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제자가 ‘4B(비·非)운동’으로 논문을 쓰겠다는데, 그게 되겠어요?”
2024년 6월, 프랑스 대학의 한국어학과 교수가 물었다. 그땐 ‘뒤늦게 웬 4B인가?’ 싶었다. 그리고 10월, 이번에는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한 대학에서 만난 20대 여성들이 4B에 대해 질문했다. 여전히 남성 중심적이면서 이혼이 불법인 필리핀에서 여성들이 여러 부당한 일을 겪고 있는데, 이로부터 벗어날 방법으로 4B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11월,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면서 미국에서 #4B운동이 부상하고 있다. 이쯤 되니 ‘뒤늦게’가 아니란 생각이 든다.
4B란 비혼·비출산·비연애·비성관계를 의미하는 신조어인데, 차별과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 청년 여성들이 선언한 재생산 노동 파업의 다른 이름이다.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등장했고, 2018년 최초로 언론에 소개됐다. 2024년에 이르러서는 철 지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는 결혼율과 제로로 수렴하고 있는 출산율을 보면 4B란 선언조차 필요 없는 일이 됐구나 싶다. 이 ‘지옥’에서 생존하기 위한 여성들의 자연스러운 선택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재생산 노동 파업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건 서구에서였다. 1950년대 미국에선 이미 가사노동 파업을 주도한 여성들이 있었다. 이것이 21세기 한국 사회에 이르러 유례없이 급진화됐고, 4B라는 이름으로 세계 여성들에게 감정노동 파업, 섹스 파업, 출산 파업이라는 실천 혹은 탈출구를 제시하고 있다. 이야말로 새로운 케이(K), 새로운 한류라 할 만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4B일까? 이번 미국 대선에서 가장 뜨겁게 달아올랐던 이슈 중 하나는 여성의 재생산권이었다. 민주당과 공화당은 각자 이 문제에 집중했다. 트럼프로선 연방 차원에서 여성의 임신중지에 대한 헌법상의 권리를 보장했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하는 데 자신의 역할이 컸다고 자부했고, 민주당 입장에선 2022년 중간선거에서 승리한 이유가 트럼프의 이런 반인권적이고 여성혐오적인 행보 ‘덕분’이었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여성 유권자 사이에선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표를 모으려는 일상의 문화정치도 등장했다. 흥미로운 케이스는 선거 기간 중 여자 화장실, 미용실 문, 대학 캠퍼스 등에 나붙은 쪽지들이었다. 거기에는 “당신의 투표를 보는 사람은 없다” “당신이 누구를 찍었는지 남자친구나 남편은 알 필요가 없다”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처럼 남성 파트너의 압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라는 투표 독려 캠페인은 해리스에 대한 지지가 정치적 행위를 넘어 생활의 문제에 깊이 연루돼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민주당은 이 문제를 제대로 이슈화하지 못했다. 임신중지 합법화에 찬성하는 유권자 3명 중 1명은 트럼프에게 표를 던진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대선과 함께 진행된 관련 투표에서 임신중지 권리를 주(州) 헌법으로 인정하기로 한 일부 주에서도 트럼프가 승리했다. 이번 선거의 결정적 변수가 여전히 인플레이션이나 실업률 등의 경제지표였다는 평가가 우세하지만, 그럼에도 해리스의 선거 운동에 대한 냉정한 평가 역시 필요한 이유다. #4B란 해리스의 캠페인이 실패한 자리, 그리고 대의제 정치가 실패한 자리에서 터져 나온 여성들의 일상 정치인 것이다.
한국에서 4B운동이 등장하게 된 맥락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치와 제도가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때 여성들은 사적 영역에서 적극적인 실천을 시작했다. 4B운동에 대해 보도한 외신들은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회원국 중 성별 임금 격차가 가장 큰 나라임을 짚고 “‘한국의 트럼프’라고 불리는 윤석열 대통령”이 선거 유세 과정에서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하는 등 성별 격차를 부추기면서 젊은 남성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었음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4B 열풍을 이해하기 위해 한 가지를 더 짚어봐야 한다. 이 여성들의 반대편에 있는 그 ‘남성 유권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다.
브로플레이크. 형제를 뜻하는 브러더(Brother)와 눈송이를 뜻하는 스노플레이크(Snowflake)의 합성어다. 2017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주목한 신조어인데,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의 말에 ‘눈송이처럼 화르르’ 화내는 젊은 남자를 뜻한다. 비슷한 시기, 한국에는 ‘줄쓰큰’이라는 말이 있었다. ‘줄여서 쓰면 큰일 나는 남자들’이라는 뜻인데, ‘한남’(한국 남자) 같은 말에 크게 분노하는 안티페미니스트 남성을 일컫는 인터넷 은어였다. 그해 메리엄웹스터가 올해의 단어로 ‘페미니즘’을 꼽았고, 케임브리지사전은 ‘포퓰리즘’을 뽑았다는 점은 브로플레이크가 주목받았던 맥락을 보여준다.
브로플레이크의 등장은 트럼프의 지지 세력인 대안 우파의 정치세력화와도 연결된다. 이들은 남자야말로 피해자이자 약자라는 ‘남성 약자 서사’의 생산자이자 동시에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으며, 이런 피해의식 속에서 이방인과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을 사회로부터 배제하고자 한다. 이 시대의 차별과 혐오는 과거와 달리 “주체의 우월의식을 반영하기보다는 불안을 반영”(김보명)한다. 이번 대선에서 아프리카계와 라틴계 남성들의 트럼프 지지세가 올라갔던 이유도 어느 정도는 이 부분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트럼프의 혐오선동 정치가 ‘나는 충분히 가지지 못했다’는 지배적인 불안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과는 다르다’는 다소간의 우월감에 어필했던 셈이다.
자신을 약자라고 생각하는 이 남성들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저널리스트인 수전 팔루디는 1999년에 이 문제를 파고든 책 ‘스티프트’를 출간했다. 그리고 트럼프가 당선된 지 3년 뒤인 2019년, 책의 20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트럼프 지지자들의 등장에 깜짝 놀란 척하지 말라. 화가 난 남성들의 보수화야말로 내가 20년 전 이 책에서 이미 다 했던 이야기 아닌가?”
팔루디가 이에 주목했던 이유는 그가 1980년대 미국 사회에서 펼쳐졌던 페미니즘과 젊은 여성들에 대한 공격인 ‘백래시’에 천착했기 때문이다.(그렇다, 그는 페미니스트 고전인 ‘백래시’의 저자다.) 백래시는 로널드 레이건 통치로 상징되는 1980년대 뉴라이트의 부상 및 보수화와 함께 사회 각계각층에서 전방위적으로 일어났고, 여기에는 ‘나를 버리고 떠나서 내 밥그릇을 빼앗는 여자들’에 대한 분노가 놓여 있었다. 팔루디는 궁금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성차별이 공고한 상황에서 이런 신화는 도대체 어디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그래서 그는 6년 동안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수백 명이 넘는 남자를 인터뷰한다. 그리고 화가 난 남자들의 혼란에는 ‘배신의 경험’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건 여자들의 배신이 아니었다. 그건 해고, 비정규직화, 부동산 가격 폭등, 복지의 몰락, 정치적 무시 등의 형태로 나타났던 국가와 자본의 배신이었다.
남성들의 밥그릇을 뺏는 건 자신의 재생산 능력을 통제할 수 있게 된 여성들이 아니다. 그건 끊임없이 노동력을 유연화하고 자동화하려는 자본이자 그와 손잡은 국가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과 국가는 점점 올라가는 노동력 재생산 비용과 임금을 낮추기 위해 노동자를 말 그대로 ‘쓰레기’(지그문트 바우만)로 만드는 데 몰두했다. 쉽게 뽑고 쉽게 해고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한편에서 노동자를 무용한 존재로 만드는 와중에 다른 한편에서는 사람이 24시간 소비활동에 몰두하게 하는 중독경제가 열렸다. 중독경제 시대의 자본은 이 고난을 딛고 쉽게 성공하는 방법이란 신체 이미지 및 일상의 이야기를 팔아 주목을 끌어 ‘셀럽’이 되거나, 코인이나 주식과 같이 실물 없는 디지털 자산에 몰빵하는 길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진정으로, 불안하고 화날 만하다.
다만 궁금한 것이 있다. 여자들은 화가 나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움직였다. 옳든 그르든, 그게 페미니즘 운동이다. 그런데 대체의 남자는 무엇을 하는가? 타인을 무시하고, 배제하고, 괴롭히겠다고 나서는 것 말고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운동을 조직해보는 건 어떨까? 미국 대선을 지켜보다가 뜬금없이 “남자들의 4B운동은 어떤 형태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 건,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손희정 시사덕후
*손희정의 정치 리부트: 낡은 세계는 죽어가고 있지만 새로운 세계는 아직 태어나지 못한 시절, 구태를 뒤집는 새로운 정치를 보고 싶은 시사덕후의 시사 평론.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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