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보듬는 말을 좋아한다. “너는 나한테 강의실의 위치와 휴강 정보를 알려주고, 동기들이 날 놀리거나 속이거나 따돌리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해. 지금도 너는 내 물병을 열어주고 다음에 구내식당에 또 김밥이 나오면 나한테 알려주겠다고 해. 너는 밝고 따뜻하고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야.”
나라면 낯간지러워서 절대 할 수 없을 말이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5화에서 이 말을 마주하자, 불과 1시간 전까지 마감 원고와 씨름하느라 뻑뻑해진 눈이 촉촉해졌다. 자폐스펙트럼 장애인이자 변호사인 ‘우당탕탕 우영우’(박은빈)는 자기 별명으로 ‘최고미녀 최수연’은 어떠냐고 장난스레 묻는 친구(하윤경)에게 ‘봄날의 햇살 최수연’이라고 불러줬다. 따뜻하고 다정한 말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을 향해 어떤 온도의 말을 건네고 있을까. 최근 본 흥미로운 단어와 숫자가 참고될 것 같다. <동아일보> 디지털뉴스팀이 2022년 5월11일~7월8일 윤 대통령이 ‘도어스테핑’(24차례)에서 했던 말을 분석했더니, 가장 많이 쓴 단어가 ‘글쎄(요)’(52회)였다. ‘글쎄’와 함께 많이 쓰인 단어는 정치·외교 관련(국회·나토·정치 등), 경제 관련(금리·물가 등) 순서였다. 그만큼 정치·경제 현안에 대해 준비되지 않았거나, 자신이 없다는 뜻이다.
역대 대통령들의 연설문을 분석해보면 말에 분명한 방향성이 있다. 자주 쓰는 말이 그 방향을 가리킨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두 수레바퀴를 굴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에 대처하는 ‘개혁’을 이뤄내고자 했다. ‘사람’과 ‘대화’하기를 즐긴 노무현 전 대통령은 ‘권력’을 내려놓음으로써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고자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최고경영자(CEO) 출신답게 ‘녹색’ ‘성장’을 통해 ‘선진’ ‘국가’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창조경제’를 기반으로 ‘행복’해지자고 했다(제1096호 참조). 문재인 전 대통령은 ‘평화’와 ‘협력’ ‘한반도’ 등의 단어를 연설문에 즐겨 썼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연설문에서 35회나 썼던 ‘자유’와 ‘민주주의’(8회)는 어디로 보내고, 지금은 왜 ‘글쎄(요)’만 반복하나.
말보다 더 좋지 않은 것은 말할 때의 태도다. 취임 두 달 만에 부정평가가 긍정평가를 앞서는 ‘데드크로스’가 나타난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윤 대통령은 ‘쿨’했다. “전, 뭐 선거 때도 지지율은 별로 유념치를 않았습니다.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고.” 보듬는 말로, 국민의 돌아선 마음을 다독여도 시원찮을 판에 ‘별로’라는 말로 찬물을 뿌렸다. 국민도 싸늘하게 등을 돌렸다. 윤 대통령 국정운영에 대한 긍정평가는 30%대로 떨어졌다(7월14일 전국지표조사 33%, 7월8일 한국갤럽 37%).
이완 기자와 손고운 기자가 정치학자, 정치평론가 등 14명을 인터뷰해 장관 후보자 낙마 등 인사 문제, 이에 대해 “전 정권 지명된 장관 중 이렇게 훌륭한 사람 봤어요?”라고 되묻는 대통령의 적반하장, 도어스테핑에서 계속되는 말실수, 나토 순방 등에서 나타난 ‘비선’ 논란 등 추락하는 지지율의 이유를 하나하나 살폈다. 대통령의 공개일정, 만난 사람 등에서 ‘민생’이 빠져 있다는 점도 짚었다. 대통령은 신발 사러 백화점에 가고, 빵 사러 서울 서초동에서 성북동까지 갈지언정, 고물가·고금리에 짓눌리는 이들을 직접 만나지는 않았다(이번호 마감일인 7월14일에야 처음으로 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를 방문해 대출에 어려움을 겪는 서민들과 만났다). 박다해 기자와 김양진 기자는 윤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인 ‘김건희 리스크’를 분석했다. “(권양숙) 여사님 만나러 갈 때 좋아하는 빵이라든지 이런 걸 많이 들고 간 모양인데, (지인이) 부산에서 잘하는 (빵)집을 안내해준 것 같다.” 6월15일 김건희 여사가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 지인과 동행했다는 논란이 일자, 윤 대통령이 했던 말이다.
빵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요즘 MZ세대에게 ‘비건 빵집 투어’가 유행이라고 한다. 8월 첫째 주 발간될 <한겨레21> 통권7호의 주제는 ‘비건’(Vegan)이다. 비건 빵을 포함해, 독자 여러분의 마음을 보듬을, 따뜻한 말과 글을 준비 중이다. 옆 큐아르코드를 찍고 들어오면, 여러분의 다정한 말도 남길 수 있다.
황예랑 편집장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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