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모든 걸 알려줄 수는 없다. 책이 아니고도 지혜를 얻을 방법은 많고, 문맹일지라도 떨어지는 나뭇잎만으로 큰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독서가 한 사람의 삶에서 꼭 필수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자기 확신은 무지에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 오만함이 시원해 보이기도 한다. 책은 끊임없이 읽는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자기 생각을 의심하게 하고, 심지어 다른 책으로 옮겨가도록 유혹하기 십상이어서 책을 많이 읽을수록 함부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물론 논쟁에서 우위를 갖는 것 역시 쉽지 않다.
그렇다고 책이 사라질 것 같진 않다. 움베르토 에코는 책이 수저나 망치나 바퀴, 또는 가위 같은 것, 즉 일단 한번 발명되고 나면 더 나은 것을 발명할 수 없는 그런 물건이라 말한다. 에코와 대담을 나눈 장클로드 카리에르도 영화와 라디오, 텔레비전조차 책에서 아무것도 빼앗지 못했다고 한다.(<책의 우주>, ‘책은 죽지 않는다’)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쓰기와 읽기에 대한 필요성은 더 절실해졌고, 자기 생각을 표현할 일도 더 빈번해졌다. 자신의 효율성을 이미 증명한 책은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가 변할지언정 지금의 그것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출판기념회 몇 곳을 찾았다. 자신의 삶과 포부를 알려야 할 정치 신인들의 자리였다. 담담하게 자기 생각을 적거나, 부지런히 사람들을 찾아가 대담을 나누거나, 전문성을 솔직하게 드러내거나, 저마다의 기획으로 한 권의 책을 완성해내고 있었다. 책은 수고로 가득했고, 정치적 입장이 명징했고, 도전 의지와 약속이 무겁게 담겨 있었다. 넘쳐나는 주장에 약간의 어지러움, 책의 운명에 대한 과민반응은 어쩔 수 없다. 이제 책의 용도가 꼭 독자의 정신을 살찌우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쓰는 과정에서 마음이 커지고, 읽는 과정에서 애정이 더 풍부해지면 됐다고, 조금 외로운 마음으로 생각했다.
필요에 따라 누구든 책을 쓰고 독자에게 내보일 수 있는 것은 발전한 시대임이 분명하다. 랭보처럼 열여섯에 고전 교양의 견고한 성을 쌓거나 하이데거처럼 10년을 도서관에 앉아 신학부터 수학, 철학에 이르러 ‘존재’에 다가갈 필요는 없다. 각자의 삶은 고전이 전하는 지혜보다 역동적이고, 시시각각으로 접하는 소식은 책이 주는 것보다 훨씬 강렬한 체험을 선사한다. 누구든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고, 자기주장이 가능하다. 한 가지, 그럴수록 다른 이들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만은 잊지 말아야 한다. 다른 이들의 생각에 깊이 천착해보고, 다른 생각과 대화를 나누며 자기 생각을 구성해야 자신의 책이 히틀러의 <나의 투쟁>처럼 되지 않을 것이다.
대학 은사 윤재근 선생은 본래 다섯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 선생을 찾아보라는 것이 우리네 학문 습속이라 하셨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적어도 150년 전으로 올라가 선생을 찾아 모시라고 하는 것은 긴 세월이 지나서야 사람 속을 알 수 있는 까닭이다. 선생님이 모신 옛 스승(古師)은 원효, 일연, 박세당, 김만중, 정약용 같은 분들이었다. 가장 한국다운 정신을 세운 분들로, 오래 묵어서 마음을 훤히 내비친다. 이런 옛 스승의 뜻을 탐구의 지표로 삼을 때, 이리저리 표류하지 않고 ‘사대(事大)의 병’에 걸리지 않는다 하셨다. 남의 얘기나 따라 하는 앵무새 짓거리를 하지 말라는 일침이었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더라도 어느 지점에서 동의할 수 있는 전범이나 옛 스승의 말씀이 있으면 언제든 연결이 가능하다.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고, 진정성 있게 자기 생각을 구축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시대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 대부분이 합의한 내용조차 임의로 수정해 비판거리로 삼아버리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앵무새 짓거리가 시대를 분열시키는 주범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좀 낯선, 러시아의 언어학자 니콜라이 트루베츠코이는 유럽화가 그렇게 ‘민족 구성원들의 협동을 방해한다’고 한 세기 전에 남겼다.
―니콜라이 트루베츠코이, <유럽과 인류>, ‘유럽 문화에 편입되는 것은 선인가? 악인가?’
트루베츠코이는 유럽화가 불가피하다고 여겼다. 다만 유럽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유럽 문화가 우월하다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자기 민족의 문화를 지키면서 유럽 문화의 요소를 지혜롭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유럽과 인류>는 세계의 역사가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해왔으며 각 민족의 독창성과 고유성이 유지돼야 한다는 주장의 이론적 기반이 됐다. 이후 유라시아주의의 토대를 구축해 레프 구밀료프의 신유라시아주의로 이어졌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8년 6월, 러시아 하원 두마 연설에서 우리와 러시아 간의 유라시아 협력을 제안하며 “러시아가 구원받을 수 있다면 유라시아주의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라고 한 레프 구밀료프의 말을 인용했다. 유라시아는 광활한 사막, 스텝, 툰드라, 삼림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상호협력이 필수적이고 형제애가 발휘됐던 곳이다. 유라시아주의는 러시아가 애초에 여러 민족으로 구성됐다고 본다. 더 나은 문화도, 더 못한 문화도 없다는 명제가 구현돼야 할 곳이다. 문 전 대통령은 그러한 기초적 지식을 통해 ‘그런 유라시아 정신으로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러시아 국민과 하원의 뜨거운 호응에도 불구하고, “서구(西歐)의 입장에선 도발적 언사다”라고 한 일부의 비판이 매우 억지스러웠다.
사대에 길들여진 정신은 충고와 아부를 구분하지 못한다. “중국이 법과 덕을 앞세우고 널리 포용하는 것은 중국을 대국답게 하는 기초입니다”(중국 베이징대학 강의)라는 문 대통령의 표현에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로 인한 관광 중지같이 좀스러운 일을 하지 말라는 호통이 담겼는데, 이를 부각하기 위해 쓴 ‘작은 나라’에만 집착해서 난리였다. “러시아의 저력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두마 연설)라는 문장의 행간에는 러시아의 역할과 성찰을 권유하고 있었지만, 자기들만 알아듣지 못했다. 스스로 개척하고 상황을 바꿔낼 자신이 없으니, 손 놓고 괜히 중국과 러시아를 적으로 돌려놓는다. 제 살 깎아먹는 일인 줄도 모르고 케이(K)-방역, K-팝, K-경제 등 K가 붙은 우리의 독창적인 성과를 업신여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고전으로 역사와 만나면서 우리 자신의 힘을 믿었고, 석학들의 책을 읽으면서 미래를 항상 준비했다. 그래서 산업화의 출발에는 뒤늦었지만 세계가 모두 정보기술(IT)이라는 출발점에 섰을 때, 동시에 출발할 수 있었다. 자신감 넘친 일본문화 개방과 함께 한류도 시작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다양한 독서로 국민을 만났고, 성숙한 국민의 역량을 믿었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 당당하게 외쳤고, 과감한 개혁은 국민의 수준과 국격에 맞게 진행됐다.
독서는 행위 자체로 소통이고 즐거움이기에 책 읽는 대통령들은 버지니아 울프의 바람처럼 왕관이나 월계관 같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수습보다는 예방을 우선하고, 권위보다 자발성을 중요시 하기에 그 성과조차 모르고 지나가거나 한참 지나서야 드러난다. 독서는 윤리의식을 키웠다. 지나친 자기점검은 물론 부정한 곳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미래를 예측하는 시야도 밝아졌다. 그 때문에 인기 없는 정책을 시도하고 당장의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지만, 그분들을 기억하면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대한민국이 좋아진다.
저 위에서 한 인간의 영혼을 들여다보듯 서로에 대한 판단이 거침없는 시대다. 한 사람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만나서 대화하고, 거기서 자신 스스로도 열어봐야 한다. 과거의 사람이라면 결국 책으로 만나 대화해야 한다. 책이 모든 걸 알려줄 수는 없더라도 역지사지의 태도에 익숙하게 하고 우리를 합의점으로는 데려다줄 듯하다. 다시 책 읽는 대통령을 기다리며, ‘대통령의 독서’ 연재를 마친다. 그동안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신동호 시인·전 대통령 연설비서관*문재인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이었던 신동호 시인이 역대 대통령들의 독서가 어떻게 말과 글에 반영됐는지 좇아가는 글을 스무 차례 연재했습니다. 수고해주신 신동호 시인과 독자분께 감사합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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