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대 총선에서 정의당은 원외 정당이 됐다. 조국혁신당이 12석으로 제3당이 되고, 진보당과 개혁신당 등 소수정당들이 원내에 진출하기는 했다. 그러나 2004년 민주노동당이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면서 제도권 정당이 된 이래로, 진보정당으로서 자력으로 5석 이상의 의석을 유지해온 세력이 원내에서 사라진 것은 충격적인 일이다.
현상적으로 진보적 제3정당의 원내 역사가 20년 만에 중단됐다는 것이지만, 이것은 단순히 한 정당의 성쇠를 넘어서는 일이다. 분단과 전쟁 이후 반쪽으로 왜곡된 이데올로기 지형에서 ‘노동’을 당의 명칭에 내건 진보적 제도정당이 만들어지고, 다양한 선거에서 지속적으로 후보를 내고, 원내에 진출하고, 보이지 않던 사람들을 대표하고, 진보적 정치 어젠다를 기획해내는 일을 해오던 정치세력이 국회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비단 한 정당만의 일이 아니라, 한국에서 정치의 소멸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김기동·이재묵이 2020년에 발표한 논문 ‘한국정치의 유권자 지형’은 한국종합사회조사(Korean General Social Survey) 데이터를 기반으로 2003∼2018년 유권자들의 정당일체감에 따른 정치이념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에는 진보정당 입장에서 특히 충격적인 내용이 포함돼 있다. 진보정당의 독자적인 지지 블록이 유권자층에서 사라진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16년 전인 2008년 제18대 총선 무렵이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이 처음 원내 진입에 성공한 2000년대 초반에는, 한국의 유권자층이 ‘보수-중도-민주당(리버럴)-진보’라는 4개 그룹으로 비교적 명확하게 구분된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 시기에 민주당과 진보정당의 차이는 점점 줄어들어서, 노무현 정부 말기에는 그래프가 거의 수렴한다. 두 정당 지지자들의 이념적 차이는 이후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2012년 대선 이후 두 정당의 지지자들은 함께 진보성향이 더 강해졌고, 2016년 촛불 이후에는 완전히 수렴했으며, 2018년에는 오히려 정의당보다 민주당 지지자들의 진보성이 더 강한 상황까지 나타난다.
2020년 제21대 총선에서는 어땠을까? 한국정치학회와 한국정당학회가 공동으로 실시한 ‘21대 국회의원 선거 유권자 정치의식조사’에서 정당일체감과 정치이념 평균을 보면, 10점 척도(진보0-보수10)에서 무당파는 5.21을, 미래통합당은 7.47을 보였다. 더불어민주당이 3.08이었는데, 정의당은 4.67로 나타났다. 정의당 지지자들의 평균값이 민주당 지지자들보다 더 중도적이었다. 앞서 2018년 무렵 정당일체감에 따른 이념성향에서 민주당과 정의당 지지자들이 역전됐던 현상이 2020년에도 그대로 확인된다. 연구자들은 주관적 이념성향 외에 실제 복지·노동·젠더·북한·환경 등 개별 정책 이슈에 대해서도 태도를 확인해봤는데, 여기서도 정의당 지지자들은 민주당과 다른 독립적인 차별성을 보여주지 않았다.
주관적 이념 성향이나 정책 이슈에 대한 태도에서는 차이가 나지 않더라도, 일단 특정 정당을 지지한다고 했으니, 투표는 다르게 하지 않았을까? 아니었다. 실제 지역구 후보에 대한 투표 행태에서 정의당 지지자는 민주당 지지자와 차이가 없었다. 더 놀라운 것은 비례대표에서도 차이가 없었다는 점이다. 보통 우리는 진보정당 지지자가 지역구 투표에서는 소선거구제의 특성 때문에 당선 가능한 민주당 후보를 찍고 비례대표에서는 진보정당을 찍는 전략적 투표(strategic vote)와 분할 투표(split vote)를 한다고 생각해왔다. 아니었다. 지역구는 물론이고 비례대표에서도 정의당 지지자들이 특별히 더 정의당에 표를 몰아주지 않았다. 민주당 지지자 중에서도 정의당에 표를 나눠준 사람이 있었고, 정의당 지지자 중에서도 민주당에 투표한 사람이 있었다. 심지어 2020년 총선에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처음 도입됐고 양대 정당이 위성정당을 만들어 선거법 개정의 취지를 훼손했는데도, 정의당 지지자들의 투표 행태는 민주당 지지자들과 차별성이 없었다.
정의당의 몰락은 예견된 것이었다. 장기적으로는 민주노동당이 막 원내 진입을 해서 첫 국회의원 임기를 끝내던 바로 그 시기부터, 2010년 민주당이 장악한 서울시의회에서 무상급식 조례가 통과되던 때를 거쳐,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과 박근혜가 모두 복지국가를 국가 비전으로 제시하고 경쟁하던 시기, 그리고 2016년 촛불과 2020년 총선을 거치면서, 정의당의 독자적인 지지층은 신속하고도 분명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어떻게 진보정당은 20년 가까이 원내 정당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여러 연구와 조사 결과들의 내용이 거짓이 아니라면, 이것은 한국의 민주진보 진영에서 일부 유권자가 ‘원내에 진보정당도 하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 외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조금 매정하게 말하자면, 정의당은 원내정당 진입에 필요한 독자적 지지 기반을 가졌던 적이 거의 없다. 다만, 잠재적 민주당 지지자 중에서 정의당의 역할을 인정하는 사람들의 표를 받아서 의석을 유지했던 셈이다. 이것이 정의당이 ‘2중대’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였다.
실제로 진보정당의 의석은 진보정당이 얼마나 잘하느냐보다도 민주당 의석수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제17대에 열린우리당이 민주당 계열 정당으로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과반의석을 점했을 때, 민주노동당은 10석으로 진출했다. 제18대에 통합민주당이 81석으로 줄었을 때, 민주노동당 의석은 5석으로 반토막 났다. 제19대에 민주통합당이 다시 127석으로 늘어났을 때, 통합진보당은 13석으로 역대 최대 의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제20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123석으로 122석의 새누리당을 앞서 다수당이 됐지만, 민주당 유권자들은 이제 진보정당이 아닌 국민의당에 38석을 몰아줬다. 정의당은 6석에 그쳤다. 제21대 총선에서는 연동형 선거제가 도입됐음에도 정의당 의석은 그대로 6석이었다.
정의당은 선거제도의 취지를 훼손한 양대 정당을 비판했지만, 진보진영의 유권자들은 애초에 정의당에 표를 줄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위성정당 비판은 힘을 받지 못했다. 만약 민주당이 위성정당을 만들지 않았다면, 지역구에서 민주당을 찍은 유권자들이 ‘기꺼이’ 정의당에 비례투표를 던졌을까? 물론 ‘어쩔 수 없이’ 던졌을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것은 본래의 표심은 아닐뿐더러, 지속성이 의심되는 매우 불분명한 지지다.(심지어 정의당 득표가 열린민주당보다 많았을지도 불분명하다.) 사실 정의당은 지역구에서 민주당에 투표한 유권자들이 비례투표를 포기해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도 연동형 선거제에 따른 정의당의 의석은 크게 늘어나니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미래통합당 위성 정당의 의석도 훨씬 늘어났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런 결과는 다수 유권자가 실제 원하는 결과였을까?
요컨대 질문은 이것이다. 연동형 선거제도가 도입됐는데 양대 정당이 위성정당을 만들고, 정의당이 이를 비판할 때 유권자들이 공분하려면, 또 그 비판이 내용적으로 타당하려면 한 가지 조건이 형성돼야 한다. 정의당을 독자적으로 지지하는 유권자들, 곧 다른 정당들의 의석과 관계없이 정의당이 많은 의석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독자적 지지층이 유의미한 규모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민주당을 찍든 정의당을 찍든 상관없는 유권자들에게는 가장 피해야 할 것이 보수정당 의석이 늘어나는 것이다. 정의당 의석이 득표의 비례성에 맞게 확보되는 것은 그다음 일이다. 정치학자들과 정의당이 아무리 위성정당을 비판해도, 제도의 취지나 이론적 공정성보다는 실제 의석 배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권자들의 입장과 그것은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한국의 진보정당이 하나의 함정에 빠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제도 만능주의다. 이번 총선에서는 그 민낯이 드러났다. 지난 총선에서 정의당은 위성정당을 탓했다. 그러나 이번 제22대 총선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일단 3% 이상을 득표해야, 표를 얻은 만큼의 의석을 배분받지 못했다는 비판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녹색정의당의 득표율은 2.14%로 많이 못 미쳤다. 심지어 3.61%로 비례에서 2석을 얻은 개혁신당에도 미치지 못했다. 반면 더불어민주연합이라는 위성정당이 있었음에도 조국혁신당은 24%를 넘게 득표했다. 제3지대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제3지대에 정의당이 설 자리가 없었다.
이렇게 원내 정당 정의당의 역사는 그동안 언급되지 않았던, 또는 누군가에 의해 주장됐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하나의 사실이 드러나면서 끝을 맺었다. 비례대표 선거제도의 변화는 정의당을 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제21대 총선에서 위성정당이 없었다면, 정의당은 15석이나 20석을 넘는 의석을 가진 명실상부한 진보정당이 되었을 것이라고. 물론 여기에는 많은 이야기가 추가돼야 한다. 소선거구제의 문제, 의원 정수의 문제, 비례대표의 의석수가 너무 적다는 것, 그래서 양대 정당도 비례의석을 얻고 싶으면 의원 정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 등 할 이야기는 많다. 그러나 현실은 이론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위성정당이 없다면, 민주당 지지자들은 내키지 않더라도 최악을 막기 위해 정의당에 표를 나눠줄 생각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보수정당의 경우에는 애초에 그럴 정당이 없었다. 이 제도를 호락호락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던 셈이다.
결국 이 모든 조건을 다 고려할 때, 정의당이 처음부터 고려했어야 하는 전략은 단 2개뿐이다. 현실을 인정하고 민주당의 당내당이 되거나 혹은 민주당과 협력·경쟁·견인하는 진보정당이 되든지, 아니면 정의당의 독자적 지지 블록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정의당은 대체로 이상적으로는 후자를 지향했지만 방법을 찾지 못했고, 현실적으로는 전자에 가까운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 둘 사이에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통합된 지도부를 가질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정의당을 원외로 내몰았다.
이관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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