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꽃이다. 사상의 뿌리, 경제·사회의 건강한 수액(樹液)이 가지 끝까지 고루 펼쳐진 다음에야 비로소 문화라는 귀한 꽃은 핀다. (…) 문화의 꽃은 무엇보다도 우리 시대가 김홍도 시대에 못지않은 훌륭한 사회를 이룰 때에만 피어난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 그 자체가 아름다워져야 한다.” ―오주석,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맺는 말’
한류는 아시아를 넘어 미국, 유럽으로 확대됐고 세계 한류 팬은 1억 명이 넘었다. 2019년 우리 콘텐츠 수출은 사상 처음 100억달러를 돌파했다. 2020년 상반기 코로나19 대유행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케이(K)-팝 음반 판매량이 42%나 늘었고, 문화예술 저작권 무역수지는 10억달러가 넘는 사상 최초의 최고 흑자를 기록했다. 한류의 인기로 우리 식품, 뷰티 제품 수출도 늘어났다.
2005년 고인이 된 오주석 선생의 책을 다시 펼치며, 한국의 미를 찾는 데 길지 않은 생 전부를 다한 열정에 숙연해진다. 살아 있었다면 ‘김홍도 시대에 못지않은 훌륭한 사회’를 경험했을 것이고, 달라진 한국 문화의 위상에 뿌듯한 마음으로 ‘진경시대’의 부활을 봤을 것이다.
진경시대란 조선왕조 문화의 황금기를 말한다. 조선이 국시로 천명하던 주자성리학을 끝내 조선성리학으로 발전시키면서 이를 기반으로 문화절정기를 이뤘다. 숙종에서 정조에 걸친 125년의 기간이다. 영조 51년의 재위 기간에 절정기를 구가했다. 무엇보다 우리 고유이념을 뿌리내렸던 것이 주요했다. 오래도록 간송미술관을 지키고 계신 최완수 선생의 발굴이며 작명이다.
“율곡은, (…) 만물의 성정이 기의 변화에 따라 결정된다는 이기일원론으로 심화시켜놓는다. (…) 성리학의 발원지인 중국에는 없는 이런 고도의 신학설이 성리학의 발전 결과 조선에서 출현하였으니 이를 조선성리학이라 해야 할 것인데, 이 신사상이 장차 조선 고유이념으로 뿌리내려 그 뿌리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의 꽃을 피워가리라는 사실은 이제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최완수, <진경시대 1> ‘조선왕조의 문화절정기, 진경시대’
우리를 자각하고, 문화적 자존심이 상승하면서 우리 문화 전반에 조선 고유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두주불사 송강 정철이 한글로 시를 짓고, 떡 썰기의 대가를 어머니로 두었던 석봉 한호는 조선 고유 서체인 석봉체를 이룬다. 인조반정은 이상사회를 향한 조선성리학파의 승부수였는데, 조선 찾기가 이후 더욱 맹렬하게 펼쳐졌다. 서포 김만중이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한글로 썼다. 사천 이병연이 우리 산천을 진경시에 담았고, 겸재 정선이 이를 그림으로 완성하며 진경산수를 완성했다. 영조에 이르러 드디어 단원 김홍도, 긍재 김득신, 혜원 신윤복이 등장했다. 이들이 정조까지 진경시대의 꽃을 활짝 피웠다.
K-컬처 역시 저절로 이뤄졌을 리 없다. 일본의 지독한 식민지 문화동화 정책 속에서도 이화중선의 한 많은 목소리가 설움을 달랬다. 피란지 부산의 뒷골목에서 거문고 소리에 이끌린 황병기 선생도 있었다. 기적같이 명맥을 이었다. 해방 이후 물밀듯이 몰려온 서구문화 역시 우리 것으로 담아냈다. 대중문화의 놀라운 분출 속에 신중현 선생이 있었다. 자유를 향한 목마름으로 우리 문화예술은 전진했다. 우리에겐 우리 고유색을 담은 새것이 필요했다. 예술인은 시대와 함께 호흡했고, 대중은 박수를 보냈다. K-컬처의 오늘이 있기까지, 두 거인의 큰 발자국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이어령 선생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당신들은 캔버스 전체를 꽉 채워서 그림을 그립니다 . 그래서 화가의 사인을 그림 위에 하지요 . 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비단 폭에 선 하나 긋고 매화꽃 몇 송이를 그립니다 . 일지매 ( 一枝梅 ) 지요 . 공백이 많아 그 위에 시도 써넣고 낙관도 여러 개 찍습니다 . 나는 옛사람들이 한 대로 한 겁니다 . 초록색 잔디 위에 붓이 아니라 굴렁쇠를 굴리는 아이의 움직임으로 그림을 그렸던 것이지요 .” ― 김민희 묻고 이어령 답하다 , < 이어령 , 80 년 생각> ‘ 채우지 말고 비워라’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의 굴렁쇠 소년은 국내뿐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겼다. 이어령 선생의 굴렁쇠는 그 자체로 훌륭한 기획이었지만, 이를 보고 자란 세대에게 우리 문화가 세계적으로 통한다는 걸 실감하는 절호의 기회였다. 2022년 2월 이어령 선생이 타계하셨을 때,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이어령 선생님은 우리 문화의 발굴자이고, 전통을 현실과 접목하여 새롭게 피워낸 선구자였습니다. (…) 우리가 우리 문화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된 데는 선생님의 공이 컸습니다”라는 애도 메시지를 남겼다.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국민 모두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문화예술에 대한 혜안은 실로 놀랍다. 그는 1966년 7월, 국회 발언에서 “문화인들의 자율”을 강조했다. 일찍부터 ‘국민의 정부’ 핵심 문화정책이 될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입장이 굳건했다. 1995년 1월 <신동아> 기고에선 문화개방과 교류에 대해 자신감을 피력했고, 문화예술의 경제적 측면에도 관심을 갖고 “문화산업의 개발에 힘써야 합니다”라고 썼다. 이는 대통령이 된 뒤, 1998년 10월 ‘98 문화의 날’ ‘21세기 세계 일류 문화국가를 향하여’라는 연설로 구체화한다. 문화예술 지원, 문화·관광 산업 진흥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문화정책이었다. 특히 2005년 9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그가 ‘김대중 컨벤션센터 개관식’에서 한 격려사는 의미심장하다.
“한류의 발전은 오늘의 우리가 이룩한 민주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 우리를 지배하던 중국과 일본이 이제 우리 문화를 수용하게 된 기적과 같은 사실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자신의 희생 속에 국민이 쟁취한 자생적 민주주의라는 데 있습니다 .” ― 김대중 , 2005년 9월6일
‘진경시대’를 연 조선성리학처럼 민주주의는 K-컬처의 든든한 배경이다. 민주주의와 함께 성장한 우리 국민의 수준 높은 문화의식 역시 K-컬처의 강력한 동력이 아닐 수 없다. 2022년 임기 중 마지막 3·1절을 앞두고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특별 주문을 했다. “이번 3·1절에 꼭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성과를 담자. 백범 김구 선생의 한을 풀어드린 기분이다.“ 매우 감격한 마음으로 대통령 집무실을 나왔던 기억이 새롭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 선생도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까마득한 꿈처럼 느껴졌던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해내고 있습니다. (…) 우리 문화예술을 이처럼 발전시킨 힘은 단연코 민주주의입니다. 차별하고 억압하지 않는 민주주의가 문화예술의 창의력과 자유로운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 영국 월간지 <모노클>은 우리의 소프트파워를 독일에 이은 세계 2위에 선정했습니다. 우리 문화예술의 매력이 우리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높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저는 순방외교 때마다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것은 역대 민주정부가 세운 확고한 원칙입니다. 창작과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 안에서 넓어지고 강해집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전진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 문화예술은 끊임없이 세계를 감동시킬 것입니다. 우리에게 큰 자부심을 주고 있는 문화예술인들과 문화예술을 아껴주신 국민께 한없는 경의를 표합니다.” ―문재인, ‘제103주년 3·1절 기념식’ 2022년 3월1일
우리 문화 전통에 대한 자긍심과 민주정부의 문화정책 성과는 오늘 ‘K-컬처의 대한민국 진경시대’를 열고 있다. 방탄소년단(BTS)은 연이어 빌보드 순위 1위를 지키는 최초의 기록을 세웠고, 영화 <기생충>은 칸영화제와 아카데미를 석권했다. 게임·웹툰·애니메이션이 세계의 사랑을 받고, <오징어 게임> 등 우리 드라마가 연속 홈런을 쳤다. 이수지 그림책작가의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수상과 서양 클래식 음악과 발레 같은 분야에서의 격찬도 빼놓을 수 없다. 늦었지만, 2020년 12월엔 예술인 고용보험제도가 시행됐다.
문화예술은 축적된다 . 위대한 작품이 어느 날 난데없이 태어날 수 없다 . 문화예술인들의 피나는 고통이 하루하루 거듭되며 국민 전체의 높은 안목과 만나 세상에 등장한다 . 우리 문화예술이 시대의 아픔과 요구를 외면하지 않았고 , 국민을 위로하며 거친 오솔길을 앞서 걸었던 것은 남다른 자긍이다 .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2018년 제70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서 “때로는 체포와 투옥으로 이어졌던 예술인들의 노력은 4·3이 단지 과거의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의 이야기임을 알려주었다”고 했을 때, 우리 문화예술의 노고는 역사 속으로 녹아들었다.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 김석범의 <까마귀의 죽음>과 <화산도>, 이산하 시인의 <한라산>, 강요배 화백의 <동백꽃 지다>, 조성봉 감독의 다큐멘터리영화 <레드헌트>,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 임흥순 감독의 <비념>, 김동만 감독의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 고 김경률 감독의 <끝나지 않은 세월>, 가수 안치환의 노래 <잠들지 않는 남도>가 대통령의 연설에 담겼다. 망각에서 우리를 일깨워준 문화예술인에 대한 깊은 존경의 마음이었다.
어느 날, 문 대통령의 독서목록에서 발견한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이 돌아서는 발길을 붙잡았다. 한국 정치의 가파른 벼랑에서 붙잡을 것이 생긴 기분이었다.
신동호 시인·전 대통령 연설비서관
*대통령의 독서: 지도자는 진지한 삶과 독서로 탄생합니다. 그의 말과 글에는 마치 수면 아래 빙산처럼 오랜 시간 다져진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이었던 신동호 시인이 역대 대통령들의 독서가 어떻게 말과 글에 반영됐는지 좇아가는 글을 연재합니다. 3주마다 연재.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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