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영의 질문 2022년 대선의 쟁점 가운데 하나는 포퓰리즘이다. 흔히 ‘대중영합주의’라는 말로 번역되는 부정적 의미의 포퓰리즘이다. 하지만 포퓰리즘에 긍정적 차원은 없는 것인가? 세계 도처에서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 대중의 지지와 환호를 얻는 현상은 그들이 민중의 집합적 열망이나 시대적 요구에 응답하기 때문은 아닌가?(제1396호)
이재명은 포퓰리스트일까? 아니면 윤석열이 포퓰리스트일까? 대답은 끝에 가서 보자. 아무튼 분명한 건 두 사람이 요즘 ‘포퓰리즘’ 소리를 가장 많이 듣는 한국인일 뿐 아니라, 상대방을 ‘포퓰리스트’로 보증해준다는 사실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제시한 임플란트와 탈모약 건강보험 적용 공약, 연 120만원 ‘장년수당’ 공약, 기본소득 정책 등이 그 반대자한테서 ‘포퓰리즘’이라는 비난을 샀다.
그런 공세의 선두에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있지만, 포퓰리즘으로 비난받는 건 윤 후보도 마찬가지다. 윤 후보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의 하향 조정을 주장하자 이 후보는 ‘무지한 망국적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했다. ‘주적은 북한’ ‘선제타격’ 등 대북 강경 메시지는 ‘안보 포퓰리즘’으로, ‘이대남’을 호명하는 안티페미니즘 정치는 ‘우익 포퓰리즘’으로 규정했다. 포퓰리즘은 한국 정치에서 중요한 전투용어가 되고 있다.
이런 비난을 받는 정치행위의 특성은 무엇일까? 세 가지 공통 요소가 있는 것 같다. 첫째는 ‘다수’에 대한 호소력이다. 다수 여론에 영합하거나, 다수 여론을 이끌고 갈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서민주의’다. 아무 다수가 아니라 ‘보통사람’ ‘평범하게 사는 사람’의 다수와 접속한다. 셋째, 그러나 실제로는 불합리하고 비현실적이다. 종합하면, 포퓰리즘이라는 비난의 핵심은 다수 서민에게 호소하는 무책임한 정치라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사람 다수’의 여론에 따라 포퓰리즘으로 비난받는 대상도 달라진다. 다수가 페미니스트면 안티페미니즘이 포퓰리즘 정치가 될 수는 없다. 다수가 복지에 반대하면 복지정책이 포퓰리즘으로 공격받진 않는다. 그 대신 ‘다수에 반하는 정치’로 비난받을 것이다. 이렇게 오늘날 정치행위자들은 상대방이 다수의 지지를 받는다고 보이면 포퓰리즘으로 비난하고, 다수가 내 편에 있다고 생각하면 상대방이 다수에 거역한다고 비난한다.
이것이 중요한 포인트다. 상대방이 주도하면 대중 영합 포퓰리즘이고, 내가 주도하면 다수를 위한 좋은 정책이다. 윤석열 후보는 문재인 정부의 복지정책을 ‘현금 살포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했지만 윤 후보도 코로나19 손실보상을 위해 50조원을 투입하겠다고 했다. 이재명 후보는 윤 후보의 탄소중립 속도조절론을 포퓰리즘이라 하고선, 본인의 탈원전 속도조절론은 국민여론을 보자 했다. 우리는 이 양면성의 원천을 잘 봐야 한다.
대중추수주의를 비난하는 것이나 국민여론을 칭송하는 것이나 그 근원은, ‘다수의 보통사람’이 갖는 실제적인 정치적 힘이다. 그 힘이 상대방에게 있으면 폄훼하고, 나에게 있으면 찬미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선동을 비난하는 정치담론으로서 포퓰리즘과, 대중성을 지향하는 정치행위로서 포퓰리즘은 동일한 시대의 두 얼굴이다. 다수의 보통사람을 대변하고, 결집하고, 지지하는 정치가 힘을 갖는 현대라는 시대의 두 풍경인 것이다.
한국에서 포퓰리즘 공방의 출발도 ‘다수 여론’의 중요성 증대와 관련이 있다. 2010년 <한겨레> 지면에서 이어진 ‘포퓰리즘 논쟁’에 참여한 적이 있다. 이 칼럼을 함께 연재하고 있는 이세영 기자가 당시 ‘포퓰리즘 다시 보기’를 제안하는 기사를 썼는데 그 후 신진욱, 안병진, 최한수, 진태원, 조희연 등 여러 학자가 포퓰리즘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제시했다.
2010년 보편복지·무상급식 논쟁에서 급부상2010년에 뭔가 특별한 게 있었을까? 1920년부터 2020년까지 100년 동안 국내 언론에 ‘포퓰리즘’이 언급된 빈도를 분석해봤더니 민주화 직후인 1989년 처음으로 한국 정치에 대한 논평에 이 단어가 등장했다. 그 후 2010년은 역사상 최초로 포퓰리즘 담론이 폭증한 해였다.
이 시점에 포퓰리즘 공방이 일어난 직접적 계기는 복지 이슈였다. 2009~2010년 ‘보편복지’와 ‘무상급식’ 정책을 놓고 격론이 일어났고, 2011년에는 민주당이 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보육, ‘반값등록금’ 정책을 포함하는 ‘3무1반’ 정책을 표방했다. 일련의 복지정치는 독재 시절보다 훨씬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았고, 복지정치를 아직 거부하던 당시 집권당 한나라당은 이들을 포퓰리즘이라고 맹비난했다.
그러나 보수 정치 역시 변하고 있었다. 반값등록금 정책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에서 처음 나왔고, 이명박 후보의 모토는 ‘국민성공시대’였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복지·경제민주화’와 ‘반값등록금 완성’을 내걸었다. 말하자면 여야 할 것 없이 ‘다수 국민’의 필요와 요구에 호응하는 정치를 표방했다. 이것은 분명 민주화의 결과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일부로서, 민주주의를 혁신하기도 위협하기도 한다.
이처럼 포퓰리즘이라는 정치적 수사의 증가는 실제 정치에서 ‘피플’의 중요성 증대와 관련된다. 정치가 피플에 호소하기 때문에 정적(政敵)의 포퓰리즘에 대한 비난도 많아진다. 그래서 포퓰리즘은 피플에 호소하는 특정 정치현상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카스 무데는 반엘리트주의, 반제도주의, 서민주의, 리더와 대중의 직접 소통 등을 포퓰리즘 정치의 핵심 특성으로 본다.
이런 의미의 포퓰리즘 정치는 오늘날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고, 그에 따라 학계를 비롯한 사회 각계에서 지대한 관심을 받고 있다. 포퓰리즘에 관한 토론은 1960년대부터 있었고 1980년대에도 중요한 논쟁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포퓰리즘 얘기가 무성해진 것은 최근 일이다. 이는 점점 더 많은 시민이 정기적인 투표권 행사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정치행동에 참여하며 제도정치와 상호작용하는 과정과 관련 있다.
2010년대에 세계에서 전개된 대규모 대중행동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그 정치적, 이념적 성격이 매우 다양했다. 미국 티파티 운동과 월가 점령 운동, 북아프리카의 ‘아랍의 봄’, 대만의 해바라기 운동, 홍콩 우산혁명, 스페인의 좌파 포데모스당과 우파 시우다다노스당, 프랑스 국민전선, 영국 독립당, 최근 미국의 트럼프주의 운동 등은 모두 ‘피플 파워’를 주창했는데 그들이 말한 피플도, 그들이 꿈꾼 세상도 제각기 달랐다.
포퓰리즘 현상이 이렇게 이질적인 것처럼, 포퓰리즘에 대한 평가도 상이하다. 예를 들어 좌파 정치이론가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나 샹탈 무페는 포퓰리즘에서 자유민주주의의 한계에 도전하는 정치의 가능성을 본다. 그에 반해 루디거 돈부시와 서배스천 에드워즈, 제프리 색스 같은 경제학자들은 남미 좌파 정권의 정책을 무책임한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했다. 최근엔 유럽이나 미국에서 우익 대중운동과 정치세력의 결합을 포퓰리즘으로 불러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다.
그럼 좋은 포퓰리즘과 나쁜 포퓰리즘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우파는 ‘포퓰리즘’을 긍정적 의미로 사용할 때가 거의 없지만, 일부 좌파는 우파 포퓰리즘을 배척하면서 ‘좌파 포퓰리즘’이라는 지향점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혁명적 좌파 포퓰리즘과 반동적 우파 포퓰리즘이 반엘리트주의, 반제도주의의 위험을 공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좌파와 우파라는 정치적 지향 차이만으로 포퓰리즘을 평가하긴 어렵다.
다른 한편 권위주의적 포퓰리즘과 참여적 포퓰리즘으로 나누기도 한다.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은 위로부터 동원된 포퓰리즘인데, 무엇보다 스튜어트 홀이 대처리즘 이데올로기를 이론화하면서 널리 알려진 개념이다. 참여적 포퓰리즘은 다수 민중의 참여에 토대한 정치를 긍정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대중의 참여 자체가 좋은 포퓰리즘을 보장하진 않는다. 트럼프주의 운동도, 많은 극우 대중운동도 ‘참여적’이다.
‘좋은 포퓰리즘’을 정의하려는 많은 시도에서 난점의 원천은 피플의 근원적 모호성이다. 마거릿 캐노번이 강조했듯이, 포퓰리즘의 핵심어인 피플은 지극히 복합적이고 갈등적이다. 이재명의 기본소득은 보통사람을 위한 것이기에 올바른 것일까? 그 반대론자들도 각자 방식으로 보통사람을 위한다. ‘이대남’ 다수가 페미니즘에 반대하면 윤석열의 안티페미니즘은 정당한 것일까? 그러나 이대남 다수는 성차별주의자도, 가부장주의자도 아니다. 윤 후보는 이대남을 대변한 게 아니라 그들의 ‘어떤’ 측면을 증폭한 것이다.
논쟁을 탈쟁론화하는 이데올로기‘피플’ ‘국민’ ‘시민’ 같은 추상 개념을 하나의 의지를 가진 거대 주체로 실체화하는 순간, 그것은 논쟁적인 것을 탈쟁론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된다. 피플의 의지와 불만과 요구는 단지 정치적으로 대변되기만 하면 되는 상태로 주어진 게 아니다. 피플의 정체성은 그것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가치와 실천, 권력관계의 산물이며, ‘국민의 뜻’ ‘다수 여론’ ‘공동선’의 정의는 영구한 논변과 협상의 대상이 된다.
윤석열과 이재명, 누가 포퓰리스트인가? 그 대답 안에 포퓰리즘의 이 모든 혼돈이 다 들어 있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신진욱의 질문 포퓰리즘이란 말은 종종 비난의 뜻으로 사용되지만, 포플리즘으로 불리는 정치현상 중에는 현존하는 민주주의의 한계에 도전하는 힘이 내장됐을 때도 있다. 우리는 포퓰리즘의 어떤 긍정적 측면을 주목해야 할까? 어떻게 그 잠재성을 더 풍부하게 만들고 정치를 바꾸는 힘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무엇을 할 것인가? 이세영 <한겨레> 논설위원의 견해가 궁금하다.
*신진욱X이세영의 정치크로스: 정치사회학자인 신진욱과 정치부 기자 출신인 이세영이 한국 정치에 대해 서로 묻고 답하는 형식의 정치칼럼입니다. 제1399호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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