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23일, 영국 보수당의 새 총리 리즈 트러스는 감세 정책을 발표했다. 총리로 취임한 지 17일 만이었다. 소득세 기본세율을 20%에서 19%로 낮추고, 최고세율은 45%에서 40%로 낮추기로 했다. 인지세 면제 부동산 가격을 25만파운드로, 최초 구매인 경우는 면세 부동산 가격을 42만5천파운드로 높였다. 이어 잉글랜드은행은 9월29일 국채를 무제한으로 매입한다고 밝혔다.
그러자 파운드화가 폭락했고 금융시장은 대혼란에 빠졌다. 전국에서 물가 폭등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보수당의 핵심 위원회인 ‘1922년 위원회’가 움직이자 트러스 총리는 10월20일 사임 방침을 발표했다. 취임한 지 45일 만이었다. 닷새 뒤 당내 선거에서 리시 수낵이 다음 총리로 결정되자 바로 물러났다. 취임한 지 50일 만이었다. 감세 정책을 발표한 지 33일 만이었다. 영국 역사상 최단기 총리였다.
이보다 6년 전인 2016년 7월26일 티브이(TV)조선은 미르재단 기금 모금에 청와대 안종범 경제수석이 개입한 의혹이 있다고 보도했다. 9월20일 <한겨레>는 미르재단과 케이(K)스포츠재단 설립과 운영에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측근인 최서원(최순실)씨가 관여했다고 보도했다. 10월24일 제이티비시(JTBC)는 최씨의 태블릿피시를 입수해 박 대통령의 연설문 등 국가 기밀이 최씨에게 사전에 유출됐다고 보도했다.
이들 보도가 나가자 10월26일부터 100여 개 대학의 학생들이 시국선언을 했고, 10월29일부터 전국에서 박근혜 퇴진 촛불시위가 벌어졌다. ‘헌법과 법률의 중대한 위반’이 언론을 통해 고발되고 다섯 달 뒤인 2016년 12월 국회에서 박 대통령은 탄핵소추됐다. 2017년 3월 헌법재판소가 박 대통령을 파면했다. 박-최 게이트가 폭로된 뒤 여덟 달 만이었다.
영국에선 총리가 정책 결정의 잘못으로 물러나는 데 한 달 남짓 걸렸는데, 왜 한국에선 대통령의 정치적·법적 잘못이 드러난 뒤 물러나는 데까지 여덟 달 넘게 걸렸을까? 영국에선 총리의 잘못이 소속 보수당 안에서 심각한 문제가 됐고, 이로 인해 강한 사임 압력을 받았다. 그런데 한국에선 대통령의 잘못에 대해 당시 소속인 새누리당이 문제 삼거나 사임을 압박하지 못했다. 탄핵은 야당을 중심으로 추진됐다.
이는 대통령중심제와 의회중심제 사이에 존재하는 이른바 ‘책임성’의 차이에서 비롯했다. 영국에선 시민이 의원을 뽑아 의회를 구성하면 의회의 다수당은 총리를 포함한 내각을 구성한다. 의회는 총리와 내각을 만들 뿐 아니라 이들에게 정치적·법적 책임을 물어 사퇴시킬 수 있다. 이를 ‘불신임’이라고 한다. 트러스 총리의 경우 의회에서 내각 전체가 불신임당하기 전에 소속 정당에서 총리만 사퇴시킨 것이다. 총리 개인의 잘못이 크면 정당은 집권을 유지하기 위해 ‘불신임’보단 ‘총리 사퇴’를 선택한다. 물론 내각 전체가 책임져야 하면 내각이 총사퇴하고 다시 총선거를 치른다.
이렇게 선출 주체인 의회가 선출된 내각에 책임을 묻을 수 있는 정부를 ‘책임정부’라고 한다. 이런 정치를 ‘책임정치’라고 부른다. 통상 의회중심제에선 이런 ‘책임성’이 명확하다.
대통령제에선 이런 ‘책임성’이 약하거나 거의 없다. 대통령이 큰 잘못을 한 경우에도 탄핵 아니면 사퇴시키지 못한다. 이는 대통령 임기를 보장함으로써 행정부의 안정성을 선택한 결과다. 반면 의회중심제에서 총리는 정해진 임기가 없다. 정당과 의회로부터 신임받으면 길어지고 불신임받으면 짧아진다. 트러스처럼 50일 만에 그만두기도 하고,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처럼 16년 동안 집권하기도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들어선 뒤 책임정치나 책임정부에 대한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윤 대통령이 중요 문제의 결정과 집행에 적절한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거나(2022년 9월 ‘바이든-날리면’ 발언 논란),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떠넘기거나(2023년 8월 해병대 채 상병 사건 조사 개입 논란), 책임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거나(2022년 10월 이태원 참사, 채 상병 사건), 잘못된 일을 그대로 밀어붙이는(2023년 3월 일제 강제동원 제3자 변제 논란, 2023년 3월 독립전쟁 지도자 5인 흉상 철거 논란) 행태를 보였다.
그래서 대한민국 대통령에 대해서도 ‘책임성’을 높이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현행 헌법에서 대통령에게 직접 책임을 묻는 제도는 ‘탄핵’이 유일하다. 그러나 탄핵은 그 요건이 엄격하고 그 결과도 ‘파면’으로 극단적이다. 또 노무현, 박근혜 전 대통령 사례에서 보듯 정부 운영의 공백과 혼란을 가져올 우려가 크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탄핵은 일반적으로 사용하기 어려운 수단이다. 중간이 없고 바로 파면하는 것이어서 정상적인 정치 과정이라고 보기 어렵다. 신중히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복경 더가능연구소 대표도 “대통령의 정치적 책임을 묻는 탄핵까지 허용한다면 정치적 안정이 무너진다. 탄핵이 쉬워지면 선출된 대통령은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이것은 남아메리카 나라들에서 잘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책임을 묻더라도 대통령 탄핵보단 국무위원에 대한 해임 건의와 탄핵을 중간 단계로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참여연대 공동대표)는 “대통령 탄핵 같은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면서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는 방법이 바로 국무위원 해임 건의와 국무위원 탄핵이다. 행정부에 잘못이 있어서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먼저 국무위원 해임 건의를 하고 그래도 대통령이 반응하지 않으면 국무위원 탄핵을 해야 한다. 이러면 대통령도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이미 윤석열 정부 들어 사용됐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국회는 2022년 9월 박진 외교부 장관, 2022년 12월 이상민 행정안정부 장관을 해임 건의했지만 윤 대통령은 거부했다. 2023년 9월 국회는 한덕수 국무총리에 대해서도 해임 건의했지만, 이것도 거부하리라 예상된다. 심지어 국회는 국무위원 탄핵소추도 시도했다. 국회는 윤 대통령이 이상민 장관에 대한 해임 건의를 거부하자, 2023년 2월 이 장관의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7월 재판관 전원의 의견으로 이 탄핵소추안을 기각했다.
서복경 대표는 “총리·장관 해임 건의나 장관·검사 탄핵은 헌법에 보장된 제도이고, 국회가 윤 대통령에게 간접적으로 책임을 물은 일이다. 윤 대통령이 이런 경고를 계속 무시한다면 대통령 탄핵도 거론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직 도입되지 않는 제도 가운데는 대통령에 대한 국민소환도 있다. 그러나 다수 전문가는 대통령 소환이 대통령 탄핵과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제도라고 우려했다.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민이 뽑은 대표자를 직접 소환한다는 의미가 있지만, 국민이 직접 나서서 싸운다는 점에서 우려가 크다. 탄핵제도는 입법부와 사법부가 완충 역할을 하지만, 국민소환은 그런 것도 없다”고 말했다.
김선화 국회 입법조사처 선임연구관도 “통상 탄핵은 법적인 것, 소환은 정치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소환도 탄핵처럼 사유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정치적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 특히 대통령 소환은 주민소환과 달리 국가적 문제이고 안보에도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세계적으로 대통령 소환을 도입한 나라는 거의 없는데, 국회의원 소환을 도입한 나라는 일부 있다. 정치 선진국 가운데는 영국이 거의 유일하게 2016년부터 국회의원 소환을 도입했다. 이제껏 2019년 두 차례, 2023년 한 차례 등 모두 3명의 국회의원이 소환돼 국회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영국의 국회의원 소환도 △범죄행위 등으로 구금된 경우 △의원직을 14일 이상 정지당한 경우 △2009년 의회기준법상 수당 신고를 잘못한 경우 등 세 가지로 제한된다. 정치적 책임을 묻는 소환은 인정되지 않는다.
앞으로 개헌하면 대통령의 책임성을 높이는 방안을 도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선거를 자주, 정기적으로 배치해 대통령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이관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정치학)는 “선거를 통해 책임을 묻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대통령 임기를 4년 중임으로 바꾸되 국회의원선거를 임기 중간에 두면 2년마다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선화 선임연구관도 “정치적 혼란의 우려가 큰 임기 중 소환보다는 미국처럼 국회의원 임기를 2년으로 줄여서 2년마다 선거로 책임을 묻는 것이 어떨까 싶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에 대한 임기 중 소환은 ‘자유위임’ 원칙에도 잘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유위임이란 선출한 대표의 활동에 주권자의 의사를 강제하지 않고 재량권을 주는 것을 말한다. 자유위임의 반대는 ‘강제위임’ 또는 ‘기속위임’이다.
물론 책임성을 높이는 정치를 하려면 의회중심제(의원내각제, 내각책임제)로 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길이다. 내각책임제라는 말 자체가 ‘의회가 내각에 책임을 묻는다’는 뜻이다. 한상희 교수는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윤 대통령한테서도 대통령제의 폐단이 극단적으로 나타났다. 이제 의원내각제로의 전환을 생각해봐야 한다. 의원내각제로 가야 유신헌법의 잔재인 ‘제왕적 대통령제’도 청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개헌은 쉽지 않으므로 그 전에라도 의회 중심으로 정부를 운영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김수민 정치평론가는 “행정부에서 의회로 정치의 중심을 바꿔야 한다. 대통령이 권한을 좀 내려놓고 국회에서 총리를 뽑아 정부를 운영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개헌은 그 뒤에 천천히 해도 된다”고 말했다.
서복경 대표도 “개헌 전에라도 국회에서 총리를 선출할 수 있고, 국회 다수당의 대표가 총리가 될 수 있다. 그러면서 대통령의 권한을 줄여나갈 수 있다. 그런 정치적 상상을 해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참고 문헌:
김선화, 영국의 국민소환제 내용과 실시 사례 및 시사점, 2019
이승우, 책임 정치 실현을 위한 정부 형태로서의 의원내각제, 2007
장영수, 직접 민주제 강화 개헌의 쟁점과 성공 조건,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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