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한트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북한강 강둑을 달렸다. 그냥 달렸고, 잠자리를 좇아 달렸고, 상류를 향해 달렸다. 몸속 세포가 하나하나 깨어나는 듯했고, 마음도 기지개를 켜는 기분이었다. 귓전을 스치는 바람 한 소절에서 우주의 일원이 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달리기는 잊혔다. 이른 등교와 교과서 안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더 효율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에서 뒷전이 됐다. 물론 뇌도 동조했다. 인간이 매일매일 달리며 살아야 했을 때, 몸속 에너지를 아끼도록 익숙해졌던 뇌였다. 되도록 움직이지 말라는 뇌의 명령은 결정적 달리기를 위한 것이었지만, 달리지 않아도 식량은 확보됐다. 달려야 할 까닭이 사라진 세기다. 왜 달려야 하는지 생각해봐야 하는 시대다.
우리는 달리기 위해 설계된 몸을 갖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래 달리도록 진화됐다. 무더위 속에서 10㎞를 달릴 수 있다면 동물의 왕국에서는 치명적이다. 영양은 사람보다 빠르지만 10㎞를 달리면 고체온증으로 쓰러진다. 네안데르탈인은 강한 사냥꾼이었지만 크고 느린 사냥감이 줄고 초원의 빠른 동물로 대체되자 상황이 곤란해졌다. 결국 근육 무게를 늘린 네안데르탈인은 마스토돈을 따라서 점점 줄어드는 숲으로 들어간 뒤 사라졌다. 새로운 세상은 달리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되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대학 학생이던 루이스는 인간이 어떻게 생존을 위한 사고에서 논리, 유머, 추론, 창조적 상상 같은 복잡한 개념으로 도약했는지 알고 싶었다. 동물의 뒤를 쫓은 기술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부시먼들을 찾아갔다. 그들과 생활하면서 루이스는 인류가 달리기를 통해 집단적 상상력을 가졌음을 깨달았다. 언어, 예술, 과학, 우주선,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혈관 내 수술 등 모든 것은 인간의 달리는 능력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달리기는 우리를 인간으로 만든 초능력이었다. 덤으로 42.195㎞에 대한 궁금증도 풀어주었다.
사촌 누나는 전국체육대회 강원도 대표로 창던지기 금메달을 딴 뒤 이내 운동을 접었다. 누나는 스피드스케이트 선수였는데, 또래에 너무나 뛰어난 선수가 있었다. 은메달만 가득한 채로 선수로서의 성공을 뒤로하고 체육교사가 됐다. 운동이 싫다면서도 운동을 떠나지 못했다. 나는 유도를 배우고 싶었다. 누나들의 고된 훈련을 본 아버지의 반대로 도장의 단골 구경꾼으로 남았다. 운동은 공부와 병행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공부냐 운동이냐로 나뉘면서 다시 달리기를 시작하는 데 오랜 각오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일단 달리기를 시작하면 본능적으로 삶을 긍정하고 유용성을 느끼게 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운동을 평생의 동반자로 삼은 이들에게도 아픔이 있다. 일상과 분리된, 고립된 체육관에서 만들어진 슬픈 풍경이다.
KBS 정재용 기자는 집합과 ‘빳다’의 시대에 축구선수를 꿈꿨다. 부상으로 교실에 돌아온 소년은 자신의 자리가 학교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축구화가 세상의 전부였던 소년들의 방황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됐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이며 생각이 커지고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강제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스포츠 기자가 된 그는 한국 스포츠의 혁신가로 성장했다. 스포츠인을 만나 따뜻한 이야기를 나누고, ‘스포츠는 권리다’를 주장하며 학교체육과 생활체육, 엘리트 스포츠를 아우르는 종합적인 대안에 다가갔다. ‘학교체육 진흥법’이라는 제도적 틀을 갖추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독일은 사회체육제도가 가장 발달한 나라다. 1959년 독일 올림픽위원회는 청소년 체육교육에 대한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의 정책을 바탕으로 ‘골든 플랜’을 수립했다. 집에서 10분 거리에 체육관을 지어 주민들이 어디서나 운동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지금 3천만 명의 독일 국민은 9만여 개의 스포츠 시설에서 달리기, 수영, 축구, 배드민턴, 농구 등 운동을 생활화하고 있다. 소질이 발견되면 엘리트 스포츠로 옮겨가고 은퇴 뒤에는 다시 사회체육 지도자가 되는 선순환을 하고 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나 분데스리가 선수 역시 거의 모두 사회체육에서 발굴한 인재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또한 ‘골든 플랜’을 꿈꿨다. 국민이라면 차별 없이 누구나 쉽게 체육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체육환경 조성에 나섰다. ‘주5일 근무제’를 도입함으로써 생활체육과 레저스포츠의 기틀을 마련했고, 주민 친화형 생활체육 시설도 확충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7년 ‘전국체육대회’ 개회식에서 한 장애인 선수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집에서 나오는 것도 힘들었던 이들에게 체육은 사회에 나오는 용기를 주었다”는 것이었다. 2021년 신년사에서는 “메달이 중요한 시대는 지났습니다. 함께 즐기는 시대입니다. 정부는 전문체육인들과 생활체육인들이 스포츠 인권을 보장받으면서 마음껏 스포츠를 즐길 수 있도록 간섭 없이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스포츠 윤리센터’의 출범으로 인권 사각지대이던 체육계의 어두운 면을 보듬었다. 그렇지만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선수 개개인의 인생에 다가간 일이다. 메달리스트로 통칭하지 않은 축전은 한 인격체로서 선수를 생각하게 한다. 가족과 함께 일상에서 선수들은 성장했다. 엘리트 선수가 아니어도 누구나 건강한 땀, 땀이 주는 자존감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의 성취가 우리 모두의 삶에서 비롯됐다는 것, 그로 인해 희망과 용기도 모두의 것이 될 수 있었다.
-문재인, ‘평창동계올림픽 이상호 선수 축전’, 2018년 2월24일
스포츠의 경험은 체력 이상으로 인내심과 공정의 경험을 갖게 하며 상대편, 경쟁자들 사이에서 서로를 바라보게 한다. 축구장에서 공이 아니라 골키퍼를 보는 일은 쉽지 않다. 공장에서 한 노동자를 보고, 정치의 저 아래 고통받는 국민 한 사람을 보고, 화려한 환호 속에서 절치부심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달리기 위해 태어났고, 함께 달리며 인간성을 갖게 됐다. 엄마와 아들이, 할아버지와 손녀가 한바탕 땀을 흘릴 때 우리는 공이 아니라 인간을 보고 서로를 이해하는 힘을 가지게 된다. 그 가운데 엄청난 선수가 탄생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정직한 행운이다.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 손웅정씨는 자신의 축구 인생에서 운동과 삶이 어떻게 어울려야 하는지를 터득했다. 누구나 달리기할 수 있는 사회, 몸속 세포를 깨우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시대는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즐겁게 달리는 일, 아름답게 어시스트하는 일, 넘어진 상대방의 손을 잡아 다정하게 일으켜주는 일, 우리 모두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이다.
-손웅정,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 ‘행복한 자가 진정한 승자’
*대통령의 독서: 지도자는 진지한 삶과 독서로 탄생합니다. 그의 말과 글에는 마치 수면 아래 빙산처럼 오랜 시간 다져진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이었던 신동호 시인이 역대 대통령들의 독서가 어떻게 말과 글에 반영됐는지 좇아가는 글을 연재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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