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누 파르타넨, <우리는 미래에 조금 먼저 도착했습니다〉,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지 물어라’
임기 5년 동안, 문재인 전 대통령이 연설문에 가장 빈번하게 담은 문구는 ‘함께 잘사는 나라’다. 이 문구는 포용국가를 설명하거나 시정연설에서 국회의원을 설득할 때 사용됐고, 아세안 10개 나라를 방문할 때 협력을 강조하거나 한반도 평화와 경제통일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로도 작용했다. 임기 후반 팬데믹(코로나19 대유행)과 탄소중립 연설에서는 지구적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론으로 ‘함께’에 더 큰 방점을 찍었다.
이 문구는 지극히 평범해서 별로 가슴을 울리지 못한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말 같아서 듣고도 훅 지나가버린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잘사는 나라’를 넘어 ‘함께 잘사는 나라’를 향해가고 있습니다”(2019년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와 같이 ‘잘사는 나라’와 만나 대비를 이뤘을 때는 느낌이 달라진다. 대한민국 성장과 복지의 서사에 불을 지피고, 불현듯 생기를 얻는다. ‘함께 잘사는 나라’는 이어달리기의 한 주자로서 앞선 지도자들의 노력을 계승한 대통령 문재인의 결과물이다. 포용국가 비전에 그 정신이 잘 담겨 있다.
―문재인, ‘포용국가 사회정책 대국민 보고’, 2019년 2월19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일찍부터 ‘생산적 복지’라는 말을 가슴에 품었다. 복지가 자선이 아니라 인권이라는 확고한 철학이 있었다.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철저한 시장경제 원칙을 강조하며 ‘신자유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한편에서는 시장경제의 부작용을 시정하고 보완하기 위해 과감한 복지정책을 준비했다. 과다한 복지가 가져온 유럽의 실패를 공부했고 국가경제에도 국민 스스로에게도 도움이 되는 우리만의 ‘생산적 복지’를 구상했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불확실성의 시대>가 깊은 영향을 주었으리라. 김 전 대통령이 가족에게도 꼭 읽어보라고 추천한 책이다.
우리는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알고 있지만, 무기력과 금전상의 이해와 감정 또는 무지 때문에 그것을 말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문제는 현재의 부 또는 적어도 잠재적인 부의 재분배 외에는 해결 방법이 없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이 해결책을 공약으로 내거는 결단력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을 뿐이다. (…) 부유한 나라에서도 빈곤의 문제에 대처하는 데에는 마찬가지 어려움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득을 주는 이상으로 효과적인 해결책은 없는 것이다. 식량, 주택, 의료 서비스, 교육 또는 현금, 어떠한 형태를 취하든 간에 소득은 빈곤에 대한 최선의 구제책이다. 그러나 이처럼 명백한 진리이면서도 이만큼 교묘한 핑계를 낳게 한 예는 없다.―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불확실성의 시대>, ‘민주주의·지도력·결단’
“지도자는 그 시대의 불안에 맞설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갤브레이스는 말한다. 김대중은 결단한다. 2000년 10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실시됐다. 복지가 국민의 권리이며 국가의 의무임을 법률로 규정했고, 법정 용어도 ‘보호대상’에서 ‘수급권자’로 바꿨다. 1997년 37만 명이던 수급자는 2002년 155만 명으로 늘었다. 최소한 돈이 없어 굶거나 공부를 못하는 것만은 막아냈고, 이들이 이웃과 국가 발전에 함께할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했다. 물론 반대도 있었다. 사회주의적 접근 방식이라느니, 시기상조라는 의견이었다. 다행히 공동체가 급속도로 해체되는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은 무엇이 이뤄져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2000년 7월에는 145개 의료보험조합을 하나로 묶어 새로운 건강보험 체제를 출발시켰다. 모든 국민에게 동등한 의료혜택이 돌아가게 됐지만, 미숙한 면도 있었다. 의료 이용량, 노인 의료비 급증, 고가 약 처방을 예측하지 못하면서 엄청난 재정적자가 전망됐다. 국민의정부 시절 6명의 보건복지부 장관이 재직할 정도로 복지정책은 파란만장했고 실수도 많았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가 우리를 버리지 않고 걱정해주고 있다는 것을 느끼도록 해줘야 합니다”라는 김 전 대통령의 말은 지금 이 순간까지 긴 여운을 남긴다.
우리가 세계경제 체제 안에서 발전하고 제도를 빌려와 민주주의를 꽃피웠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 가꿔온 경제와 복지 체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조론>을 쓴 조지훈 선생의 생가 ‘호은종택’은 1629년 인조 7년에 지어졌는데, 지금도 굳건하다. 청렴하고 강직하게, 부정한 방법으로는 돈을 벌지 않겠다는 후손을 남겼다. 전북 남원에 가면 죽산 박씨들의 고택인 몽심재가 유명하다. 이 500년 고택은 오가는 손님들을 후하게 대하며 항상 나보다 못한 사람을 생각했다. 원불교 성직자 40여 명을 배출한 기반이다. 대구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인흥마을 남평 문씨 집안은 ‘인수문고’라는 특별한 문고를 가졌는데, 경술국치를 당해 일제에 등을 돌리는 방법으로 인수문고의 기반이 된 만권당을 세웠다. 돈이 아닌 지혜를 물려줬다. 모두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에 담긴 뿌듯한 전통이다. 단연 경주 최 부잣집이야말로 현대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한국식 복지제도를 구상할 자격을 우리에게 충분히 제공해준다.
―조용헌,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경주 최 부잣집’
노무현 전 대통령은 복지정책을 성장전략의 하나로 삼았다. ‘한국적 복지국가의 길’이 더 많은 개인의 성장과 참여를 통한 성장동력의 확충, 이를 위한 사회복지의 선진화에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소설 같은 전망’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2020년에 복지재정을 2001년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으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020년 3만6천달러, 2030년 4만9천달러에 이른다는 목표를 세웠다. 복지는 사회투자로서 우리가 놓칠 수 없는 국가발전 전략이었다. 장기적 계획이었다. 어느 정도는 이뤘고, 이룰 수 있는 능력도 있다.
아누 파르타넨에 따르면 노르딕(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등 북유럽) 나라들에서는 상향 사회이동이 생생한 현실이라고 한다. 당연히 아주 잘사는 사람들은 조금 더 세금을 내라는 요청을 받고 대신에 좋은 의료체계와 좋은 학교를 갖춘다. 시민들 역시 그런 사회환경을 지지한다. 명백히 공평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전장에 바친 목숨과 논밭을 일군 주름진 손, 공장의 잔업과 철야가 쌓여 우리는 이만큼 잘살게 되었습니다. 누구 한 사람 예외 없이 존경받아야 할 것입니다”(전태일 열사 추모 메시지)라고 말했다. 우리가 일군 성장의 크기만큼 차별과 격차를 줄이지 못해 아쉬워하며 ‘함께 잘사는 나라’를 밀고 나갔다. 대한민국의 역동성에 기본생활이 받쳐준다면 공평한 상생도약이 불가능하지 않다.
고령화와 의료비 증가는 불가분의 관계다. 실제 한 해 의료비가 40조원이 넘는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건강보험 재정 악화의 원인을 ‘문재인 케어’로 인한 과잉진료로 지목한다. 의료 이용량에 따라 본인부담률을 90%까지 높이고, 소득수준에 따라 연간 본인부담금이 최대 100만원 정도를 넘으면 나머지는 건강보험에서 부담해주는 본인부담 상한제를 축소하거나 사실상 폐지하겠다고 한다. 진단이 잘못됐으니, 결과가 잘 나올 리 없다. 우리 가운데 많은 이가 다시 의료비에 허덕이게 될 것이다.
불확실한 시대의 불안에 맞서지 않고 불안을 조장한다. 장기적 전망은커녕 하루 앞도 보지 못한다. 엉뚱한 데 재정을 쓴다. 차별과 격차를 키운다. ‘교묘한 핑계’를 그만 듣고 싶다. ‘함께 잘사는 나라’를 거듭 쓰며 품었던 ‘아름답고도 통쾌한 풍경’을 되찾고 싶다.
신동호 시인·전 대통령 연설비서관
*대통령의 독서: 지도자는 진지한 삶과 독서로 탄생합니다. 그의 말과 글에는 마치 수면 아래 빙산처럼 오랜 시간 다져진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이었던 신동호 시인이 역대 대통령들의 독서가 어떻게 말과 글에 반영됐는지 좇아가는 글을 연재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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