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17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공연장. 영등포 주민 30여 명이 모여 ‘지역정당’을 표방하는 ‘직접행동영등포당’을 창당했다. 이 당은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 정의당 같은 전국정당이 아니다. 당의 구성원인 주민들이 그 지역 문제에만 집중하는, 말 그대로 지역정당이다.
지역정당은 최근 영등포 말고도 경기도 과천(2021년 12월 ‘과천시민정치당’), 서울 은평구(2022년 1월 ‘은평민들레당’)에서 연이어 창당됐다. 당원은 각각 30여 명이다. 불발되긴 했지만 경남 진주에서도 지역정당 창당 움직임이 있었다. 6·1 지방선거를 앞두고 다시 일고 있는 흐름이다. 앞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었다. 지역정당을 표방한 ‘마포파티’(2014년 서울 마포구)는 해산했고, ‘진주같이’(2013년 경남 진주)와 ‘과천시민정치 다함’(2017년 경기도 과천)처럼 정당 창당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지역에서 활동한 작은 규모의 정치단체도 존재했다. 이들의 목표는 국가권력이 아닌, 제대로 된 주민자치의 실현이다.
지역정당의 관심은 주로 지역 현안이다. 당명에 ‘민들레’를 넣은 은평민들레당은 환경문제가 주된 관심사다. 나영 은평민들레당 대표는 “은평구의 중심 하천이라 할 불광천에 보여주기식 설치물과 조형물이 계속 들어서며 난개발되고 있는데, 우리 당에서 주민 편의를 중심에 둬 생태하천으로 복원하는 방안을 제시하려 한다”고 말했다.
과천시민정치당은 최근 과천 내에 조성된 주거단지인 지식정보타운에 중학교를 신설하는 문제에 관심을 쏟고 있다. 정상천 과천시민정치당 운영위원은 “교육 당국은 인구수 추이를 볼 때 신설이 필요 없다고 하는데, 이 문제를 풀 협의체를 만드는 방안을 제안하려 한다”고 말했다.
직접행동영등포당은 영등포구 문래동의 공공공지가 제2세종문화회관 부지가 되면서 주민들에게 해마다 분양해온 텃밭이 사라진 문제에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용희 직접행동영등포당 대표는 “영등포구는 안 그래도 주민친화 녹지가 부족하다. 구에서 운영하는 주말농장 텃밭은 엉뚱하게도 인천 계양구에 있다. 거대 양당 후보들은 이 문제에 관심이 없고, 녹지와 생태공간을 원하는 주민들은 투표할 정당이 없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지역 내 각종 마을공동체의 네트워크 구실을 하는 ‘영등포마을넷’ 활동을 해왔다. 예전에 진보신당, 노동당의 당원이기도 했던 그는 “(다른 정당 활동 때는) 중앙 의제의 지역 전파에만 치중하다보니 주민들과 동화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면서 “직접행동영등포당의 당원들은 ‘지역 사안에 온전히 집중했으면 좋겠다’고 한다”고 전했다.
이들처럼 지역문제에 천착하는 ‘지역정당’(Local Party)은 대선이나 총선이 아닌 지방선거에만 후보를 낸다. 해당 지역 주민이 당원으로 참여해 오롯이 지역문제에 활동을 집중한다. 자치와 분권이라는 시대적 흐름에도 맞는다. 지역정당은 한국에서는 생소하나 다른 나라에선 흔하다. 미국의 알래스카 독립당, 캘리포니아 국민당, 뉴욕 자유당을 비롯해 영국의 스코틀랜드 국민당, 독일의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CSU·기사련), 일본의 도쿄 도민퍼스트회 등이 대표적이다. 스코틀랜드 국민당이나 도쿄 도민퍼스트회는 해당 지역에서 전국정당보다 의석이 많다. 독일 바이에른 기사련은 선거 때 전국정당인 기독교민주연합(CDU·기민련)과 후보 단일화 같은 연계활동을 한다. ‘다수 정당의 난립’을 이유로 지역정당을 제도적으로 막아온 한국에서는 생경한 일이다.
한국의정연구회가 <의정논총>에 실은 논문 ‘지역정당 활성화를 위한 제도개선 방안’(2018)을 보면, 대부분 국가는 기본적으로 정당 설립과 활동이 자유롭다. 정당 설립 요건을 법으로 정한 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한국과 독일뿐이다. 그나마 독일은 정당이 아닌 정치결사체의 선거 참여를 허용한다. 선거를 앞두고 지역 내 무소속 후보들이 선거연합도 한다. 지역정당 설립이 불가능한 나라는 주요국 가운데 사실상 한국밖에 없다.
경남 진주 정당도 서울에 중앙당?이용희 대표는 직접행동영등포당 창당 직후인 2021년 11월 정당법에서 ‘지역정당을 허용해달라’는 취지의 헌법소원을 냈다. 헌법이 “정당의 설립은 자유”(제8조 1항)로 규정함에도 관련 법에서 정당 설립을 까다롭게 해놨기 때문이다. 현행 정당법은 “정당은 수도에 소재하는 중앙당과 특별시·광역시·도에 각각 소재하는 시·도당으로 구성한다”고 한 뒤 “5곳 이상의 시·도당”(제17조)과 “1천 명 이상의 당원을 가져야 한다”(제18조)고 요건을 달았다.
은평, 영등포, 과천 같은 기초지방자치단체를 활동 범위로 하는 지역정당은 애초 만들어질 수 없는 구조다. 경남 진주의 지역정당도 엉뚱하게 서울에 중앙당을 둬야 한다. 지역 주민이 당을 만든다 하더라도 정당법상 정당으로 등록이 불가능해 출마, 선거운동, 당원 모집, 정책설명회, 집회도 당연히 하지 못한다. 이 대표도 6·1 지방선거를 앞두고 영등포구선거관리위원회에 구의원 예비후보로 등록하려 했지만 거절당했다. 직접행동영등포당의 정책을 알리려 내건 펼침막도 바로 철거당했다.
한국에서 지역정당이 불가능해진 건 과거 군사정부 시절부터다. 1950년대까진 따로 정당을 등록하는 제도 자체가 없었다. 그러다 박정희 정권이 쿠데타 이후인 1962년 정당법을 만들어 규제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국회의원 선거구 총수 3분의 1 이상의 지구당을 두고, 서울과 부산을 포함해 5개 이상의 도에 지구당을 분산하며, 지구당마다 100명 이상의 당원이 있어야 했다. ‘다수의 정당이 난립해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했다’는 이유였다.
이후 지구당 수 요건은 전체 지역구의 2분의 1(1969년 개정)로 강화됐다가 유신체제 몰락 뒤 4분의 1(1980년)로, 다시 5분의 1(1989년), 10분의 1(1993년)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완화됐다. 당원 수 요건 역시 30명(1980년)으로 줄었으나, 2004년 ‘돈 먹는 하마’인 지구당이 폐지되면서 현행 ‘5개 이상의 시·도당’과 ‘수도에 둔 중앙당’, ‘각 시·도당별로 1천 명 이상의 당원’으로 바뀐 채 유지되고 있다. 서울에 중앙당을 둔 전국정당만을 인정하는 이 정당법 때문에 우리 사회는 아직 ‘지역정당’을 경험하지 못했다.
지역정당이 필요한 이유는 특히 한국의 지역정치가 중앙에 종속돼 있기 때문이다. 지역의회 의원들은 사실상 공천권을 쥔 정당 지역위원장(당협위원장)의 입만 바라본다. 수십 년째 반복된 행태다. 최근 서울 여의도동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선 서울의 한 지역에서 구청장 후보로 나오려던 이가 국회의원인 당 지역위원장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여는 일이 있었다. 그는 “대선 때 열심히 하면 공천하겠다더니, 경선도 없이 단수공천을 해 나를 떨어뜨렸다. 약속을 어겼다”고 주장했다.
나영 은평민들레당 대표는 “탈락한 이 예비후보자는 지역위원장의 공언이 지켜졌는지를 묻는데, 비판 지점이 완전히 잘못됐다. 민주당에 지방자치 정신이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문제는 국민의힘도 마찬가지다. 서류와 면접만으로 후보를 정하거나 후보 검증위원회에 참여한 외부 인사가 지역위원장 의견에 좌우되는 일이 많다. 지역 당원에 의한 직접민주주의가 느슨하게 작동하면서 사실상 지역위원장이 공천권을 쥐고 후보를 정하는 셈이다. 이런 정당에서 개별 지역문제에 착근하길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직접행동영등포당이 낸 헌법소원 사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아직 결론을 내지 않았다. 앞서 2019년 녹색당도 정당법의 ‘중앙당을 수도에 둬야 한다’는 규정 등을 문제 삼아 헌법소원을 냈지만 역시 결정이 나지 않았다.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소장 유성진 이화여대 교수)는 2022년 4월21일 헌재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자치분권 강화가 중요한 시대적 과제임을 고려할 때, 헌재는 지역정치의 활성화와 주민참여의 고도화를 위해 지역정당을 설립할 수 있도록 (정당법에) 위헌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윤현식 ‘지역정당네트워크’ 연구위원(헌법학 박사)은 “과거엔 지역정당에 대한 사회적 이해가 부족했고 (다수의 정당 난립을 막아) 의회의 권한을 존중한다는 취지가 있었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지방자치의 역사도 한 세대를 지나며 누적됐고, 다원화된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중앙정치에 매몰된 전국정당만으로 감당하기 힘들다. 당사자가 직접 참여하는 풀뿌리 민주주의 활성화를 위해 헌재도 전향적 판단을 내려야 할 때다”라고 말했다.
아직은 미약한 흐름이지만 연이은 지역정당 설립은 스페인 포데모스(Podemos·‘우리는 할 수 있다’는 뜻) 같은 돌풍이 한국에서도 일어나길 기대하게 한다. 포데모스는 2014년 결성돼 2016년 선거에서 스페인 제3당으로 급부상하며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다. 좌파 성향의 30대 젊은 지식인이 중심이 된 정당이다. 이들은 국회에선 나라 전체 정책을 다루는 전국정당이지만, 사실은 스페인 전역의 지역정당 간 연합체다.
한국에서도 ‘포데모스’가 가능할까포데모스의 급부상은 스페인 시민들의 직접민주주의 열망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포데모스의 근간에는 지역정당이 있었다. 스페인 제2도시인 바르셀로나의 아다 콜라우 시장은 포데모스 연합에 속한 대표적 지역정당인 ‘바르셀로나 코먼스’의 리더다. 그는 빈민 주거권 문제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바르셀로나 코먼스를 창당해, 2015년 시장에 당선된 뒤 2019년 재선됐다. 재선 때 바르셀로나 코먼스는 지역 현안과 관련한 구체적인 공약을 5천 개 이상 제시했다.
양준호 인천대 교수(경제학)는 “(5천 개 이상의 공약은) 바르셀로나 코먼스와 포데모스 연합에 속한 활동가들이 바르셀로나 시민들과 함께 기획한 일로, 다른 지역 시장 후보들 공약과의 일치율이 1%도 되지 않았다. 철저한 지역주의가 이들의 힘”이라고 설명했다. 양 교수는 “바르셀로나의 지방선거에서는 우리와 같이 ‘정권 심판’이나 ‘윤심’ ‘반이재명’ 같은 것이 의제가 되지 않는다. 지역의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만을 생각하는 사람만 출마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지역정당의 정식 활동이 가능해지면, 포데모스 같은 지역정당 간 연합이 나타나는 모습도 기대해볼 수 있다. 포데모스가 강조하는 ‘철저한 직접민주주의에 기반한 실질적 주민자치’는 한국 사회에선 아직 구호 수준에 그친다. 시민의 정치결사 자유를 제한하는 제도는 바뀌어야 한다. 정치가 우리 삶에 제대로 복무하게 하는 열쇠가 지역정당이 될 수도 있으니.
글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사진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계엄의 밤, 사라진 이장우 대전시장의 11시간…“집사람과 밤새워”
[단독] 윤석열, 4·10 총선 전 국방장관·국정원장에 “조만간 계엄”
[단독] 노상원 ‘사조직’이 정보사 장악…부대 책임자 출입도 막아
“안귀령의 강철 같은 빛”…BBC가 꼽은 ‘올해의 이 순간’
[단독] 비상계엄 전날, 군 정보 분야 현역·OB 장성 만찬…문상호도 참석
‘28시간 경찰 차벽’ 뚫은 트랙터 시위, 시민 1만명 마중 나왔다
롯데리아 내란 모의…세계가 알게 됐다
공조본, 윤석열 개인폰 통화내역 확보…‘내란의 밤’ 선명해지나
28시간 만에 시민들이 뚫었다...트랙터 시위대, 한남동 관저로 [영상]
‘내란의 밤’ 4시간 전…그들은 휴가까지 내서 판교에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