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의 <1984>에는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라는 말이 나온다. 역사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순서를 바꾸어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하고,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라는 말로 쓰기를 더 좋아한다. 모든 권력은 지나간 과거사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 해석은 미래 권력을 보장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윤석열 정권 2년째가 된 2023년 현재 대한민국은 조지 오웰의 경구가 딱 어울리는 상황에 놓여 있다.
최근 논란이 된 홍범도 장군 사태에서 드러난 정권의 독립운동사 지우기는 친일 찬양과 맥을 같이한다. 독립운동사 지우기와 친일 찬양을 관통하는 한 단어가 있다. 바로 ‘반공’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말을 빌리자면 ‘반국가 세력’인 ‘공산전체주의’의 뿌리는 독립운동으로 이어지고 거꾸로 친일파는 ‘공산전체주의’에 맞서 싸우는 가치동맹의 선구자이다. 그러니 홍범도 장군 같은 독립전쟁 영웅에게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고 국무총리 이하 정권의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모독하는 짓은 자신들로서는 반공산전체주의를 위한 거룩한 싸움일 것이다.
반공이 대한민국 일부 세력에 생명수 역할을 한 것은 해방정국으로부터 시작된다. 해방 공간에서 친일 청산 열기는 상상 이상으로 뜨거웠다. 친일 청산에 반대한 것은 친일파, 그리고 친일파를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으려 한 이 승만 세력밖에 없었다. 친일파는 자신들의 민족반역 행위를 반공으로 포장했다. 이는 한반도 남쪽에 반공 국가를 세우려 한 미국의 이해관계에도 부합한다. 이때부터 친일파는 ‘친일=반공=애국’이라는 논리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한편 오히려 독립운동가에게는 ‘빨갱이’ 낙인을 찍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친일파는 반공을 내세워 기득권 세력으로 다시 살아났다. 이승만 정권 이래 정치, 사법, 군, 경찰, 문화, 예술, 교육, 학술, 종교,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친일 세력의 헤게모니는 확고했다. 독재 권력은 자신을 지지할 세력이 필요했고 친일파는 기꺼이 독재 권력에 충성을 바침으로써 살아남는 길을 선택했다. 친일파와 독재 권력에 반공은 전가의 보도였다. 그러면서 마치 반공이 국시인 것처럼 여기는 잘못된 풍토가 대한민국에 만연하게 됐다. 이런 풍토에 균열이 생긴 것은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이후의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제헌헌법 이래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헌법에는 ‘반공’의 ‘반’ 자도 들어 있지 않다. 당연히 반공은 국시가 될 수 없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성과로 헌법이 개정된 이후 반공이 다시 대한민국의 비공식 국시가 돼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일부 극우세력이 과거의 향수를 잊지 못한 채 철 지난 냉전 체제 유물인 반공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었다. ‘뉴라이트’라고 자처하는, 전혀 새롭지 않은 극우세력이 바로 그것이다.
뉴라이트가 본격적으로 활개 치기 시작한 것은 2008년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였다. 이명박 정권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건국’ 원년으로 삼자는 뉴라이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 이전만 해도 권력 밖에서 변죽만 올리던 뉴라이트의 주장이 국가 시책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권이 발간한 <건국 60년>이라는 홍보 책자에는 “임시정부는 자국의 영토를 확정하고 국민을 확보한 가운데 국제적 승인을 바탕을 둔 독립 국가를 대표한 것은 아니다. 실효적 지배를 통해 국가를 운영한 적도 없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의 실제 출발은 1948년 8월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보아야 한다. … 대한민국을 건국한 공로는 1948년 8월 정부 수립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공으로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적혀 있다. 독립운동 자리에 건국 운동을 넣어야 한다는 뉴라이트의 주장이 그대로 담겼다. 대한민국은 독립운동과는 무관한 건국 운동의 결과라는 반헌법적 발상이 정권에 의해 공식화됐다.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자고 하는 사람들은 1945년의 광복을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1948년의 정부 수립 곧 친일파가 주도한 건국을 끼워 넣으려 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반공에서 찾으려 했다. 대한민국 정부에 참여하지 않았거나 참여했더라도 반공에 어긋나는 독립운동가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에서 일탈한 존재로 봤다. 아니 아예 독립운동 자체를 부정하려 했다.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마저 테러리스트라고 비아냥거렸다. 거꾸로 건국 이전에 친일했더라도 반공에 이바지했다면 애국자라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권이 건국을 기리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자 반대 여론이 비등했다. 광복회 등 독립운동가 단체들도 반대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이명박 정권은 광복의 역사적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변명을 늘어놓으며 건국절 제정 움직임을 취소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극우세력은 온라인 미디어를 비롯해 다양한 매체를 장악함으로써 향후 본격적인 역사 왜곡을 다시 시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에 이어 등장한 박근혜 정권은 초기부터 강력하게 역사 왜곡 작업을 벌였다. 2013년 일어난 교학사 교과서 사태와 2015년 시작된 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박근혜 정권의 역사 왜곡 시도는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정권이 몰락하는 신호탄이 됐다.
박근혜 정권에서는 뉴라이트가 대거 중용됐다. 대표적으로 유영익 국사편찬위원장, 정종섭 행정안전부 장관,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이인호 한국방송공사 이사장, 박효종 방송통신심의위원장 등을 들 수 있다. 아울러 각 정부 부처가 친일파를 미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대표적인 보기가 국방부의 백선엽 미화이다. 백선엽은 국가기구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중대한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다고 결정한 친일 군인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은 2013년부터 백선엽의 이름을 붙인 ‘백선엽 한미동맹상’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친일파 이름을 딴 기존의 상도 폐지 움직임이 이는 상황에서 백선엽 이름을 붙인 새로운 상을 제정하려 한 것은 박근혜 정권이 친일파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친일과 독립운동을 극우적 사시로 바라보는 정권의 인식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이승만 정권 이래 역대 보수 정권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역사에 손댄 것처럼 윤석열 정권도 역사 왜곡을 밀어붙이고 있다. 윤석열 정권을 가리켜 제2기 이명박 정권이라고 한다. 극우 역사 인식이라는 점에서 윤석열 정권과 이명박 정권은 일맥상통한다. 차이가 있다면 이명박 정권은 그나마 국민 여론이 나빠지면 역사 왜곡에 나섰다가도 중단하거나 변형을 시도한 데 반해, 윤석열 정권은 좌고우면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인다는 정도일 것이다. 역대 어느 보수 정권도 홍범도 장군에게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은 적이 없었다. 적어도 정권 차원에서는 그랬다. 그런데 윤석열 정권은 과감하게 그런 시도를 하고 있다.
2023년 3·1절 기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한다”느니 “변화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미래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불행이 반복되게 될 것은 자명하다”고 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겪은 고통은 자초한 것이며 불법 식민지배와 전쟁범죄 가해자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말이다. 일제가 만들어낸 식민사관의 재현이었다. 3·1운동에 반대하던 이완용 등 친일파의 논리와도 똑같은 것이었다.
일제는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대한제국이 망한 것은 스스로 나라를 지킬 힘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강변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극우세력이 이런 식민사관을 되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쏟아왔다. 그런데 한국의 대통령이 식민사관을 공인했다. 윤석열 대통령에 따르면, 일본은 세계사의 흐름을 읽었기 때문에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다른 나라를 침략해 식민지로 만들었으니 비난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게 된다. 오히려 비난의 대상은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의 무능이 되고 만다. 독립운동도 아무 의미가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좋아하는 가치동맹에 방해되는 것이 바로 독립운동가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는 예고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홍범도 장군 사태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홍범도 장군이 마지막일까? 그렇지 않다. 홍범도 장군 사태는 출발점일 뿐이다. 홍범도 장군에 이어 독립운동가들에게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낙인찍기가 이어질 것이다. 독립운동사를 대한민국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친일 역사를 집어넣는 것이 역사 쿠데타의 마지막이다.
일제강점 이래 우리 민족은 일제 식민지배를 둘러싸고 끊임없는 역사전쟁을 벌여왔다. 그 상대는 애초에 일제와 거기에 영합한 친일파였다. 해방과 더불어 역사전쟁은 끝나야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역사를 부정하고 심지어 그것을 미화하면서 제국주의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일본과 한국의 극우세력, 역사 부정 세력과의 역사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적어도 윤석열 정권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의 역대 정권은 공식적으로는 독립운동가를 상찬하고 일제 식민지배와 친일파에 부정하는 태도를 지켜왔다. 그런데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자 상황이 급변했다. 신친일파가 정권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친일 역사 인식이 정권의 공식 입장이 되기에 이르렀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그러나 잘못된 역사의 전철을 다시 밟을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두 눈을 부릅뜨고 윤석열 정권과 역사 부정 세력의 행태를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 윤석열 정권의 반헌법적 역사 왜곡은 결코 성공해서는 안 될 역사 쿠데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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