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새해가 밝았다. 정치 소멸을 말하는 지금, 돌아보면 2016년의 촛불은 꿈만 같다. 그때의 정치는 팔팔 살아 있었다. 정확히 말해, 국정을 운영할 능력을 가진 정부는 없었지만 그 정부를 끌어내릴 시민이 있었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던 국회와 정당들과 사법부도 마지막 단계에서는 시민의 뜻을 충실히 따랐다.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이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포퓰리즘이 미국과 유럽을 삼키려던 순간, 한국의 촛불은 폭풍우 속 외로운 등대처럼 민주주의를 지키고 있었다.
8년이 지났다. 많은 것이 변했다. 우리는 지금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회, 소멸해가는 대한민국을 맞았다. 유례없는 빠른 속도로 우리는 멸종하고 있다. 한 진화생물학자의 지적대로, 80억이나 되는 인류가 지구를 뒤덮어 기후위기를 초래하는 때, 인류세에 대한 반작용으로 스스로 인구를 줄이려는 생물학적 자정작용일지도 모른다. 행복하지 않은 생물군이 스스로 후손을 낳지 않으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나타나는 부작용은 많은 사람에게 심각한 고통으로 다가올 것이다.
당장 지방에서 학교와 병원 같은 기본적인 삶의 인프라가 사라지고, 고령화와 노인 빈곤이 급격히 진행되고, 연금의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너무 빠른 ‘소멸’은 먼 미래의 후손을 사라지게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소멸 과정에서 너무 많은 피해가 발생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소멸하더라도 그 속도를 조정해야 한다.
소멸 속도를 조정할 책임은 전적으로 정치에 있다. 그러나 국가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 갈등을 조정하는 정치 자체가 소멸해버렸다. 인과관계로 말하면, 정치가 소멸했기에 대한민국이 속절없이 소멸의 길을 가게 된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시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와 정치효능감이 급전직하했다.
지금 한국 정치에 시민은 사라지고 팬만 남았다. 그저 팬덤이라면 괜찮다. 그런데 이제는 팬덤을 넘어 컬트문화의 우상처럼 돼버렸다. 정치가 게임처럼 되는 게 걱정이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스포츠보다도 못한 저잣거리의 싸움이 됐다. 게임에는 룰이 있고 스포츠에는 존중이 있다. 한국 정치에는 그런 것이 없다. 상대가 모르면 치트키를 써도 되고, 반칙해서라도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가 반칙하면 심판을 기다리고 룰을 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쪽도 그냥 밀어버려야 한다. ‘상대가 반칙하는데 이쪽만 룰을 지키라는 거냐?’는 말을 누구나 서슴지 않고 한다. 이렇게 정치는 끝이 났다.
불과 석 달여 뒤 있는 국회의원선거를 생각하면, 새해 벽두부터 정치 소멸을 논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다. 여느 때 같으면 정당의 대표와 정책 책임자들이 선거 구도와 핵심 의제, 주요 공약에 대해 말하고 사람들은 그에 대해 욕하든 편들든 간에 이런저런 품평을 할 것이다. 우리 지역에서는 누가 나온다더라, 저 당의 간판은 누구라더라 하는 이야기도 시작되는 때다.
그러나 선거를 100일 정도 앞둔 지금, 우리는 이 총선이 어떤 의미를 갖고 치러질지 알기 어렵다.
여당에서는 새해를 일주일 앞두고 당대표가 비상대책위원장으로 교체됐다. 이 당대표는 당대표가 된 날이 정치를 처음 시작한 날이다. 민주화 이후 이런 일이 있었던가? 그의 지휘 아래 여당은 총선을 치르는데, 그가 생각하는 정치가 무엇인지, 국정철학과 비전, 정치력은 어떤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국민은 물론이고 당 내부에서도 당정 관계가 어떻게 될지, 야당과의 관계는 어떻게 풀어가려는지 알 도리가 없다. 이태원 참사에서 잼버리와 엑스포까지, 정부의 여러 실정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보여준 대통령실의 현실 인식이 타당한지에 대해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어떤 의견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의 취임사는 야당 비판으로만 채워졌는데, ‘비상’이 걸린 곳은 야당이 아니라 정부와 여당이어서 그가 취임한 것이 아니었던가? 법무부 장관이면서도 서울~양평 고속도로와 명품가방 같은 대통령 부인의 의혹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했고, 그저 ‘운동권 야당 심판론’만 앞세웠다. 그는 취임사에서 ‘선민후사’와 ‘동료 시민’을 말했다. 그러나 국무위원으로 재직하던 시절 그의 태도에서 국회를 존중하는 자세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에게 동료 시민이란, 정치적 견해는 다르지만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함께 어려움을 이겨낸 모든 시민이 아니라 정부와 여당의 지지자뿐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정치관은, 모든 잘못을 전 정부 탓으로 일관했던 용산의 관점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다. 그렇다면 여당이 ‘비상’해진 진짜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다. 여당이 검찰처럼 상부 지시에 철저하게 복종하지 않아서다. 그래서 금융감독원과 방송통신위원회에 이어 국민의힘에도 ‘검사’를 파견한 것이다.
이 문제는 단순히 대통령과 여당 대표의 친분으로 이해될 일이 아니다. 이 정부 들어 여당에서 민주주의란 찾아볼 수 없다. 멀쩡한 대표를 쫓아냈고, 법정 공방 끝에 시작한 전당대회는 개최 직전에 룰을 바꿨고, 그다음엔 유력 주자들이 차례로 출마를 포기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대표’는 용산의 눈치만 보다가 작은 항명조차 묵살당한 채 끝났다. ‘선거’로 뽑힌 당대표가 고개를 잠시 쳐들자, 대통령실은 공천을 책임질 비대위원장을 사실상 임명했다. 대선의 일등 공신을 자처하고 92대의 버스로 지역구의 지지를 과시한 의원조차 출마를 포기했다. 이제 국민의힘이라는 여당은 검사를 파견해서 장악할 수 있는 국가기관 중 하나에 불과하다. 한국의 정당민주주의는 이렇게 질식해서 사라졌다.
야당 상황도 만만치 않다. 지난 대선 이후 야당은 정권의 정치 탄압에 따른 어려움을 호소했다. 다수 국민도 ‘야당 탄압’이라는 프레임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야당은 그 순간에서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무엇보다 야당의 존재 이유를 국민에게 납득시키려는 시도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소멸해가는 국가를 방치하는 정부·여당에 맞서 더불어민주당이 저출생, 고령화, 수도권 집중, 지방 소멸, 청년의 미래, 기후위기, 교육개혁, 일자리 문제를 놓고 사생결단의 정책 대결을 벌이는 일은 없었다. 사생결단의 의지는 항상 다른 곳에서 나왔다.
민주당은 수도권 메가시티론에는 눈치를 보며 여당의 지자체장들 보다도 수세적 태도를 보였고, 스스로 수차례 약속한 연동형 선거법조차 주저하고 있다. 야당 내에서도 ‘꼼수정치를 하고 원칙도 버리는 건 막가자는 정치다. 원칙이 있고 대의명분이 있는 민주당의 길을 가야 한다. 병립으로 돌아가면 국민의힘과 똑같아지는 것이다’라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지도부는 요지부동이다. 정치개혁에서 국민의힘과 차별성이 없는 정당을 단지 야당이라고 찍어 달라고 할 명분이 얼마나 있을까?
검찰 정부의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 야당 대표가 탄압에 항의하는 표시로 단식하고 있을 때 제출된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됐다. 여당 의석이 112석밖에 안 되는 상황이었다. 지난 몇 달간 그전 같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나 언행을 기억할 만한 장면이 거의 없다. 그동안 당의 원심력은 점점 커졌다.
검찰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에 국민은 실망하고 좌절하고 있다. ‘대통령이 잘못하고 있다’는 평가는 국민의 60%에 이르지만, 야당 지지는 35% 전후로 여당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심지어 한 여론조사에서는 이재명 대표가 정치를 시작한 지 일주일 된 여당 비대위원장에게 차기 대선 후보 지지도에서 역전당했다.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로써 총선 구도에서 윤석열 정부 심판이 사라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재명 대표가 테러를 당해 수술을 받고 입원했다. 정치인에 대한 폭력적 행위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정치인에 대한 호오의 표출은 비판과 투표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하고 있는 민주주의다. 이재명 대표가 빨리 회복해서 대표직에 정상적으로 복귀하기 바란다. 이 대표가 해결해야 할 일이 많다. 소멸 직전의 나라와 정치를 복원하려면, 야당이 강하게 바로 서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선거 구도가 만만치 않아졌다. 정부 심판 프레임이 사라진다면, 선거 구도는 이제 ‘한동훈 대 이재명’ ‘국민의힘 대 민주당’이라는 정당 간 경쟁으로 치러지게 된다. ‘정부·여당’ 대 ‘정권 심판 연대’라는 구도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23년 이준석 신당에 대한 한 조사에서는 민주당 지지층이 더 많이 빠져나갔다. 여기에 이낙연 신당까지 나오는 마당이다. 야당 단합은 누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손을 내밀고 연대와 연합의 정치를 시작할 때 가능하다.
한국 정치는 유력 대선주자들의 영향력을 크게 받는다. 겉으로는 한동훈과 이준석이 분열한 것 같지만, 73년생 한동훈과 85년생 이준석이 여권에서 일으키는 바람은 여기서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 총선에서 변화의 바람이 강하게 분다면 대선까지 위험하다. 다음 대선에서도 국정 비전이 없는 대통령이 당선된다면, 소멸하는 한국 사회를 되돌리기란 사실상 어려워질 것이다.
이관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박사)
*소멸 직전의 정치: 2024년 4월10일 총선일을 디데이 삼아, 한국 정치에서 ‘희망’을 찾아보려는 칼럼입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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