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영의 질문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 및 공공기관장들은 최근 “김일성주의자” “종북주사파” “총살감” 등 극단적 언사를 계속하고 있다. 우익 단체들은 독재 시대의 색깔론을 다시 꺼내어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적으로 몰고 있다. 이러한 극단주의 이데올로기와 행동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파괴하는가? 극단주의는 실제로 얼마나 위험한가?(제1435호)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2016년 겨울 이후 수년 동안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서는 ‘태극기부대’라고 불리는 대규모 군중이 주말마다 집회했다. 모든 참가자의 손에, 옷에, 배낭에 태극기가 있었고 적잖은 사람이 군복이나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었다. 트럭의 대형 스피커에서는 군가와 찬송가, 노래 <아름다운 강산>이 귀를 찌르는 고음으로 흘러나왔다.
이런 집회에서는 ‘좌파’ ‘종북’ ‘빨갱이’를 ‘처단’ ‘척결’하고 심지어 ‘총살’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는 섬뜩한 말이 포스터와 손팻말, 그리고 참여자들의 ‘자유발언’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다. 더구나 우리는 인터넷 포털이나 언론보도의 댓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이처럼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증오하며 절멸시키고 싶어 하는 말과 주장을 빈번히 접한다.
‘극우’는 이렇게 대한민국의 일상이 돼 있다. 이들 행동의 극단성 때문에 이상하고 예외적인 사람처럼 보이지만 최근 연구에 의하면 우익 집회 참여자의 연령, 학력, 직업, 소득수준은 다양하다. 그런데 이들이 ‘종북좌파 척결’ ‘자유대한 수호’ ‘동성애는 악마’를 외친다. 이처럼 평범한 시민들의 극단주의, 또는 극단주의 시민들의 편재성이 진정으로 무서운 것이다.
더구나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면서 극우의 정치환경에 질적 변화가 생겼다. 정부·여당과 공공기관의 대표자가 반대자를 ‘종북주사파’ ‘김일성주의자’ ‘총살감’ 같은 이념적 낙인과 극단적 언어로 공격하는 행동을 공공연히 하는 가운데, 사회의 극우 세력은 사실상 정부의 공식적 인정하에 활개 칠 수 있게 됐다. 현 상황의 잠재적 위험을 엄중하게 봐야 한다.
20세기 전반기의 파시즘이나 나치즘 세력은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와 다원주의를 부정하고 전복하려 했다. 1970~1980년대까지도 극우는 인종주의, 전체주의, 독재와 폭력을 대놓고 찬양했다. 하지만 21세기 극우는 민주주의, 선거, 다당제와 공존하며 애국과 자유, 복지국가를 표방한다. ‘극우’ ‘과격우파’ ‘우익포퓰리즘’의 경계선이 흐려지면서 이들의 대중성과 득표율도 높아진다.
이런 최근 변화에 따라 극우 세력, 담론, 이데올로기의 확산은 점진적, 장기적, 비가시적 특성을 갖게 됐다. 유럽의회 의장을 한 마르틴 슐츠가 경고했듯이 지금 ‘극우’의 진정한 위험성은 우리 사회에서 ‘허용되지 않는 것’의 한계가 조금씩 허물어지고 ‘상상할 수 없던 것’이 점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터부(금기)의 부식 과정에 있다. ‘반인륜적 일베’가 ‘보통 일베’로 되는 것이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2000년대 이후 보수 정당 내에 극우 성향이 확대되고 극우 정당들이 중심부로 진입하는 과정이 진행됐다. 그들은 자유와 민주주의, 복지국가와 법치를 존중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런 가운데 ‘흑인’ ‘아시아인’ ‘외국인’ ‘난민’ ‘동성애자’ ‘이슬람’ 등 특정 범주를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고 대중적 불안과 증오를 자양분으로 조직을 확대하고 표를 얻는다.
오스트리아 자유당, 프랑스 국민전선, 벨기에의 플랑드르이익당, 네덜란드 자유당, 스웨덴 민주주의자, 독일 대안당과 ‘서양의 이슬람화를 반대하는 애국 유럽인’ 등과 같이 2000년대 이후 성장한 극우 정당과 대중운동 단체들은 반인륜적 극단주의와 정상적인 의견표명 사이의 모호한 회색지대에서 움직이며 정치와 사회를 우경화했다.
극언과 폭력을 일삼는 행동주의자는 종종 사회 중심부 기득권 세력의 위선적 묵인, 암시적 지지, 또는 비밀스러운 교류에서 힘을 얻는다. 즉, 정치·사회적 중심부와 주변부 극우는 연결돼 있다. 양쪽의 연결 형태는 다양하다. 중심부 극우가 주변부 극우를 지원하기도 하고, 주변부 극우가 중심부로 확대되기도 하며, 중심부부터 극우화돼 주변부를 활성화하기도 한다.
국가별로도 다양하다. 유럽에선 중심부 보수 정당들이 극우 세력과 거리를 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거기에 불만을 가진 유권자를 발판으로 신생 극우 정당들이 부상하곤 했다. 그와 달리 양당제 대통령제인 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라는 우익 포퓰리스트가 기존 정당정치의 제도적 규칙과 관행을 파괴하면서 사회 내 극우주의를 동원하고 증폭해 그 에너지를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한국의 특징은 주류 보수 정당이 태생적으로 극우 성향을 내포했고 그 유산이 지속돼왔다는 점이다. 개신교나 반공단체를 기반으로 극우 정당이 종종 설립됐음에도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보수’를 내건 거대 정당이 극우 성향 유권자의 욕구를 채워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국에선 ‘보수’와 ‘극우’의 경계가 모호한데, 그것은 ‘보수’ 정권의 극우화 잠재성이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극우주의의 힘은 국제환경과 지정학적 긴장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20세기 전반기의 유럽에서 파시즘과 나치즘의 부상은 러시아혁명이 촉발한 공포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오늘날에도 유럽·미국의 극우는 이민자나 난민 이슈를 증폭해 지지층을 확대하는데, 이 역시 ‘외부’ 요소가 들어와서 ‘내부’를 위협한다는 프레임으로 불안과 분노를 동원하는 것이다. 일본 극우조직인 ‘재특회’나 ‘일본회의’도 동북아 패권 경쟁과 갈등 구조를 중요한 배경으로 한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한국에서 극우 세력과 이데올로기의 지속적인 힘을 설명하는 결정적 요인은 냉전체제의 유산, 분단체제 지속, 동북아 질서 불안정성이다. 이 지역의 군사·외교적 긴장이 고조돼 국가 간 충돌이 개연성 있는 시나리오로 동원될 수 있다면 각국의 국내에서 다양성과 자유 대신 질서와 규율, 이념적 통일성을 강조하는 극우적 주장이 강화될 수 있다.
특히 한국은 분단체제 구조에서 정부가 수립된 만큼 반북·반공 우익의 뿌리가 깊고 그 유산이 지금도 강하게 유지되고 있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 햇볕정책에 대한 보수의 비판에서도, 노무현 정부의 사립학교법 개정 시도에 대한 개신교 쪽 반발에도, 문재인 정부의 공공의대 설립 계획에 대한 의사단체들의 파업 때도 ‘공산주의’ ‘종북좌파’라는 극단적인 이념 색채가 강렬히 분출됐다.
극우의 의제와 이데올로기, 주체, 조직은 시대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면서 역동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서구의 극우는 냉전 시기에 반공·반소(反蘇)·반좌파·반노조 투쟁을 핵심으로 했으나 1990년대부터는 이주자·난민·동성애·이슬람·다문화 등이 가장 점화성이 큰 이슈가 됐고, 이에 상응하는 이데올로기와 극우 정당들의 정치전략이 발달했다.
한국에서도 2000년대 이후 이주노동자, 동성애, 페미니스트 등에 대한 혐오 행동과 담론이 크게 퍼졌다. 새로운 극우주의는 전통적인 반북·반좌파·반노동 이데올로기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접합되고 확장된다. 페미니스트와 계급론자의 ‘교차성의 정치’는 좀처럼 진전되지 않는 데 반해 우익은 올드라이트와 뉴라이트의 다양한 흐름이 긴밀히 연대해왔다.
이러한 연대 네트워크와 프레임 접합에서 가장 중심적 역할을 하는 것이 개신교 우파다. 국내의 미국 선교사들과 미국 본토 우파 세력의 영향으로 한국 개신교는 원래 보수 성향이 강했지만, 특히 노무현 정부 시기에 극우 성향과 정치적 행동주의가 강해졌다. 개신교 우파는 조직, 재정, 신자, 자체 언론과 학교, 정치권과의 연계 등 여러 면에서 강력한 자원을 갖고 있다.
극단주의는 단순히 좌우 스펙트럼의 가장자리에 있는 비정상적 소수를 의미하지 않는다. 인권·자유·존엄·평등·평화 같은 현대의 근본가치가 모든 인간에게 동등하게 보장돼야 한다는 보편주의를 수용하지 않는 모든 자가 극단주의자다. 그런 극단주의가 우리 사회에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다수의 분명한 의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신진욱의 질문 이태원 참사를 전후해 윤석열 정부가 보여주는 행태를 두고 ‘책임지지 않으려는 정부’의 전형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공론장에서는 ‘왜 그날 그 시각에 이태원에 갔느냐’며 희생자를 탓하거나, 희생된 개인이나 정부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 ‘공동체의 책임’이란 논리도 횡행한다. 왜 우리는 이 미증유의 사회재난 앞에서 ‘개인’도 ‘모두’도 아닌 ‘정부’의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제1440호로 이어집니다.)
*신진욱X이세영의 정치크로스: 정치사회학자인 신진욱과 정치부 기자 출신인 이세영이 한국 정치에 대해 서로 묻고 답하는 형식의 정치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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