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서울 신림역 인근에서 30대 초반 남성이 무작위로 칼을 휘둘렀다. 한 청년이 무참하게 목숨을 잃었고 3명이 부상을 당했다. 8월, 퇴근 시간 경기도 성남 분당 서현역에서 20대 남성이 자동차로 사람들에게 돌진하고, 곧이어 흉기를 들고 시민들을 공격했다. 13명이 다쳤고 1명이 숨졌다. 적어도 치안만은 다른 나라보다 월등히 낫다고 여기던 시민들이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경찰은 이를 ‘테러’로 규정하고 ‘특별치안활동’을 했다. 소총을 멘 경찰특공대와 장갑차들이 지하철역과 대로변에 나타났다. 총을 든 경찰이 거리를 활보하면 시민들은 더 안전하다고 느낄까? 경찰은 대규모 수사전담팀을 만들어서 대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제 우리는 마음을 놓아도 될까?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과거에 더 끔찍한 사건도 적지 않았다. 1993년부터 연쇄살인을 저지른 지존파는 성폭행과 살인을 연습처럼 자행했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10대 조직원을 포함해 피해자들을 실로 잔혹하게 살해했다. 불과 2년여 뒤인 1996년, 막가파는 지존파를 모방해 여러 건의 강도, 납치, 살인을 조직적으로 저질렀다. 그리고 1999년, 영웅파가 나타났다. 이들은 더 잔인한 방식으로 조직원을 죽이고 주검을 없앴다.
이 사건의 가해자들은 ‘돈 있는 놈들을 죽이고 싶었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변명했다. 그들이 저지른 엽기적이고 비인간적인 범죄의 핑곗거리로 용납할 수 없는 논리였다. 그래서 우리는 ‘가해자에게 스토리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세웠다.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것은 범죄행위를 용인하거나 심지어 미화하도록 하고, 피해자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원칙을 세운 근본적 이유는 사건을 말 그대로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정의를 세우며, 다음의 범죄를 막기 위해서다. 그런데 실제 우리가 선택한 방법은 이런 목표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신 더 쉬운 선택을 했는데, 가해자를 단순히 ‘악마화’하기다. 개인에게서 사건의 원인을 찾는 것은 범죄자 검거를 목적으로 하는 수사기관에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범죄를 예방하고 사후 대책을 마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요컨대 홍수로 인한 재난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수사와 감사도 필요하겠지만, 기후위기는 그렇게 해서 방지될 수는 없다.
2017년 신문 <한겨레>에 첫 칼럼을 썼다. 제목은 ‘악마의 탓만은 아니다’. “박현준. 2014년 5월29일생. 엄마는 19살, 아빠는 20살. 이듬해 부모는 헤어졌다. 2017년 7월12일, 9개월간 외할머니가 키우던 현준이를 재혼한 친부가 데려갔다. 얼마 후 현준이는 ‘경추압박질식사’로 숨졌다. 목이 졸려 죽은 것이다. 어쩌다 3살 아이가 스스로 목이 졸려 죽은 것일까? 부모는 현준이의 목에 개목줄을 채워 침대에 묶어놓았다. 숨질 당시 현준이의 몸무게는 돌을 갓 지난 10㎏ 수준이었고, 음식과 물을 먹지 못해 항문이 괴사하고 내장이 내려앉은 상황이었다. 아이의 마지막을 생각해본다. 굶주림과 목마름 때문에 어차피 목숨이 한계에 다다른 아이는 목이 졸려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버둥 쳤을 것이다. 현준이의 외할머니는 ‘악마에게 15년형이라니’라며 절규했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도 악마는 있다. 악마에게서 아이들을 보호할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필자는 이 글에서 아동학대에 대해 국가와 사회가 책임을 느끼지 않고 다만 개인들을 악마화하는 것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 말하고 싶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얼마나 변했을까? 2023년 7월 초, 흉기난동 사건이 있기 직전 우리 국회는 영아살해에 대한 법정최고형을 사형으로 높이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영아살해 사건이 논란이 되자 문제의 해결책으로 형량을 올리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사실 우리 법체계에서 살인에 대한 처벌이 3단계로 나뉜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영아살해는 징역 10년 이하로 약하게 처벌하고, 그다음 일반살인죄가 있고, 또 위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존속살인을 가중처벌하는 법을 갖고 있었다. 이번에 개정한 내용은 영아살해를 살인죄에 포함하는 것이다.
이는 아동학대에 대한 과거의 대응에서 한 발짝도 진전되지 못한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영아살해의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고, 처벌을 강화하면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생각한다. 아동학대에 대해 구조적 원인을 규명하기보다는 학대하는 자들을 악마화하는 것으로 해결하려 했던 사회가, 영아살해에 대해서도 처벌이 약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대응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비통한 일이다.
영아살해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2013∼2021년 9년간 영아살해 피의자 86명 중 10대와 20대가 78%(67명)였다. 20대가 44%(38명)였고, 20살 이하도 34%(29명)나 됐다. 영아유기 피의자 중에서도 20대가 39%, 20살 이하가 20%였다. 놀라운 것은 성별이다. 여성이 291명, 남성이 70명이었다. 아이는 두 성별이 함께 만들었을 텐데, 아이를 유기한 피의자는 압도적으로 여성이 많았다. 이 통계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회경제적으로 불안한 배경의 청년들이 우발적 상황에서 아이를 갖고, 육아의 책임은 여성에게만 전가되는 불평등 속에서 감당되지 못한 영아들이 살해·유기된다고 생각하면 지나친 것일까? 그리고 이 문제는 처벌을 세게 하면 해결되는 일일까?
대책은 무엇일까? 10대의 성교육을 강화하고, 혼외 출산 자녀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제도·문화적으로 결혼 다양성을 높이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는 개인들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지우고 형벌을 강화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작동하지 않을 것을 알지만, 대중이 열광하는 방식으로 가장 열악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슬쩍 눈감는다. 이는 끔찍한 위선이다. 많은 지방자치단체가 여전히 저출산 대책으로 단체미팅을 주선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 과연 희망이 있을까?
한때 ‘구조’란 말이 유행했다. 오죽하면 이런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일이 잘못됐는데, 위에서 누가 잘못했느냐고 물으니 사회의 ‘구조’가 문제라고 답했다 한다. 그러자 윗분이 ‘당장 그 구조란 놈을 잡아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런 말을 주변에서 잘 듣지 못한다.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그 말이 이미 상식으로 자리잡아 더는 쓰지 않아도 됐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모든 책임을 구조 탓으로 돌리는 게 오히려 무책임을 방조하고, 심지어 개인의 면책 수단으로 악용되는 사례가 나타나서일 수도 있다. 혹은 사회가 보수화하거나 자본주의적 능력주의가 심화하면서 사회적 성공과 실패에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하나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강화됐을 수도 있다. 예컨대 내가 지금 살기 힘든 이유는 전적으로 가격이 오르기 전에 부동산과 주식과 코인을 사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게 내 책임이다!”
이런 풍조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정치인들은 ‘구조적 불평등은 없다’는 식의 과감한 발언으로 인기를 얻기도 한다. 이런 발언은 발화자의 지적 수준을 의심케 할 정도로 놀라워서, 방법론적 개인주의라는 말 같은 것은 감히 붙일 수도 없다. 한편으로 두렵게 생각해야 할 점은, 이것이 사회 전반에서 ‘각자도생’이라는 강력한 프레임으로 작동하는 일이다. 이 프레임에 갇히면 우리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흉기난동 전담팀을 운영하는 법무부는 2023년 8월4일 입장문에서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2023년 7월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사회에서 용납할 수 없는 괴물의 경우 영원히 격리하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는 과연 올바른 해결책인가?
법무부 발표 이틀 뒤인 8월6일,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정신질환자의 치료·회복 시스템의 개선을 주장했다. 사회와 가족이 변화하는 상황에서 중증 정신질환의 무거운 부담을 계속 개인과 가족에게만 감당시키기는 어렵다고 봤다. 이들은 보호의무자 중심의 입원제도를 폐지하고, 선진국에서 시행 중인 ‘사법입원’이나 ‘정신건강심판원’ 제도를 도입해서 개인이 아닌 국가가 이 문제를 책임지는 방향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대한조현병학회는 정신질환자의 입원 절차가 까다롭고, 특히 코로나19 이후 정신의학과의 병상 수가 급감하면서 많은 환자가 적정한 치료를 받지 못한다고 밝혔다. 우리는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하는가?
서울 서초구 서이초등학교 사건의 원인과 해결책은 무엇인가? 학교폭력에 대해 우리가 ‘학생에 대한 폭력은 교사의 잘못이다. 교사에 대한 인권침해는 학생과 학부모가 잘못이다’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그렇게 학생인권과 교사인권을 대립점으로 놓고,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하면 교사의 인권이 저절로 회복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기실 작동이나 할 것인가?
어떤 언론과 정치인들은 이런 프레임을 잘 활용한다. 그래서 인기를 누리고, 그렇게 세상은 점점 더 지옥이 돼간다. 악마와 괴물이 더 많이 출연해야 그들의 뒤를 캐고, 강하게 비난하고, 단죄하고,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고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 이렇게 돈과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그리고 대중은 그들을 추앙한다. 진실은 조회수 앞에 무릎을 꿇는다.
다만 이 아수라의 세계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이런 사회는 결코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관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박사)
*소멸 직전의 정치: 2024년 4월10일 총선일을 디데이 삼아, 한국 정치에서 ‘희망’을 찾아보려는 칼럼입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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