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정치란 누군가를 특별하게 좋아하는 정치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팬덤정치의 본질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정치인이나 정치집단을 과도하게 혐오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좋아함(선호)보다 싫어함(혐오)에서 발원하는 것이 팬덤정치다. 그런 점에서 과거 호남의 디제이(DJ) 지지나 노사모 현상을 ‘팬심’ 정치라고는 할 수 있어도 팬덤정치라고는 할 수 없다. 팬덤정치의 첫째 특징은 이것이다.
단순히 싫어한다는 게 끝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혐오하는 정치인이나 정치집단을 다른 사람도 혐오하게 만들고 싶어 한다는 것,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팬덤정치는 단순히 개개인의 정치 성향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 대중정치의 한 유형으로 이해돼야 한다. 이것이 팬덤정치의 둘째 특징이다.
팬덤정치의 셋째 특징은 서로 다른 정당 사이보다 같은 정당 내부에서 혐오가 더 크고 강하게 발원한다는 데 있다. 더불어민주당 팬덤은 국민의힘보다 같은 당의 ‘수박’(비명이나 친문 의원에 대한 혐오 표현)을 더 싫어한다. 국민의힘의 지배 분파인 ‘윤핵관’ 역시 민주당 의원보다 같은 당의 반윤 의원을 더 혐오한다. 그런 점에서 팬덤정치는 같은 부류 내부에서 억지로 차이를 만들어 혐오를 조장하는 것에 또 다른 특징이 있다.
넷째, 팬덤정치가 민주주의에 반하는 정치 현상은 아니다. 정치체제가 민주주의이기에 가능한 것이 팬덤정치다. 군주정이나 귀족정과 달리 민주정은 대중 참여에 기초를 두고, 대중이 참여하고 대중이 동원되는 정치는 한 번도 조용히 운영된 적이 없다. 팬덤정치 역시 민주적 참여의 한 유형이며, 그것의 결과가 민주주의 발전에 긍정적일 수 없다고 볼 수는 있어도 반민주적이라거나 비민주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정치 과정에 참여하려는 목적보다는 그 과정과 결과를 지배하려는 열정이 과도한 것이 문제라 하겠다.
다섯째, 팬덤정치는 다양한 선호에 기반을 둔 ‘다원민주주의’와는 양립하기 어렵다. 혐오는 이견을 억압하는 기능을 한다. 이견과 선호의 다양성은 다원민주주의의 생명 원리다. 팬덤정치는 하나의 옳음을 신봉하고 다른 옳음을 적대한다. 우리는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다름에 시민권을 갖게 해, 현실의 민주주의를 이끌고 있다. 그에 반해 팬덤정치, 팬덤민주주의는 하나의 정당에서만 옳음을 찾는다는 점에서 ‘일당제적 민주주의’에 가까운 심리상태를 키운다. 같은 당 안에서는 오로지 한 사람의 팬덤 리더만 인정한다는 점에서 ‘사인화된 민주주의’를 가져온다.
여섯째, 팬덤정치가 지도자 개인에 대한 맹목적이고 변함없는 지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 전체주의나 포퓰리즘의 특징 가운데 하나였던 ‘영도자주의’나 ‘지도자 숭배’ 현상과는 다른 것이 팬덤정치다. 팬덤의 흐름이 ‘친문 팬덤’에서 ‘친명 팬덤’으로 옮겨가고, 급기야 친문을 ‘수박’으로 보는 ‘반문 팬덤’으로 발전하고, 팬덤의 정체성을 호명하는 방식 역시 ‘문빠’에서 ‘개딸’로 달라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팬덤정치는 특정 개인에게 고정된 현상이 아니다. 팬덤정치는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집단 현상을 특징으로 한다.
일곱째, 팬덤정치는 두 축으로 작동한다. 한 축은 팬덤 리더이고, 다른 축은 팬덤 대중이다. 이 가운데 팬덤정치를 특별하게 하는 것은 팬덤 리더 쪽이 아니라 팬덤 대중 쪽이다. 단임제 대통령제에다 의원 교체율이 높고 ‘비대위’와 ‘혁신위’를 짧은 주기로 반복해온 정당정치의 불안정성 때문에 팬덤 리더의 제도적 지위는 늘 위협받는다. 따라서 야심을 가진 정치가일수록 제도 밖 팬덤 대중에 의존적이다. 팬덤 리더들은 팬덤 대중이 있어야 자기 당을 통제할 수 있는바, 그 점에서 팬덤 리더는 팬덤 대중의 포로인 측면이 있다.
여덟째, 팬덤정치는 일종의 대중적 사회운동에 가깝다. 다만 전통적 유형의 사회운동이 공식 조직을 기반으로 사무실과 대변인, 회원, 회비 등의 체계를 갖고 움직이는 것과 달리, 팬덤 운동은 익명성에 기반을 두고도 돈과 영향력을 동원한다는 점에서 새롭다. 팬덤 운동은 지향하는 이념이나 가치, 정책을 체계화하려 하지도 않는다. 이성과 합리성보다는 냉소적 야유와 욕설, 증오 감정을 집단행동의 동력으로 삼는다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아홉째, 팬덤정치의 대중적 열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팬덤정치를 증폭시키는 감정의 덩어리 안쪽에는 누군가에게서 모두가 혐오할 만한 이유를 찾아내 증오의 대상으로 만들려는 부정적 열정이 있다. 문제는 이런 열정이 정치에만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누군가를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려는 열정은 학교에도 있고 교회에도 있고 회사에도 있다. 권력과 돈의 힘으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할 시민운동과 지식사회, 언론에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공론 형성자가 아니라 편을 나눠 서로를 일러 대는 지식과 정보의 생산자에 가깝다. 참여의 열정을 가진 시민일수록 그런 지식과 정보에 더 의존적이 되는 상황에서, 혐오가 정체성 형성의 동력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열째, 인간 행동의 동기는 실현 가능성의 함수다. 효과성은 없이 정의로운 의도만으로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집단행동은 없다. 팬덤정치 역시 효능감에 의존한다. 그들이 욕설과 비이성적 말과 행동을 수단으로 삼는 것은 그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상대를 두렵게 하는 방법에 익숙하다. 팬덤정치에 참여하는 사람의 다음과 같은 표현은 이를 잘 보여준다. “남자 아이돌 덕질보다 이재명 덕질이 재밌다. (아이돌) 소속사가 잘못할 땐 팩스 총공세를 벌여도 말을 듣지 않지만, 일주일 만에 10만 명 당원 가입하고 문자 총공세 하니 민주당이 벌벌 떤다. 소속사보다 다루기 쉽다.”(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 대중정치의 약점을 누구보다도 정치 팬덤들이 잘 이해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열한째, 팬덤정치는 대통령 중심주의를 강화하고, 의회민주주의나 정당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한다. 모든 열정과 헌신은 ‘누가 대통령이 돼야 하는가’의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된다. 팬덤정치의 에너지는 최고 권력의 향배를 둘러싼 수직적 열정으로 표출된다. 가치, 이념, 정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이민 정책과 감세 정책이 중심이 된 미국의 정치 양극화나, 저학력‧저소득층의 불만에 기초를 둔 트럼피즘과도 다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고통받는 집단들의 두려움을 동원하려는 유럽의 포퓰리즘과도 다르다.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좌파 포퓰리즘과도, 난민 정책에 반대하는 우파 포퓰리즘과도 다르다. 한국의 팬덤정치는 이념이나 정책적 차이보다 ‘좌파 척결’ ‘친일 척결’ ‘적폐 청산’ ‘검찰 개혁’과 같이 비실체적이고 상징적인 권력투쟁 이슈에 이끌린다. 기껏해야 일반 시민과는 무관한 ‘여야 그들만의 권력 싸움'이 팬덤정치의 또 다른 특징이다.
열두째, 팬덤정치로는 혐오하는 민주주의를 가져올 뿐 우리가 바라는 침착한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없다. 한국 정치는 더 달라져야 하고 더 느려져야 한다. 달라서 공격받지 않아야 하고 이견을 이적시하지 않아야 한다. 정치가 속도전이 되면 민주주의는 사회를 보호하기보다는 해체하는 기능을 한다. 속도를 줄여야 다른 가치가 들어올 수 있고, 타자와 공존하고 협력해야 하는 이유도 찾을 수 있다. 당내 이견을 ‘내부 총질’로 보고 생각이 다른 정치인을 깨버려야 할 ‘수박’으로 보면, 인류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 유형의 민주주의, 즉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라는 지옥문을 열게 된다. 그 길을 갈 수는 없다.
열셋째, 팬덤정치는 조급한 민주주의, 속도전 민주주의를 이끈다. 팬덤 정치가나 팬덤 시민은 지지자를 설득하고 포용하는 방식으로 일하지 않는다. 그들은 늘 화나 있고 성마른 특징이 있다. 그 누군가를 자신이 혐오하는 만큼 혐오하지 않는 것조차 견딜 수 없어 화낸다. 그 때문에 동료와 가족, 지인들과도 쉽게 멀어질 수 있는 것이 그들이다. 자신이 나서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기는, 과도한 사명감이나 정의감 때문에 주변을 어둡고 우울하게 만들 때도 많다.
팬덤정치는 불합리한 정치다. 시민을 극단적으로 분열시켜놓고 인간관계를 증오와 혐오로 갈라놓은 뒤 끼리끼리 몰려다니는 어두운 정치다. 서로가 다르게 옳기 위한 정치가 아니라, 자신들만 옳기 위한 정치다. 이런 정치는 정치가 아니라 독단이며, 독단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우리에게 정치가 필요한 것은, 시민 삶의 여러 조건을 보살피고 그들이 지역사회에서 생산과 돌봄, 은퇴 뒤 삶을 계획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다. 우리에게는 그런 정치가 필요하다. 정치는 권력자를 위한 것도 국가를 위한 것도 아니다. 구성원들이 서로 돕고 협동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줄 때 정치의 가치는 빛난다. 시민을 웃게 할 수 없는 정치, 사회를 밝게 만들 수 없는 정치는 더는 정치가 아니다. 정치가 이 세상을 밝고 다정한 곳으로 만들어야 할 소명을 버리면 우리 삶이 위험해진다. 우리에게는 그런 정치가 필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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