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전 연재를 시작했을 때, 첫 글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났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희망소멸사회’다. 저출생의 원인은 우리에게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희망이 완전히 소멸한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아직 선거는 10개월이나 남았다. 우리는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그 실체를 보게 될 것이다.”
그동안 ‘소멸’에 대해 여러 주제를 다뤘다. 왜 희망이 없는가에 대해 미래세대인 청년들이 어떤 조건에 처했는지, 또 그 청년들이 왜 결혼과 아이 낳기를 주저하는지, 이런 청년의 삶이 왜 불안과 사회적 부조리로 나타나는지, 끝없이 낮아지는 합계출산율이 ‘수도권 집중’과 ‘지방 소멸’이라는 현상과 어떻게 연계되는지, 균형발전 관점에서 보면 ‘잼버리 사태’와 ‘김포시 서울 편입’이 왜 하나의 문제인지, 그리고 최근에는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불안 요소 중 당면한 위험으로서 한반도의 긴장 고조와 전쟁의 공포에 대해 말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고 이제 선거까지는 4개월 정도 남았다.
참으로 불행히도, 첫 글의 마지막에 했던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다. 대부분의 학자는 이런 디스토피아적 예상을 던질 때, 이것이 현실로 나타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자기가 틀려도 좋으니 그런 문제가 개선되기를 원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올여름에 비해 조금도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2023년 11월 마지막 주 많은 언론이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의 ‘한국은 소멸하는가’라는 칼럼을 호들갑스럽게 소개했다. 사실 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언론 등 어느 분야에서도 ‘한국의 소멸’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단위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언제나 그러했듯이, 외국의 언론이나 학자가 한마디를 하면 다 같이 선정적 보도에 나섰다. 그러나 그뿐이다. 다음날이면 여전히 우리가 정치면에서 볼 수 있는 기사는 정치가 아닌 ‘가십’이다.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 나라가 됐다지만, 한국의 정치와 언론은 내한한 독일의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에게 남북통일의 해결 방안을 묻고, ‘나는 한국 상황을 잘 몰라서 별로 할 말이 없다’는 하버마스의 대답을 들었던 1996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누군가 ‘한국의 소멸’에 대해 국가적 대처가 필요하다고 말해도 반응하는 곳이 없다. 이런 문제를 제기해도, 정치적 책임 공방이나 예산 나누기의 문제로(잼버리 사태를 보라), 단지 정치적 승부수나 부처 확대의 속셈으로(출입국·이민관리청 논란을 보라), 선거용 이슈로(김포시 서울 편입 문제를 보라) 기화돼 사라질 뿐이다.
소멸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태도만큼 영화 <돈 룩 업>(Don't Look Up)에 어울리는 상황도 없다. <돈 룩 업>에서 천문학자들은 지구로 향하는 혜성을 발견하고 항공우주국 나사에 알린다. 그러나 대통령이 총선과 대법관 지명 문제로 정신이 팔려 이들의 말에 신경 쓰지 않자, 학자들은 할 수 없이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 이 사실을 알리려 한다. 하지만 언론은 시청률에만 신경을 쓰고, 오히려 천문학자들의 예능감이 도마 위에 오른다. 선거가 어려워진 대통령이 이들을 다시 불러 지구를 구하겠다는 발표를 하지만 갑자기 취소된다. 혜성에 중국이 독점한 희토류가 있으니, 혜성을 파괴하지 말고 개발하자는 어이없는 주장이 나왔기 때문이다. 국민은 현실을 직시하고 하늘을 보자는 ‘룩업’파와 유언비어에 속을 필요 없다는 ‘돈룩업’파로 분열되고, 이들은 시위를 벌이며 서로 싸운다. 결국 어이없는 계획은 당연히 실패하고, 지구는 종말을 맞는다.
대한민국이 소멸하고 있다. 국내 전문가들이 이를 경고하지만, 선거에만 정신이 팔린 정치권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여야의 공방 어디에서도 소멸하는 대한민국을 구하자는 내용의 토론은 없다. 소멸을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시청률도 조회수도 안 나오기 때문이다. 언론은 소멸에 대해 자극적으로 말하는 외국의 유명한 연사들을 데려와야 겨우 몇 줄을 쓸 뿐이다. 언론에 남는 것은 ‘한국 망했어요!’라며 머리를 감싸 쥐는 사진이나, ‘흑사병도 없는데 한국은 왜 소멸하나’ 같은 문구뿐이다.
인터넷 댓글은 두 가지다. 이런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사람도 간혹 있으나, 대부분은 ‘문재인 때는 아무 말도 안 하다가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니 나라 망한다고 주장하는 빨갱이들 짓’이라는 댓글이다. 대통령이 지방시대위원회에서 발표하는 날, 여당은 서울을 더 키우자고 말하고, 균형발전을 강령으로 가진 야당은 눈치만 보면서 어쩔 줄 모른다. 여야는 감세에 동조하면서 임대주택 예산을 깎고, 내년 여름에 또다시 물이 들어오는 반지하방에 가서 서로 국민을 위하는 척할 것이다.
합계출산율이 극단적으로 낮아지는 상황에도 정부·여당이 아무것도 안 하는 사이, 장관인지 정치인인지 알 수 없는 법무부의 수장은 이민청을 법무부 산하에 신설해 동남아시아에서 임금이 싼 아이돌보미를 수입하자고 한다. 정치적으로 자기 장사도 하고, 법무부의 숙원도 해결하자는 것이다. 실제 저출생 문제는 어떻게 될지 알 바가 아니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소멸한다.
그렇다. 문제는 정치다. 대한민국이 소멸하고 있다면, 그것을 해결해야 할 책임은 일차적으로 정치에 있다. 그러나 정치는 어떤 역할도 못하고 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점은, 대한민국이 소멸하게 된다면 그 이유는 정치가 소멸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치가 소멸하고 있다’면, 우선 여기서의 정치란 무엇인지 정의해야 한다.
정치에 대해서는 수많은 정의가 있지만, 그중 다음 네 가지가 대표적이다. ①통치 기술로서 정치 ②공적 업무로서 정치 ③권력으로서 정치 ④타협과 합의로서 정치.
첫째는 현대 정치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는 국가의 역할과 관계있다. 둘째, 공적 업무로서 정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공사 구분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공적 영역의 사안을 결정하는 정치는 모든 시민의 참여로 만들어지는 권리이자 의무이다. 셋째, 권력으로서 정치는 인간사 모든 곳에 정치가 존재한다고 본다. 이 정의에 따르면 모든 인간관계는 본질적으로 지배-피지배라는 권력관계로 구성된다. 넷째, 타협과 합의로서 정치는 그것이 적용되는 영역이나 주체보다는 통치나 권력이 작동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 정의다. 정치란 가능성의 기예이며, 인간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갈등을 폭력이나 강압이 아니라 조정과 합의로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 네 가지 관점 외에, 복잡해진 현대 정치에서 우리가 정치에 기대하는 점도 있다. ‘국정운영 능력’이다. 미국 정치학자 스콧 애들러와 존 윌커슨은 정치의 역할이 ‘사회문제를 실제 해결하는 것’이라고 봤다. 요컨대 정치는 국가의 통치 작동이면서 시민들의 참여를 기반으로 하되, 권력관계에서 경쟁과 협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의 소멸을 생각할 때 하나 유념할 점은, 이게 ‘정부’의 부재나 무능과는 다른 범주라는 것이다. 정부란 말 그대로 행정부를 의미한다. 정부의 부재와 무능이란, 이태원 참사와 잼버리 운영 부실, 엑스포 유치 과정에서의 완전한 오판 같은 끔찍한 일로 나타날 수 있다. 정책적으로는 외교 실책과 한반도 안보 긴장의 고조, 기후위기 대응의 방기로 기후악당이 되는 것은 물론 기업들의 국제 경쟁력이 손실되고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 연구개발(R&D) 예산 감축으로 국가의 미래 경쟁력을 포기하는 것, 그리고 당면한 경제침체에 대해 ‘상저하고’ 같은 근거 없는 말로 면피하거나, ‘부자 감세’를 앞세우며 재정투자를 축소함으로써 내수경기 활성화에 손 놓는 것 등으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정부 부재는 정치 부재의 결과일 수 있다. 그러나 정부 부재 자체가 정치 부재는 아니다. 정치란 기본적으로 입법부의 일이며, 우리 헌법에서 보면 정당 간 경쟁과 협력으로 일어난다. 정부와 의회 사이에서도 정치는 꼭 필요하지만, 그 역시 여야라는 정당정치의 틀 안에서 일어난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정치’와 그것의 ‘소멸’에 대해 어느 정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부의 역할에 해당하는 ‘통치’를 포함한 정치를 정의해본다면 그것은 아마 ‘국가가 당면하거나 미래에 준비해야 할 주요한 일에 대해, 문제 해결의 비전과 방식을 달리하는 정치적 세력 간에 일어나는 경쟁과 협력’이 될 것이다. 그래서 정치 소멸은 셋 중 하나일 것이다. 누구도 미래 비전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 문제 해결의 비전이나 방식에서 별 차이가 없는 경우, 그리고 권력투쟁에만 매몰돼 제대로 된 정책 경쟁이나 협력이 없는 경우 말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 소멸하는 이유는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이 비민주적 검찰 독재로 야당을 탄압하고, 무능과 무책임으로 국정을 방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정부가 무능하거나 국가적 어젠다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치에서 한 세력이 형편없이 국가를 운영한다는 뜻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응당 국민의 지지가 다른 세력 쪽으로 압도적으로 기울어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이관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박사)*소멸 직전의 정치: 2024년 4월10일 총선일을 디데이 삼아, 한국 정치에서 ‘희망’을 찾아보려는 칼럼입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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