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하고 싶다. 내 딸은 체르노빌 때문에 죽었다 .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침묵하기를 원한다 . 아직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됐다고 , 정보가 충분히 수집되지 않았다고 한다 . 수백 년 더 기다려야 한단다 . 하지만 나의 인생은 그렇게 길지 않다 . 나는 못 기다린다 . 적어두었으면 한다 . 당신들이라도 적어두었으면… . 내 딸의 이름은 카탸였다 . 카튜센카 … . 일곱 살에 사망했다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 <체르노빌의 목소리> ‘망자의 땅 ’
요동, 굉음, 붕괴, 어둠, 비명, 폐허…. 숨이 차다. 절망의 단어들이 동시에 왔다. 먼 곳, 튀르키예의 지진이 허파를 짓누른다. 가혹한 상황이다. 죽음의 숫자가 커질수록 마음이 무뎌진다. 춥고 고립된 공간으로 들어가본다. 시선을 마주할 수 없다. 괴베클리 테페(최초의 신전)의 붕괴 소식도 아찔하다. 이유와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절망적 상황. 피해의 진실로부터 멀어지고 싶다. 애도를 보내보지만, 스스로 몸서리친다. 나는 얼마나 왜소한가.
일본 언론 <엔에이치케이>(NHK)와 <요미우리신문>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올라온 내용을 보도한다 .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했다 .” 튀르키예 정부는 즉시 허위 정보라고 발표했다 .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 . “현지 원자력 당국에 의하면 튀르키예에서 건설 중인 원전은 지금까지 지진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 지금까지 , 일단 안심된다 . 그래도 한편 , 공감 능력 떨어진 이들의 한갓 장난일까 , 의심한다 . 그저 거짓이라 일축할 일은 아닌 듯하다 . 그 배후를 짐작해본다 .
① <세계핵뉴스>는 튀르키예 아쿠유에 조성 중인 원전에 지진 규모 3에 해당하는 흔들림이 감지됐다고 보도했다. 진앙지에서 직선거리로 360㎞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② “오늘날 거의 30개국에서 443기의 원자력발전소가 가동 중이다. 미국 104기, 프랑스 58기, 일본 55기, 러시아 31기, 한국에 21기가 있다. 종말을 앞당기는 데 충분한 개수다. 그중 20%가 지진 위험 지역에 있다.”(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③ 일본 난카이 해구에서 규모 8~9의 대지진이 30년 안에 일어날 확률이 70% 이상이라 한다. 지진에 의한 쓰나미로 최대 32만 명이 숨질 것이라 예상한다. (유언비어는 영어와 일어로 유통되고 있었다.) ④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죽은 나무 아래에서 잠을 자지 않는, 신중한 자세로 위험을 줄인 뉴기니 부족을 관찰했다. “누군가 특정한 죽은 나무 아래에 천막을 설치하기로 결정한 날에 그 나무가 쓰러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긴 안목에서 보면, 그런 편집증은 건설적이다.”(<어제까지의 세계> ‘위험과 대처’)
지진은 천재지변이지만, 원전 사고는 인재다. 누구나 미리 걱정할 수 있다. 과민반응이 아니다. 지진은 신에게 의지해야 납득되지만, 원전 사고는 원인 규명으로 납득할 수 있다. 누구나 사고의 이유를 물을 수 있고 대책 세우기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
그런데 쉽지 않다. 원전은 전문가의 영역이다. 견고한 성을 쌓았다. 분석과 발표는 늘 일방적이며, 동시에 모호하다. “최소한 지금까지 방사선 피폭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과학적으로 확인된 바가 없다”는 식이다. 갑상샘암과 관련한 대답은 아예 매뉴얼화됐다. “갑상샘암 증가는 높아진 방사능과 관련이 없고 철저하고 정교화된 검사가 증가한 탓이다.”(유엔 사전 보고) 코로나19 검사를 많이 해서 미국에 확진자가 많은 것이라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주장이 그랬다. “원전 주변에 살면서 갑상샘암에 걸렸다고 해도 그게 꼭 원전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느냐.”(월성원전 갑상샘암 주민소송 1심 판결)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는 물론이고 월성원전까지 같은 말이 반복된다.
참으로 대단한 방어막이다. 주민들은 탄식한다. “기약이 없어. 우야노, 자리를 여기 앉았으니 핵도 먹고 사는데.”(포항MBC 다큐멘터리 <새어나온 비밀>) 원전 피해자의 증언은 이렇게 담장 안에서 맴돌다가, 어느새 자기 탓으로 바뀐다. “약값이라도 받고 싶다.” 이해하려고 애쓰느니 운명에 순종하게 된 것이다. 이런 ’증언 불가능성‘에 대해서는, 문명 야만성으로서의 홀로코스트와 핵을 비교한 서경식 선생의 탁월한 글이 있다.
“위험한 지역에 그대로 머무르는 사람들은 스스로 위로받기 위해 ‘만들어진 위로의 진실’에 매달리려는 경향이 있다. 현장에서 거리가 떨어진 이들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고 , 거리가 가까운 이들은 ‘고통스러운 진실 ’에서 눈을 돌린다 . (… ) 이런 구조는 진상을 은폐하고 피해를 경시하게 만든다 . 또한 책임을 회피하고 이윤이나 잠재적 군사력 보유를 위해 원전을 유지하려는 사람들 , ‘치명적인 천둥의 방자한 관리인들 ’을 이롭게 할 따름이다 .”
―서경식 , <시의 힘> ‘증언불가능성의 현재’
체르노빌은 노심을 석관으로 봉인한 채 숙제를 지구의 시간에 넘겼다. 후쿠시마에서는 여전히 소량의 방사성 낙진이 뿜어져 나온다. 월성원전에서는 삼중수소 누출이 확인됐다. 그래도 역부족이다. 안전하고, 깨끗하고, 값싸다는 원자력의 주장은 철옹성이다. 그런 상황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이 현실을 말했다. 환경운동가들만의 소수 주장이어야 할 것이, 대통령의 입으로 발표된 것이다.
“지난해 9월 경주 대지진은 우리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 진도 5.8, 1978년 기상청 관측 시작 이후 한반도에서 발생한 가장 강한 지진이었습니다 . ( … ) 이제 대한민국이 더 이상 지진 안전지대가 아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 ( … ) 우리나라는 전세계에서 원전이 가장 밀집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 국토 면적당 원전 설비 용량은 물론이고 단지별 밀집도 , 반경 30㎞ 이내 인구수 모두 세계 1위입니다 . 특히 고리원전은 반경 30㎞ 안에 부산 248만 명 , 울산 103만 명 , 경남 29만 명 등 총 382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습니다 . 월성원전도 130만 명으로 2위에 올라 있습니다 .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당시 주민 대피령이 내려진 30㎞ 안 인구는 17만 명이었습니다 .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무려 22배가 넘는 인구가 밀집되어 있습니다 . 그럴 가능성이 아주 낮지만 혹시라도 원전 사고가 발생한다면 상상할 수 없는 피해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
―문재인 , ‘원자력발전소 고리 1호기 영구 정지 선포식 ’, 2017년 6월19일)
총력전이 벌어졌다. 데이터를 왜곡했다느니, 전기요금이 오를 것이라느니, 탈원전 선언을 끌어내리고, 탈원전 실무에 참여한 공무원들까지 구속했다. 파괴적이다. 멀쩡한 현실을 날조했다 하고, 그렇게 믿을 상황이 오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사회 전체로서도 원자력을 선택했다는 것은 사고의 가능성까지도 선택했다는 것을 충분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시민과학자 다카기 진자부로는 원자력 선택에 국민이 제외됐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원자력은 절대 안전하지 않다. 원전 관계자들은 사고 확률이 1천 년에 한 번이라 주장한다. 아주 낮은 확률로 느껴지지만, 이것은 원자로 1기에 대한 확률이다. 지금 세계에는 400기 넘는 원자로가 있다. 1기당 1천 년이면 곧 2.5년에 한 번, 어디선가 대형 사고가 난다는 말이다. 사고 대책 비용이 빠진 원자력 역시 당연히 싼값이 아니다. 원자력 사고는 반드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정직하게 공동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원자력은 처음부터 군사 이용, 즉 원자탄 개발을 위해 시작됐기 때문에 처음부터 군사적 성격을 띤다.”(다카기 진자부로) “원전이 안전성 면에서나 비용 면에서나 도저히 맞지 않는 사업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졌음에도, 여전히 원전 유지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뿌리 깊이 존재하고 있다. 그 고집스러움의 이유는 원전이 바로 잠재적 군사력이기 때문이다.”(서경식) 우리 생각 이상으로 우리 주변은 핵으로 가득 차 있다. 중국·러시아·미국의 핵무기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우리나라까지 수많은 원전이 있고 지금도 건설 중이다. 북한 역시 생존을 걸고 핵에 몰두한다.
“무기 개발을 내세우지 않고 ‘원자력 연구 ’나 ‘상업 이용 ’을 내세워 비교적 소규모로 원자력 개발을 했던 나라들이 핵무기 보유국들로 되고 있다 . 1960년대 이스라엘 , 70년대 인도 , 80년대 남아프리카 , 90년대 파키스탄 등이 그러하듯이 , 핵무기 보유국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 ( … ) 아시아에서 인도나 파키스탄에 대항해 핵을 보유하는 국가가 더욱 늘지 않을까 우려된다 . 북한 등도 그러한 국가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
―다카기 진자부로 , <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 ‘원자력의 평화 이용이라는 신화 ’
고정관념은 나사와 같아서 시간이 지날수록 깊숙이 파고든다. 원전 사고를 보면서도 원전은 안전하고, 핵억제력이 평화를 가져온다고. 우리는 자신에게 위로되는 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래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는 “극단적 나치들이 집집마다 습격을 감행할 때까지 사람들은 경고의 신호를 받아들이지 않고, 위험을 무시했다”고(<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고정관념들’) 안타까워한다.
우리는 원전의 담 안을 들여다봐야 한다. 고통스럽더라도 피해의 진실에 귀 기울여야 한다. 안전이 과연 우리 손안에 있는지, 핵무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치열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보통 사람들에겐 무리한 일이다. 그러나 위험이 닥친 뒤 후회할 수는 없다. 탈원전은 우리의 안전을 위한 출발이고, 본질적으로 평화로 가는 길이다. 10여 년에 걸쳐 체르노빌 피해자 100여 명을 인터뷰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깨달음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평화적 핵은 집집마다 있는 전구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 그때만 해도 군사적 핵과 평화적 핵이 쌍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 공범자라는 사실을 ….”
신동호 시인·전 대통령 연설비서관*대통령의 독서: 지도자는 진지한 삶과 독서로 탄생합니다. 그의 말과 글에는 마치 수면 아래 빙산처럼 오랜 시간 다져진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이었던 신동호 시인이 역대 대통령들의 독서가 어떻게 말과 글에 반영됐는지 좇아가는 글을 연재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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