩 동그랗게 구겨진 아이의 팬티를 가져간다.
선임의 전화에 나는 망설임 없이 나왔다. 집에선 아무도 나와 말을 섞고 싶어 하지 않았다. 딸과 아내를 볼 때마다 분홍 리본이 조그맣게 달린 팬티가 떠오를 것 같았다. 도시의 밤은 쌀쌀했다. 그래도 집 안의 공기보다 나았다. 아파트 단지 앞에 서 있자, 선임의 차가 왔다. 나는 그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는 이미 취했는지 술 냄새가 조금 났다.
“D사에서 보고 싶어 해.”
그는 한번 만나보는 것도 좋을 거라고 했다. 그러곤 눈을 감고 이내 코를 골았다. 기사는 등을 조금 더 젖혀도 된다고 했다. 나는 기사의 말대로 조금 더 등을 눕혔다. 덩달아 깜박 잠이 들었다.
선임과 내린 곳은 웬 집이었다. 도시의 외곽인 듯 한적한 시골이었다. 개 짖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D사 사람이 사는 곳입니까? 이 물음에 선임은 낄낄 웃었다. 아무도 안 살아. 들어가지. 겉의 모습처럼 집 안도 신경 쓴 태가 났다. 천장을 높게 짓고 일부러 맞춘 듯 따뜻한 색으로 집을 꾸몄다. 협탁 위에 있는 전등이나 커튼 같은 것들도 일일이 색감과 재질을 고려해 맞춘 듯했다. 집 안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있었다. 그중 안면이 있는 사람도 있었고 없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들 선임과 친해 보였다. 도지사와 그의 일을 맡는 변호사는 나를 보자마자 반색했다. 깍듯하게 인사하는 내 모습을 보곤 우스운지 선임처럼 낄낄댔다. 여섯 명이 모두 앉게끔 소파는 길고 컸다. 협탁 위에는 이미 술판이 벌어져 있었다. 마시게. 누군가 나에게 권했고 나는 주저 않고 마셨다. 시원하면서 썼다. D사에서 나왔다는 사람이 내 손을 꼭 쥐었다. 반갑습니다. 나는 간만에 잡는 사람의 온기에 울컥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시장님이 자주 말씀해주셨습니다. D는 다시 나에게 술을 권했다. 사람들은 벌건 얼굴로 악을 쓰고 침을 튀겼다. 모두 얼굴에 기름이 번들거리고 눈동자에 희뿌연 막이 낀 것 같았다. 얼마 만에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활어처럼 신랄하게 혀를 움직였다. 혀의 돌기가 바싹 일어난 것 같았다. 내가 던진 농담에 웃음이 터졌다. 맞은편에 앉은 도지사는 숨을 헐떡이는 바람에 앞의 술잔을 엎질렀다. D는 약속이 있는 듯 시계를 자꾸만 쳐다봤다. 멀찍이 떨어진 선임과 D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사람들은 모르는 척 다시 술잔을 돌리기 바빴다. D는 잠깐 나갔다 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D사에서 나왔다는 사람이 나와 내 손을 꼭 쥐었다. 반갑습니다. 나는 간만에 잡는 사람의 온기에 울컥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시장님이 자주 말씀해주셨습니다. D는 다시 나에게 술을 권했다. 사람들은 벌건 얼굴로 악을 쓰고 침을 튀겼다. 모두 얼굴에 기름이 번들거리고 눈동자에 희뿌연 막이 낀 것 같았다. 얼마 만에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활어처럼 신랄하게 혀를 움직였다.
D와 함께 웬 아가씨들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익숙하다는 듯 반갑게 그들을 맞았다. 여자들은 모두 외투 안에 입었다고 하기 힘든 옷을 입고 있었다. 몸매를 강조하기 위해 스판덱스 소재의 달라붙는, 민소매에 짧은 핫팬츠를 입고 있었다. 그녀가 술잔을 받기 위해 고개를 숙일 때마다 검은 레이스가 달린 속옷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여자의 젖가슴은 탄력적으로 보였다. 아예 속옷처럼 란제리 차림인 아가씨도 있었다. 앞섶에 있는 끈만 풀면 실오라기 하나 남지 않을 것 같았다. 바라보기에도 민망한데 사람들은 모두 당연하다는 듯 하나씩 짝을 지었다. 내 옆에도 검은 원피스 차림의 아가씨가 앉았다. 여자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D는 손님이 왔으니 다시 모두 마시자고 했고 사람들은 잔을 채웠다. 나도 떨리는 손으로 옆의 아가씨가 내미는 잔에 술을 따랐다. D는 한쪽 구석에 있는 노래방 기기를 틀었다. 큰 벽면 TV와 바로 연결돼, 화면에는 열대의 섬과 파릇파릇한 야자수, 색색의 빛을 내는 물고기들이 파란 화면에서 헤엄쳐 다녔다. 누군가가 아가씨의 어깨를 감쌌고 까르륵거리는 여자의 높은 웃음소리가 났다. 내 옆에 앉은 아가씨는 얌전하게 술을 마시고 회를 씹었다. 그러곤 차분히 내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선과 동갑인 것 같기도 했고 아니면 요처럼 앳돼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오물오물 안주를 하나씩 집어먹고는 맛있네요, 하고 중얼거렸다.
선임은 노래를 부르면서 같이 춤을 추는 아가씨를 끌어안았다. 그의 손이 스르르 아래로 내려가 여자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이미 다 벗은 아가씨도 있었다. 홀딱 벗은 그녀는 남자의 무릎 위에 앉아 그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는 그래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덥석 그녀의 젖가슴을 잡았다. 도지사는 반대로 자기가 다 벗은 채 여자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부푼 그의 성기가 덜렁덜렁거렸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아가씨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신물이 올라왔다.
어떻게 거길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D가 걱정스레 괜찮냐며 차를 불러준 것과,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준 여자의 손길이 기억났다. 시큼한 토 냄새도 맡았고 벽에 기대 그들을 멍하니 바라본 것 같기도 하다. 아내는 차가운 손으로 이마를 짚어줬다.
“그가 당신을 데려왔어요.”
아내는 정신없어하는 나에게 조금 더 자라고 했다. 당신이 나가고 나서 요를 혼냈어요. 그녀는 이불을 덮어주면서 말했다.
“다시는.”
“다시는 당신에게 대들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미안하대요. 나는 감기 기운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건물의 승인 허가가 떨어졌다. 유치원이 문을 닫는다고 하자 하루에도 민원 전화가 몇십 통씩 걸려왔다. 하지만 학부모들은 바로 옆 구에 있는 유치원에 등록했다. 그 구의 유치원 통학버스가 오는 모습이 종종 보였다. 기본 공사가 시작됐다. 튼튼하게 콘크리트를 바르고 붉은 철심을 곳곳에 박았다. 선임에게서 전화가 왔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도시에 바람이 불었다. 그 때문에 마치 술렁거리는 듯한 파도처럼 보인다. 도시는 전체적으로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보이기도 했다. 커다랗고 몸이 둔한 짐승이 움직이기 위해 숨을 내쉬는 것 같다. 건물을 두고 사람들은 숙덕거렸다. 갑자기 이렇게 큰 것이 들어올 리 없어. 우리 애 멀쩡히 다니다가 옮겼잖아. 건물주가 시장이래…. 실제로 이런 말들이 귀에 들어오는 듯했다. 누구는 조그만 구에 그래도 이런 게 들어서면 먹고살기 좋겠지, 하고 얘기했다. 각자의 말이 있는 거였다. 그래도 건물은 이 모든 것과 상관없다는 듯, 견고하게 올려졌다.
아이는 그제야 내 말이 들린 듯 뒤돌아본다. 아이가 흠칫 몸을 움츠린다. 컴퓨터 화면에는 플레이어가 돌아가고 있다. 갈색으로 꾸며진 집 안이다. 저기, 내가 보인다. 화면에는 내가 요의 이름을 부르면서 여자의 팬티를 입에 물고 있다. 입에 문 천 쪼가리 때문에 요의 이름은 묘나 오처럼 들리기도 한다.
말은 돌고 돌아 퍼진다. 사무실에 앉아 멍하니 인터넷 뉴스를 본다. 아나운서가 결혼을 하고 30대 백수가 라면을 사러 갔다, 슈퍼에 난 불을 껐다. 나는 뚱한 얼굴로 이것저것을 클릭한다. 그때였다.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순위에 D가 떠올랐다. 무심코 본 D의 이름은 둥둥 떠다닌다. 검색어 순위가 자꾸 올라가는 게 신경이 쓰였다. D의 이름을 클릭하는 순간, ‘D업체의 성접대’ ‘비디오’ 가 주르륵 나온다. 그중 하나를 누른다. 시에 건설 허가를 받기 위해 D업체는 업자들과 변호사, 고위 간부들을 불렀다. 그들은 D업체 쪽이 마련한 초호화 별장에서 여성들과 살을 섞었다. 이를 촬영한 비디오를 갖고 있으며 거기엔 적나라하게 그들의 살덩어리와 질펀하게 젖은 몸들이 나온다…. 한순간 멍해졌다. 뒤에 서늘한 기운이 닿는다. 심장이 갑갑했다. 홀딱 벗은 도지사와 여자들이 떠오른다. 술에 취해 서로를 끌어안고 비비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것은 사람이기보다는 마치 짐승이 서로의 체취를 맡고 소리 높여 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멀찍이 그들을 ‘본’ 것밖에 없다. 나는 커다란 동공처럼 눈알이 되어 기억하겠다는 듯 찬찬히 그들의 얼굴만 훑어봤다. 답답하다. 선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10분 단위로 D와 관련된 뉴스가 올라온다. 별장 안 모습부터 체위까지 묘사했다. 붉은 커튼이 쳐져 있었고 안에는 노래방 시설부터 사우나, 골프연습장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여자는 약을 먹은 듯 풀어진 눈으로 카메라를 보고 히죽히죽 웃어댔다. 비디오는 모두 벗은 남자가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갑자기 뒤쪽에서 여자가 그를 끌어안고 그는 노래를 부르다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인 여자와 관계를 맺는다…. 얼추 읽어도 이상야릇한 상상력만 불러일으켰다. 누군가는 직접 이 비디오를 봤다는 거였다. 사무실 밖으로 나가기가 겁이 난다. 그 비디오 안에 있을 내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생각해본다. 저녁이 될 동안 나는 나가지도 않고 꼼짝없이 앉아 계속해서 글을 봤다. 문장도 아니고 단어도 아닌, 말들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 떠돌아다녔다. 발정난 개새끼들이라고도 했고 ‘헐 대박’ 같은 말도 보였다. 고위층의 성 스캔들이라는 이런 자극적인 사건이 찌라시일 뿐이라는 말도 있었다. 나는 정신없이 저기 67페이지부터 1페이지까지 차근차근 읽는다. 그 자리에 없던 A차관의 실명이 거론되기도 했고 변태적인 성 취향까지 낱낱이 묘사하기도 했다. 간부 중 하나가 여자의 팬티를 입에 문 채 엉엉 울기도 했다고 했다. 문득 선임이 생각난다. 그가 내 옆에 있던 아가씨를 데려간다. 아가씨는 당혹스럽다는 듯 내 쪽을 본다. 나는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린다. 그는 딸의 이름을 부르며 술에 취해 눈물을 흘린다. 묘, 묘 하고 우는 그의 모습에 내 딸 요와 이름이 비슷해 가슴이 뭉클하다. 선임은 딸아이의 속옷을 주머니에 넣은 건 자기가 아니라고 했다. 여자는 그의 등을 두드려주며 다정스레 위로해준다. 그러다 갑자기 팬티를 벗어 내려 그의 손에 꼭 쥐어준다…. 실제로 선임이 그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도 나처럼 빨래를 돌리다 잘못 들어간 딸아이의 속옷 때문에 아이와 한바탕했다고 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말들은 찢어지고 찢어져 날카롭게 보인다. 씨바새끼들 다 쳐죽여야 해, 같은 말 따위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 말들은 많지만 피부에 와닿지 않아, 무게가 없어 보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불쑥, 내 이름이 떠올랐다.
사무실에서 나오자 선이 휴게실 탁자 위에 놓아둔 접시를 집는 게 보였다. 대추는 썩을 대로 문드러져 물렁해져 있었다. 그 위로 초파리들이 맴을 돌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물렁해진 대추에서 물이 질질 흘러나왔다. 썩은 음식물처럼 거북하기도 했고 단내가 남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선은 내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투명인간 취급했다. 대추는 아무도 손대지 않은 상태로 썩어버렸다. 선은 망설임 없이 휴지통 안으로 대추를 접시째 버렸다. 그러곤 나에게 인사 없이 퇴근했다.
아무 말이나 하고 싶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나왔다. 나는 보는 사람답게, 이 모든 것을 본다. 도시는 또 한 번, 소란스럽게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 못한 말이 몸 안에 돌고 돌아 식도를 건드리고, 위장을 툭툭 칠 것 같다. 그 진동이 우우- 하고 울 때마다 외로워진다. 나는 아니라고, 안 그랬다고, 이 모든 것들과 상관없다고 소리치고 싶다. 이번만큼은 말하고 싶다.
집 안은 조용하다. 이 모든 것과 상관없다는 듯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다. 아내가 깨끗하게 정돈해놓은 거실과 안방, 부엌의 식탁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에 안심한다. 아내는 저녁을 먹기 위해 아이를 부른다. 요, 하고 부르면서 아내가 정신없이 바쁘게 밥을 푸고 반찬을 꺼내는 모습이 좋다. 이 모든 것들을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으면 싶다. 아내는 중간중간 일을 하며 ‘요? 요?’ 하고 아이를 부른다. 아이는 나오지 않는다. 딸과 아내와 마주 앉아 같이 저녁을 먹으면 이 모든 일이 끝날 것 같다. 내가 부를게. 딸의 방문이 열려 있다. 요? 나는 아이를 부른다. 딸은 정신없이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요, 밥 먹자.”
아이는 그제야 내 말이 들린 듯 뒤돌아본다. 아이가 흠칫 몸을 움츠린다. 컴퓨터 화면에는 플레이어가 돌아가고 있다. 갈색으로 꾸며진 집 안이다. 저기, 내가 보인다. 화면에는 내가 요의 이름을 부르면서 여자의 팬티를 입에 물고 있다. 입에 문 천 쪼가리 때문에 요의 이름은 묘나 오처럼 들리기도 한다. 나는 다급하게 여자의 옷을 벗긴다. 터질 것 같은 둥근 배를 가진 나와 늘씬하고 하얀 여자는 서로 급하게 살을 섞는다. 여자의 숙인 허리 위로 내 모습이 찍힌다. 나는 속옷을 입에 문 채 눈물을 질질 흘린다. 신음인지 괴성인지 ‘묘, 묘’ 하고 운다. 그와는 다르게 여자는 차분한 얼굴로 담담하게 카메라 앵글을 바라본다.
“아빠, 이게 뭐야….”
“대체 뭔데?”
“이게….”
“…뭔데?”
요는 멍하니 나를 바라본다. 요의 벌어진 입안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른다. 나는 담담히 화면을 바라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아무 말이나 하고 싶어 ‘아’ 하고 입을 벌린다. 내 잃어버린 말들이 도시의 곳곳에 흩어져 작게 파르르 파르르 떨릴 것 같다. 화면에는 커서가 내 말을 모두 받아적겠다는 듯, 갓 태어난 아이의 심장처럼 발딱발딱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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