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신진욱의 질문 대선 레이스가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파국의 도래를 경고하는 공포 동원 정치가 펼쳐지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은 보수야당에 의한 대통령 탄핵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위성정당 창당을 정당화했다. 국민의힘은 민주당 재집권이 독재와 전체주의로 갈 거라고 말한다. 왜 선거 때마다 이런 양상이 반복되는가.(제1401호)
“그자는 지금 어떤 힘에 붙들려 있습니다. 그러나 제때가 되면 나타날 것입니다. (…) 그 악한 자를 붙들고 있는 자가 없어지면, 그때는 그 악한 자가 완연히 나타날 것입니다.”(사도 바울,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두 번째 서신’ 중에서)
다시, 종말론의 시간이다. ‘5년 주기 내전’인 대한민국 대선에서 레이스의 종반부를 지배하는 건 대체로 세상의 끝, 말세의 언어들이다. 이번 대선도 예외는 아니어서, 여야의 힘센 후보들은 어김없이 경쟁 상대의 승리가 만들어낼 재앙적 미래상을 열거하며 흩어진 지지자를 불러모으는 데 열심이다. 임박한 종말의 풍문이 신흥종교 열성 신도들을 가산 헌납과 세속과의 관계 단절이란 극단 행동으로 이끄는 것처럼, 정치적 대파국에 대한 두려움 앞에선 오랜 경험과 학습으로 다듬어진 시민의 정치 이성도 속절없이 무장해제된다. 이제껏 경험 못한 막장 세계가 펼쳐질 수 있다는데 점잔 빼고 눈치 보고 망설일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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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검찰과 결탁한 적폐세력의 무자비한 보복으로부터 문재인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 더불어민주당 정치인들이 외친다. “이 나라를 사회주의국가로 만들려는 정신 나간 소수에게 미래를 맡겨서야 되겠나.”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말이다.
여야의 유력 후보 진영에서 매일같이 쏟아내는 저 날 선 언어들은 하나같이 각자의 현실에서 묘사 가능한 최악의 재난 상태를 가리킨다. 차이가 있다면 리버럴 여당이 상상하는 파국이 ‘문재인’이라는 정치적 인격의 총체적 수난으로 그려지는 것과 달리, 보수 야당이 이야기하는 재난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라는 정상 상태의 종언으로 선언된다는 정도다. 한편에 윤석열 세력의 집권이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는 무뢰배의 반혁명’을 뜻한다면, 다른 편에 이재명의 당선은 ‘상식과 인륜을 압살하는 좌파 지옥’의 도래를 고지하는 파멸적 사건인 것이다.
세계의 대파멸을 예고하는 종말론은 인류사와 함께해온 유서 깊은 신앙담론이다. 종말신앙을 가장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유대교의 이단 분파로 출발한 기독교다. 오랜 유랑과 노예 생활을 통해 종족 멸실의 위기를 체험한 유대인은 그들이 겪는 고난의 끝을 메시아의 도래와 일치시키는 고유의 세계관을 완성했다. ‘메시아주의’로 불리는 유대교의 종말사상은 불행과 고난으로 점철된 현 체제의 질서가 무너진 뒤 심판의 시간과 함께 올 새 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 열망이 담겨 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세계사의 종말’이자 ‘영원한 삶’(구원)의 시작점에 위치시킴으로써 유대교 메시아주의를 ‘역사적 종말론’으로 확장했다. 이로써 역사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는 관념이 강화되고, 역사적 사건들의 배경에는 구원을 향한 신의 계획(섭리)이 작동하며, 역사는 영원한 것도 순환하는 것도 아닌, 종말과 구원이라는 궁극의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직선적이고 유한한 과정으로 재해석됐다.
이런 기독교의 종말사상은 현대 사상과 정치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주된다. 세계사를 ‘물질적 풍요’와 ‘자유의 실현’이란 목적지를 향한 점진적 발전 과정으로 파악했던 20세기 근대화론은 말할 것도 없고, 현실에 미만한 불의·억압과의 투쟁을 통해 고통의 역사로부터 해방을 추구하는 급진주의 정치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종말은 이제 파멸이나 몰락이 아닌 결핍과 폭력, 참상으로 얼룩진 현행 질서와의 급진적 단절(해방)이란 의미로 세속화된다.
행복의 이미지 대신 파국의 이미지로그러나 세속화된 종말사상에 해방적·유토피아적 판본만 있는 게 아니다. 반동적이고 억압적인 판본 역시 존재한다. 여기서 종말은 일차적으로, ‘해방과 구원의 유토피아’가 실현되기 전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폭력과 무질서의 혼돈 상태’로 사유된다. 이런 사고는 기독교 종말사상에 내재한 ‘적그리스도’(Anti-Christ·거짓 그리스도) 관념에서 기원한다. 사도 바울의 서신을 비롯한 성서의 몇몇 문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앞서 그를 참칭하는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나 사람들을 미혹하며 악을 행하다가 마침내 재림한 진짜 그리스도에 의해 파멸을 맞게 된다고 예언한다. 이때 바울은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억누르는 힘’도 함께 언급하는데, 예수가 약속한 종말이 지연되는 것은 세계에 혼돈과 무질서를 가져올 적그리스도의 등장을 누군가 필사적으로 막고 있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그가 바로 ‘카테콘’(Katechon·억제하는 자)이다. 중세 신학은 이를 ‘가톨릭 교회’와 ‘기독교 세속 국가’로 해석했고, 훗날 ‘나치의 계관 법학자’ 카를 슈미트는 제1차 세계대전이 서구 문명에 드리운 종말의 공포 속에서, 적그리스도와 카테콘에 대한 중세적 해석을 ‘독재’를 정당화하는 반혁명의 정치신학으로 발전시켰다.
선거 때마다 종말론적 정치담론이 횡행하는 건 정치 자체에 내장된 속성 때문이기도 하다. 정치권력의 향배가 선거에서 드러난 유권자의 지지 정도에 의존하는 한, 권력을 쥐려는 개인이나 세력은 유권자에게 핵심적인 두 가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하나가 그들이 현실에 구현하리라 약속하는 ‘행복’(구원)의 이미지다. 그것은 현실의 결손 상태를 바로잡을 정책공약 형태로 제시된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반복될 수 없고 대체 불가능한 대안’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번에 안 되면 다음 기회가 있다’거나 ‘반드시 A가 아니어도 B 정도면 괜찮다’가 아니라, ‘이번에 A를 당선시키지 못하면 영영 기회가 없다’는 강박적 위기의식을 지지자에게 심어줘야 한다는 뜻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한국의 선거정치에서 ‘행복의 이미지’로 승부하는 경우를 찾기 쉽지 않아졌다는 것이다. 여와 야, 리버럴과 보수를 망라해 통용되는 승리 공식은 ‘파국의 이미지’로 지지자를 결집하는 것이다. 이런 공식이 통용되기 시작한 건 오래되지 않았다. 야당은 항상 집권세력의 부패나 무능을 부각하며 ‘정권심판’을 구호로 들고나왔다. 여당의 대응은 ‘심판자’를 자처하는 세력도 그들과 다름없는 무능한 세력임을 드러내거나, 가시적 국정 성과를 앞세워 ‘재신임’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계기로 이런 구도는 자취를 감췄다. ‘심판=보복’이란 등식이 만들어지면서 정권의 상실은 권력의 자연스러운 교대가 아닌 ‘반동과 멸절의 시간’을 도래시킬 재앙적 사건으로 재감각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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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된 정치 양극화 역시 경쟁 세력의 집권을 종말과 동일시하는 파국론적 분위기를 강화했다. 양극화된 정치질서에서 자기 세력의 정당성에 대한 강한 확신은 상대 세력의 악마화와 병행된다. ‘우리가 공동체의 운명을 계속해서 책임져야 마땅하다’는 신념은, 상대방의 열등함과 사악함에 대한 집단적 확신이 전제돼야 하기 때문이다. 열등하고 악한 존재들의 권력 장악은 거대한 파국, 종말을 의미할 뿐이다.
한국에서 종말론적 정치담론의 주류는 이제 슈미트류의 반동적 버전이다. ‘적들의 영구적이고 최종적인 승리’가 가져올 종말의 지옥도를 앞세워 진영의 단단한 결집을 도모하는 것이 한국 정치의 필수 테크놀로지가 됐다. 이 반동적 종말론의 선포자들에게, 적그리스도를 파멸시킬 메시아의 출현은 ‘기다리되 오지 말아야 할 사건’이며, 적은 ‘맞서 싸워야 하지만 결코 사라져선 안 될 존재들’이다. 구원의 실현과 적의 소멸은 이들에게 ‘정치의 종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 작품 속 세비야의 대심문관이 1500년 만에 강림한 그리스도를 반기기는커녕, 투옥하고 협박하다 서둘러 추방하려 했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내일이면 당신도 그 온순한 양떼를 보게 될 것이오. 내가 손 한 번만 들어 보여도 앞다퉈 달려나와 당신을 불태울 장작 더미에 시뻘건 탄 덩어리를 던져넣을 테니까. 이건 순전히 우리를 방해하러 온 당신 책임이오.”(<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에서)
제20대 대선 막바지에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후보가 채택한 선거 전략은 ‘4자 구도’를 유지하며 2017년 대선 당시의 ‘문재인 득표율(41%) 플러스알파’를 확보하는 데 맞춰진 것 같다. ‘촛불동맹’이란 이름의 ‘반기득권 포퓰리스트 연합’을 복원하기엔 시간적 여유가 없을뿐더러, ‘조국 사태’로 촉발된 연합세력 내부의 불신과 감정의 골이 감당 못할 수준으로 깊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상황에서 상대의 집권을 저지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문재인이라는 ‘지도자의 이름’을 중심으로 전통적 세력 기반을 다지고, 대적 상대인 윤석열과 국민의힘에 ‘민주주의 세력을 참칭’하며 ‘촛불이 일궈낸 진짜 민주주의를 끝장낼’ 퇴행과 반동의 이미지를 고착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재명의 민주당’에는 나라를 보복과 무질서의 재난 상태로 몰아갈 ‘거짓 구원자’ 세력의 등장을 억제해야 할 숭고한 사명이 주어진다. 그러는 사이 최종적 구원은 끝없이 유예되고, 종말의 공포에 의지하는 카테콘의 세속 지배는 질긴 생명을 이어가게 된다.(윤석열 후보와 국민의힘의 저열한 극우 종말론은 그 수준의 일천함 때문에 언급할 가치조차 못 느낀다.)
이쯤에서 우린 물어야 한다. 매일의 삶이 파국이고 비상사태인 이들에게 5년짜리 청와대 권력의 향배는 얼마큼의 실존적 무게를 지니는가. 대선 때마다 어김없이 종말론의 시간이 도래하는 건, 권력을 따라 오고 가는 이익에 삶의 모든 것을 걸어버린 이들의 뒤틀리고 마비된 감각체계 탓은 아닌가. 이번 대선을 “촛불혁명의 지속이냐 좌절이냐가 걸린 건곤일척의 대회전”이라며 모든 양심과 역량의 결집을 호소하는 진보학계의 노명망가에게도 물어야 한다. ‘민주화의 성과물을 지켜야 한다’는 당위, ‘역사의 후퇴를 막아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다른 세상’을 꿈꾸는 소수파에게 ‘불만과 인내의 시간’을 요구하는 ‘현상유지적 종말론’을 어느 시점까지 감내해야 하는가.
언제까지 감내해야 하는가“억눌린 자들의 전통이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교훈은, 우리들이 오늘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비상사태’라는 것이 예외가 아니라 상례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인식에 상응하는 역사의 개념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발터 베냐민, <역사철학테제> 중에서)
*이세영의 질문 이번 대선에서 양대 정당의 후보자와 지지층은 경쟁 정당에 대해 극한의 불신과 적대감을 드러냈다. 지금 한국의 정치양극화는 어느 정도이며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가? 정치에서 분노와 증오란 무엇이며, 사랑과 관용이란 대체 무엇인가?
*신진욱X이세영의 정치크로스: 정치사회학자인 신진욱과 정치부 기자 출신인 이세영이 한국 정치에 대해 서로 묻고 답하는 형식의 정치칼럼입니다. 제 1404호로 이어집니다.
이세영 <한겨레> 논설위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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