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중국해를 지나고 있다. 온통 바다와 구름, 바람뿐이다. <모비딕>의 허먼 멜빌이나 <홍합>의 한창훈 형처럼 꿈틀꿈틀 살아 있는 바다를 그려보고 싶은 마음이 늘 간절했으나, 강원도 내륙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에겐 언감생심이다. 뱃사람이 되는 건 애초 꿈꾸지도 못했다. 그래도 상선 한쪽, 작은 침대라도 하나 차지하고픈 소망을 이뤘다. 다윈이나 훔볼트 같은 위대한 동승자가 될 리는 만무하다. 다만 한국 해운의 씩씩한 모습 정도를 마음에 담아낸다면 다행이지 싶다.
부산 북항을 출발한 배는 1800개 넘는 컨테이너를 홍콩, 호찌민, 램차방, 방콕, 샤먼 항구에서 내리고 싣는다. 귀항까지 대략 3주가 넘는 일정이다. 컨테이너에는 온갖 물건이 담겼다. 이동하는 거리·시간과 비례해 가치가 오르고, 세계 곳곳 물건을 나눠 인류의 삶을 동질화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배만 들어오면…”, 그것은 화주들의 희망이다. 안을 들여다볼 수 없지만 항구와 상가, 수많은 사람에게 분명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다.
이제 교역 없이 인류는 살아가기 힘들다. 콜럼버스 이후 세계는 하나의 관계망으로 엮였다. 16세기 무역과 경제교류로 시작된 이 시스템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생태적으로도 묶였다. 고향을 생각할 때마다 큰어머니가 가꾼 옥수수밭을 떠올리지만 우리는 옥수수가 멕시코에서 감자가 안데스산맥에서 왔다는 것을 자주 잊는다. 가족 같은 우리 집 푸들도 외래종의 한 지붕 살림을 보탠다. 우리끼리만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억지스러운 아집이다. 지금의 아련한 추억, 푸근한 고향 모두 세계가 함께 만들어낸 것이다.
필리핀 아이라면 모두 ‘바헤이 쿠보’라는 동요를 잘 안다. ‘바헤이 쿠보’는 이 섬나라의 전통가옥인 야자나무로 만든 단칸방 집을 일컫는다. (…) 노래는 필리핀 밭에 자라고 있는 전형적인 작물들을 열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자카마 그리고 가지, 날개콩, 그리고 땅콩, 깍지콩, 강낭콩, 제비콩, 겨울멜론, 수세미, 동아, 그리고 겨울호박, 그리고 무와 머스터드도 있지요! 양파, 토마토, 마늘, 그리고 생강! 밭을 뻥 둘러서 참깨도 있지요.” 이 노래를 내게 알려준 마닐라의 식물학자는 가사를 번역해주면서 빙그레 웃었다. 이 동요에 등장하는 전통 밭작물 하나하나의 최초 출행지는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혹은 동아시아 등지로 사실상 외계에서 들어온 종들의 총집합이다. (…) 이 노래가 담고 있는 내용은 다문화, 코즈모폴리턴, 철저하게 근현대적인 인공물인 것이다. ―찰스 만, <1493>, ‘불랄라카오에서’1493년으로부터 선박들은 부와 명예, 세균과 죽음, 식물과 곤충을 실어 날랐다. 이를 두고 역사학자 앨프리드 크로스비는 “콜론(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의 가장 큰 의의는 터진 이 판게아의 솔기를 재봉합한 일”이라 말한다. ‘콜럼버스적 대전환’이다.
1570년 5월에는 지금의 필리핀 마닐라 남쪽 민도로섬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될 사건이 일어났다. 스페인과 중국의 만남이다. 그로부터 중국이 원하는 은(銀), 유럽이 원하는 실크와 도자기의 교역량이 천문학적으로 늘었다. 콜럼버스의 꿈, 중국과의 만남을 이룬 것은 스페인 탐험가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와 항해사 안드레스 데 우르다네타였다. 멕시코에서 서쪽으로 향하면서 중국과 항구적 교역을 이룩했고, 글로벌 무역항 건설의 길을 최초로 열었다. 마닐라 구도시의 낡은 청동상으로 시대와 함께 잊힌 이들이 하나의 교역망 안에서 인류 모두를 만나게 한 주인공이다.
밤 11시 선적을 마치고, 배는 지금 홍콩을 떠나 베트남 호찌민으로 간다. 천둥과 폭우가 시야를 가리지만, 바닷새들이 선수를 배회하며 길을 이끈다. 선원들은 6개월, 간혹 1~2년 동안 컨테이너들과 바다에 머문다. 타이 방콕항에서 이발사를 불러 머리를 깎고, 수리남에서 알루미늄 가루를 싣는다. 긴장을 풀 수 없는 일상이다. 때로 육지의 건설현장에 몸담기도 했으나 결국 바다로 돌아왔다.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노인 혼자 출항했을지 모를, 작은 어선의 바닷길을 걱정하며 커다란 상선의 속도를 줄여주는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담긴 교역의 피는 뜨겁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아브 벽화에는 중앙아시아와 교류했던 고구려 사신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길이 멀다 한들 당당하다. 신라인은 중국에 신라방을 세워 당나라와 교역했고, 고려시대 벽란도는 멀리 아라비아 상인까지 오간 국제 무역항이었다. 바다 역시 앞마당이었다. 오늘의 대한민국도 무역으로 이뤘다. 바다 너머를 바라보는,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는 바닷사람들의 공이 컸다. 우리나라 수출입 물동량의 99.7%가 바다를 통해 이뤄진다.
우리에게 해운은 생존이다. 해운은 화물운송에 그치지 않는다. 핵심 원자재와 에너지가 해운으로 수입된다. 제조업, 특히 주요 전략산업과 긴밀히 연결돼 전시에는 해운이 제4군으로 보급을 맡는다. 국가기간산업이다. 이 배의 선장과 항해사, 기관장이 다녀온 바다는 그 자체로 대한민국 경제다. 자신들의 항해 자체로 세계가 하나로 엮였다는 것을 증언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전남 신안군의 섬 하의도에서 태어났다. 노무현, 문재인 두 전직 대통령도 바다와 깊은 인연이 있다. 바다는 인간을 겸허하게 하고 정직하게 한다. 미지를 향한 인간의 꿈도 망막한 수평선이 가져온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청와대 회의실에 걸린, 뒤집힌 세계지도를 기억한다. 대양으로 가는 한반도의 꿈, 교량국가로서의 전망이 참모들 곁에 늘 함께 있었다.
한반도의 지리적 위치는 절묘하다. 북쪽으로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이 있고, 동쪽으로는 태평양, 남쪽으로는 동남아시아와 일본, 오세아니아까지 펼쳐져 있다. 천혜의 교량국가다. 해양과 육상을 잇는 경제적 교역체계에 대해 욕심을 안 내기가 더 어렵다. 김대중 정부가 2000년 경의선 복원 공사를 시작하고, 2001년 ‘세계 5대 해운강국’ 진입을 위한 발전계획을 수립한 것은 바다와 부산, 유럽 사이에 거대한 다리를 놓겠다는 야망과 애국심이었을 것이다.
나라에는 영토가 있지만 무역에는 영토가 없다. 바다로 꿈을 넓힌 나라가 세계를 연결했다. 언제나 세계의 중심 국가가 됐다. 새로운 시대 또한 무역이 만들어갈 것이다. 해운강국으로의 도약은 우리의 미래이며 필수다. 강한 해양력을 바탕으로 우리 바다를 지키고 대양으로 나아갈 수 있을 때 비로소 강한 국가가 될 것이다.
문 전 대통령은 해군사관학교 제73기 임관식에서 “새로운 시대의 해군은 선배들이 가보지 못한 바다, 북극항로를 개척하게 될 것”이라 말했다. 블라디미르 루자노프호는 세계 최초로 다른 쇄빙선 호위 없이 자체 쇄빙 기능만으로 북극항로 운행에 성공한 우리 쇄빙엘엔지(LNG·액화천연가스)선이다. 그 쾌거를 국민과 함께 기뻐했다. 새로운 도전이다. <지리의 힘>이 대통령의 권장도서에 담긴 까닭을 알 것 같다. 우리 또한 미개척지에 힘을 보탤 수 있다고 확신했다.
북극권 사람들은 거친 이웃이 살고 있는 것을 안다. 이는 서로 편을 나눠 다투기 때문이 아니라 지리에서 야기된 도전 때문이다. 북극의 면적은 1409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른다. 이곳은 깜깜해질 수도, 위험해질 수도, 죽음의 지역이 될 수도 있다. 친구 없이는 살아나가기에 어려운 곳이다.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협조가 필요하다. 어획량, 밀수, 테러리즘, 수색과 구조, 환경재앙과 같은 사안에 있어서 특히 그렇다. ―팀 마샬, <지리의 힘>, ‘북극, 21세기 경제 및 외교의 각축장이 되다’<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바다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자연의 일부라 믿기 때문이다. 밤낮으로 꼬박 사흘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고, 상어 떼와도 거침없이 맞붙는다. 노인의 초인적 행동은 어부의 존엄을 갖춘 데서 나온다. 노인은 말한다. “난 될 수 있으면 돈을 빌리지 않고 싶구나. 처음엔 돈을 빌리지, 그러나 나중엔 구걸하게 되는 법이거든.” 도전의 바다와 고난의 바다는 같은 바다다. 도전과 고난을 자신의 힘으로 치러야 한다. 그때 바다는 어머니처럼 우리를 기다리고 품는다.
어느 곳도 멀지 않다. 어떤 일도 불가능하지 않다. 폭풍은 에둘러 가야 하지만, 폭풍에 들어간다면 맞서야 한다. 배는 호찌민을 떠나 램차방으로 가고 있다. 스콜이 한 차례 지나간다. ‘자기 운명의 주인’은 결코 낡은 수사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돌이켜봐야 할,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대통령의 독서: 지도자는 진지한 삶과 독서로 탄생합니다. 그의 말과 글에는 마치 수면 아래 빙산처럼 오랜 시간 다져진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이었던 신동호 시인이 역대 대통령들의 독서가 어떻게 말과 글에 반영됐는지 좇아가는 글을 연재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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