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소멸사회’를 주제로 글을 쓴 지 2주 후, 박명림 연세대 교수가 한 일간지 기고문에서 그 소멸의 속도를 간명하게 표현했다. “대한민국은 압축성장에서 압축소멸로 치닫고 있다. 벼락발전에서 벼락소멸로 나아가고 있다. (…) 우리는 소멸로 치닫는 이 나라를 과연 다시 살려낼 수 있을까?”(<경향신문> 2023년 6월15일치)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없는 것처럼, 국가도 언제까지나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국가가 소멸하는 이유는 전쟁, 기근, 경제 파탄, 자원 고갈, 기후변화 등 다양하다. 이 중 어떤 것은 그 국가 구성원이 막아낼 수 있고, 또 어떤 것은 한 나라가 감당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런 심각한 문제가 없는데도 다음 세대를 낳지 않아 스스로 소멸을 선택한 국가가 과연 역사에 있었던가? 국가를 함부로 의인화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대한민국을 굳이 사람에 비유해보면 이 나라는 지금 자살을 결심한 것이다.
겉으로만 보면 사실 납득이 되지 않는다. 지난 70여 년간 대한민국은 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지금이야말로 가장 성공한 시점에 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과 분단의 시련을 겪었음에도 근대화와 산업화, 민주화를 모두 성취하며 세계 10대 강국,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 만약 한국이라는 나라가 자살을 시도한다면, 오히려 일제강점기를 겨우 벗어난 상황에서 분단을 거쳐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른 직후여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은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다. 1965년,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절대빈곤층이 국민의 40%가 넘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08달러로, 세계 순위는 121위였다. 2017년, 한국의 실질구매력 기준 1인당 GDP는 4만달러를 넘어서면서 일본을 앞질렀다. 이것은 상징적이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일본이라는 이웃 나라에 억눌려 지냈고, 많은 한국인의 머릿속에서 일본은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제트(Z)세대(1990년대 중후반 출생자)는 일본을 ‘물가가 싸고 여행하기 좋은 나라’ ‘과거사 문제를 사과하지 않는 이상한 나라’ 정도로 여긴다.
한국의 민주주의도 세계적으로 보면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나라 가운데 민주화를 쟁취한 예외적인 성공 사례다. 우리에게는 긴 시간으로 느껴지지만, 1950년 전쟁에서 1987년 민주화까지는 한 세대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한 세대 이상 이 민주주의를 잘 지켜오고 있다. 2017년 대통령 탄핵은 시민의 자유로운 참여에서 출발해 헌정 절차에 따라 이뤄졌는데, 이것이야말로 ‘87년 체제’가 견고하게 자리잡았다는 방증이었다.
가장 큰 성취는 전혀 예상하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다. 한국 문화가 세계의 주류로 떠오른 것이다. 드라마·한식·뷰티 등에서 조용히 시작된 한류는 영화를 통해 월드클래스로 떠올랐고, 방탄소년단(BTS)으로 상징되는 케이팝은 국경과 인종을 완전히 뛰어넘었다. 한국말로 된 아시아인의 노래를 전세계인이 따라 부르는 일을 과연 상상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 한국은 자살을 결심했다. 더 이상 이 국가와 사회를 지속시키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과연 인류 역사에 이런 나라가 있었을까? 세계의 최빈국·약소국 중 하나로 분단과 전쟁까지 겪은 나라가, 실로 엄청난 속도로 세계 최고 수준의 정치·경제·문화를 성취한 다음, 바로 그 시점에 소멸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만약 한국이 다음 한 세대 안에 인구 회복의 탄력성을 완전히 잃고 소멸해버린다면, 이는 단순히 한 나라의 소멸이 아니라 인류 문명사에서 참으로 기이한 일이 될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한국이라는 나라의 성장과 소멸을 통해 ‘인간과 사회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게 될지도 모른다.
앞에서 국가 소멸을 인간의 죽음에 비유해본 것은, 이 질문을 던지기 위함이었다. ‘왜, 언제 인간은 죽음을 선택하는가?’ 가장 보편적인 이유는 ‘희망’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참으로 묘해서, 눈앞에 닥치는 엄청난 고난은 굳은 결심과 노력으로 잘 이겨내지만, 그 어려운 과정을 다 통과한 뒤 맞부딪친 허무나 절망 앞에서는 쉽게 무너진다. 사람은 밥이나 물 없이도 며칠이나 버틸 수 있지만, 희망 없이는 단 하루도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희망이란 지금보다 더 나아지리라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그것만 있다면 인간은 감옥이나 수용소에서도 잘 버텨낸다. 심지어 희망만 있다면 자기 생명을 기꺼이 희생하기도 한다. 개인보다 더 큰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또 자기 후손이 더 나은 삶을 살리라는 희망이 있다면, 가장 소중한 생명까지 내놓는다. 그렇다면 희망이 없다는 건 무엇일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다. 이 공동체가 행복해질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다.
왜 청년 세대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까? 2016~2020년 실시한 제7차 ‘월드 밸류 서베이’(World Values Survey·세계 가치 조사)에서, 한국 청년 중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무려 20.8%로 나타났다. 한국의 전체 연령대에선 14.1%가 그렇게 응답했고, 이는 전체 국가 청년의 응답률인 14.7%와 크게 다르지 않다. 더욱 이목을 끝 것은 지난 2차 조사(1990~1994년)와의 격차다. 당시에는 그렇게 응답한 비율이 8.4%에 불과했다. 전세계적으로는 2차 조사 때 16.0%에서 14.7%로 떨어졌는데 한국만 거의 수직상승을 했다.
2021년 한국방송(KBS)의 ‘세대인식 집중조사’에서, ‘집값 상승은 미래에 대한 나의 희망을 무너뜨렸다’라는 물음에 ‘매우 그렇다’고 응답한 비율은 45.2%였다. 같은 질문에 50대의 동일 답변은 38.0%였다. ‘암호화폐가 내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다’라는 물음에는 청년의 34.7%가 ‘매우 그렇다’와 ‘그렇다’라고 답했는데, 50대는 13.7%만이 동일한 답변을 했다.
이 조사를 분석한 임동균 서울대 교수는 “인생은 왜 살아야 하는지, 동료 구성원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적인 가치를 어떻게 지켜갈 것인지 등에 대해 이미 상당히 많은 청년이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며 “우리가 유지해온 공동체의 사회적 해체를 뜻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최근 한 입시전문가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전국의 많은 고등학교가 고1 첫 중간고사를 본 뒤부터는 상위권 10%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교를 운영한다고 했다. 나머지 90% 학생은 1학년 때부터 배제된다. 대학에 가면 어떻게 될까? 윤홍식 인하대 교수의 <이상한 성공>(한겨레출판 펴냄)에 따르면 ‘괜찮은 일자리’로 불리는 대기업·공공부문 일자리 수는 연간 7만 개 수준이다. 1990년대생을 기준으로 하면 동일 연령대의 10% 정도 된다. 요컨대 대한민국에서 90% 청년에게는 ‘실패’가 예정돼 있다.
이 ‘실패’는 무엇의 실패일까? 2021년 미국 퓨리서치센터는 17개 선진국의 성인 1만7천 명을 대상으로 ‘당신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세계인들이 꼽은 가치는 ‘가족’(38%)과 ‘직업’(25%)이었다. 17개국 중 단 한 나라, 한국만이 ‘물질적 풍요’(19%)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꼽았다. 다른 선진국에서는 대체로, 그리고 30대 이하에서는 더 많은 사람이 ‘친구 관계’ ‘교육과 배움’ ‘자연을 즐기는 삶’ 등에 고령층보다 더 많은 가치를 뒀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그런 가치를 외면했다. 교회와 절에 다니는 사람이 많지만, 종교를 선택한 이는 1%뿐이었다.
물질적 풍요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사회에서 90%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구조. 여기서 청년 개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뿐일까? 그래서 공정한 경쟁을 반드시 원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통념과 달리 청년들은 다른 세대보다 특별히 더 ‘공정’에 집착하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한 KBS 조사에서 청년들은 절차적 공정성의 엄격함을 묻는 것에 50대보다 유연한 모습을 보였다. 임금과 능력의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교육방송(EBS) 다큐멘터리 <교육격차>에서 청년들은 경쟁에서의 성공과 행복을 분리했다. 경쟁에서 이긴 10%조차 이 경쟁이 지속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90%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나라. 성공한 10%조차 행복하지 않은 나라. 이런 나라에서 자살률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이 자살을 한 세대 동안 내버려둔 결과, 국가가 통째로 자살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에게 종종 이런 질문을 한다. ‘100명이 탄 배가 침몰하고 있다. 구명정에 탈 수 있는 사람은 10명이다. 어떤 기준으로 구명정에 탈 사람을 정해야 할까?’ 우리는 이런 식의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지난 100년을 살아왔다. 10명 안에 들기 위해 100명이 다 열심히 경쟁하는 사회를 만들었더니, 나라가 잘살게 된 것이다. 이 질문은 앞으로도 유효할까? 이미 그렇지 않다는 증거는 많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까?
이관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박사)
*소멸 직전의 정치는 2024년 4월10일 총선일을 디데이 삼아, 한국 정치에서 ‘희망’을 찾아보려는 칼럼입니다. 4주마다 연재.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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