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없는 집단에서 개체들은 삶을 포기하기도 하고, 경쟁에 떠밀려 결혼을 포기하기도 하고, 결혼하더라도 후손을 낳지 않으려 한다. 이것이 지금 한국 사회에 자살과 비혼과 저출생이 나타나는 원인이다.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잡고 싶은 젊은이들은 서울과 수도권으로 향한다. 서울로 향한 젊은이 중 상당수는 아이를 낳을 여유나 생각이 없다. 청년들이 떠난 지방은 빠르게 고령화하고 있고, 교통이나 의료 같은 기본 인프라는 규모의 경제를 감당하지 못해 더 빠르게 줄어드는 추세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한국은 수축 사회를 넘어 소멸 사회로 가고 있다.
사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최정점에 올라선 순간 갑자기 소멸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열강의 손에 유린당하고, 엄혹한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서, 불과 반세기 만에 근대화와 산업화, 민주화를 모두 성취하며 세계 10대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나라가 왜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분명히 성공했다. 그러나 성공과 발전의 원동력이었던 발전주의, 성장 이데올로기, 능력주의, 개인주의, 개발주의가 이제 한국 사회의 지속가능성과 공동체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계속해서 심화한 양극화는 각자도생 시대를 낳았다.
지난 한 세대 동안, 한국은 자살률에서는 세계 최고를, 출생률에서는 세계 최저를 기록하는 사회가 됐고, 사회경제적 양극화 역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수준이다. 지방은 소멸하고 있고,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은 매우 늦고, 민주주의의 질도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 역량 있고 성찰적인 시민을 길러야 할 교육제도는 불평등을 노골적으로 세습하는 도구가 됐다. 획일화한 시험만이 공정의 기준으로 인정받는 사회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 30년 동안 한국 교육은 거대한 입시지옥으로 변했다. 좋은 일자리는 극소수에게만 돌아가고, 젊은 시절 한번 실패한 인생은 돌이킬 수 없다. 평범한 회사원과 노동자, 농민들은 소득으로 집을 마련하기 어려운 부동산 지옥이 됐고, 가계부채는 산더미처럼 쌓였다.
이렇게 한국은 ‘압축성장’에서 ‘압축소멸’로 향하고 있다. ‘고속성장’의 대가로 ‘과도불안’ 사회를 맞이했다. 경쟁에서 이긴 소수도 탈락한 다수도 모두 행복하지 않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느 때보다 부강하지만, 사람들은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 상대를 이기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극단적인 경쟁 속에서 삶을 갈아 넣는다. 이대로는 아무도 행복하지 않고 아무도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알면서도 말이다.
정치는 우리 사회를 덮친 문제들을 해결하기는커녕 당장의 사회적 갈등이나 재난조차 해결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우리는 국가 부재 상태에서 무관심과 무능으로 일관하는 정치를 보고 있다.
지금 한국의 정치인과 정당들에서는 정책적 경쟁이나 협력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로지 상대를 적대화해 정치적 이익만 누리면 된다는 태도에서는 모두 별 차이가 없다. 그래서 지금의 정치는 민주주의적 경쟁이 아니라 권력을 두고 벌어지는 인기투표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만약 지금의 정치적 갈등, 경제적 위기, 사회적 분열이 2030년 정도까지 지속된다면, 대한민국은 정말로 회복 불능의 상황에 빠질 것이다.
희망소멸사회를 지속가능한 공동체로 바꿔나갈 전환점을 마련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이것 없이는 소멸을 막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근본적 문제들을 치유할 비전과 대안을 찾고, 그것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각자가 감당해야 할 몫에 대한 합의를 이뤄내야 한다. 위기에 처한 사회를 구할 한국판 베버리지 보고서(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베버리지가 정부 위촉으로 사회보장에 관한 문제를 연구·조사한 보고서)와 그것을 실천할 공동체의 연대가 필요한 것이다.
먼저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 만약 정치가 스스로 복원되지 않는다면, 헌법적 주권을 가진 시민들이 새로운 정치를 촉구하고 스스로 만들어나가야 한다. 민주주의자로서의 품격과 공동체 전체에 대한 책임을 가진 정치가 필요하다. 대한민국 현실을 정확하게 직시하며, 미래를 걱정하고, 대안을 고민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정치를 왜 하는지에 대한 철학과 비전을 언제든지 물을 수 있는 정치, 국가를 이끌어갈 수 있는 전문성과 리더십을 갖춘 정치, 소수의 지지자가 아니라 다수 국민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정치가 필요하다.
이런 정치를 복원하려면 먼저 시민들의 숙의와 토론이 가능한 공론장이 필요하다. 정확한 사실들을 모으고, 그에 대한 시민들의 의견이 활발하게 제기되고, 시민들 상호 간의 존중 속에서 이성과 상식에 기초한 숙의가 이뤄지며, 이렇게 모인 의견에 대해 정치가 반응하는 공론장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 공론장을 위한 새로운 미디어도 필요하다. 조회수만 노리고 자기편만 보는 미디어는 민주주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제되지 않은 욕설과 비난이 난무하고, 의견 차이가 아닌 편가르기로 상대를 악마화하는 곳에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민의 의견도 민주주의도 아니다. 새로운 미디어를 통해 지금 대한민국의 진짜 문제들을 공론장에서 논의해나가야 한다.
대한민국에는 위기 때마다 시민이 있었다. 독재에 맞선 4·19는 어린 학생들과 청년들이, 부마항쟁과 광주민주화운동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1987년 민주화는 시민과 노동자들이 이뤄냈고, 민주화 이후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냈던 2016년 촛불 현장에도 늘 주권자인 시민이 있었다.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와 사회가 타락한 이유는, 시민의 주권을 양도받은 세력들이 정치적 책임과 역사적 소명을 방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은 결국 시민이다. 혐오와 갈등의 한국 사회, 압축소멸사회, 과도불안사회의 미래를 바꾸는 마중물이 될 시민들의 조직적·실천적 행동을 고민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무한경쟁의 세계에서 비참한 삶을 살아갈지, 그래서 우리 다음 세대에게 희망 없는 사회를 물려줄지, 아니면 행복을 꿈꾸며 살 수 있는 지속가능한 대한민국을 만들어나갈지를 시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무엇보다 시민의 헌법적 권리를 되찾는 것이 중요하다. 모두가 누려야 할 기본권, 곧 평등하고 정의롭고 자유로운 나라에서 살 권리, 교육받을 권리, 주거의 권리, 기회균등의 권리,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한 시민들의 행동이 필요하다. 그 시작은 시민들이 스스로 정치를 바꾸고, 공론장을 형성하고, 시민들의 숙의와 토론을 통해 ‘더 나은 나라, 더 좋은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갈지에 대한 고민과 실천에서 출발할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국민의 행복한 삶과 지속가능한 사회를 목표로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 자살률과 출생률, 사회경제적 양극화 지수에서 OECD 평균 수준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중·장기적 계획을 세우고, 모든 정치·사회 세력이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인간과 노동의 가치를 훼손하고 극심한 자산 양극화와 주거불안을 가져오는 부동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토지·주택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의 교육제도, 입시제도는 우리 아이들을 무한경쟁 속으로 밀어넣고 건강한 시민을 길러내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이제 학교 자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서로를 신뢰할 수 없는 현재의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기후위기 대응은 회피하거나 미룰 수 없는 인류사적 과제다. 또한 세계의 산업과 경제는 이미 기후대응을 중심으로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우리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국제적으로 합의된 기후대응 목표를 달성해야 하며, 이를 위한 국가적 목표를 세우고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능동적으로 추진해나가야 한다.
지역의 소멸은 대한민국의 소멸이다. 부동산, 청년 일자리, 저출생·고령화, 교육 불평등, 경제적 양극화 등 많은 문제가 지역 불균형에서 기인한다. 지역소멸에 대응할 특단의 조처가 당장 강구돼야 한다. 지역의 경쟁력 강화와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종합적인 계획을 마련하고 대규모 재정을 투자해서 실천에 옮겨야 한다.
모든 차별과 혐오에 반대하며,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가 동등한 시민적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제도적·문화적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안전한 사회, 사람의 생명이 우선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가정과 일터, 생활 공간에서 억울하게 다치고 죽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한반도에서 항구적이고 안정적인 평화를 구축해야 한다. 한반도의 생존과 번영을 위협하는 어떤 시도에도 단호히 반대하며, 한반도의 비핵화와 남북 간 교류협력, 긴장완화를 지향해야 한다.
‘더 나은 나라, 더 좋은 사회’는 누가 대신 만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시민 스스로 소멸하는 대한민국을 멈추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정치가 가장 중요하다. 극단적 권력투쟁이 아닌 문제 해결을 위한 합리적 진보와 건전한 보수가 경쟁·협력하는 정치, 포퓰리즘과 팬덤을 넘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정치, 갈등을 드러내고 조정하고 화해시키는 정치, 미래에 대한 비전을 놓고 숙고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그것만이 소멸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관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박사)
*한국 정치에서 ‘희망’을 찾아보려 한 이관후 교수의 칼럼 ‘소멸 직전의 정치’ 연재를 끝냅니다. 그간 수고해주신 필자와 사랑해주신 독자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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