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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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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효능감이냐 전쟁의 흥분이냐

정치 효능감을 맛보게 하지 못하면서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무력감과 타인 혐오
등록 2021-10-28 15:14 수정 2021-10-29 00:28
대선후보끼리, 정당과 정당 간, ‘정치’가 아니라 ‘전쟁’을 한다. 홍준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 공동취재사진

대선후보끼리, 정당과 정당 간, ‘정치’가 아니라 ‘전쟁’을 한다. 홍준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 공동취재사진

“이 정도면 내전이라고 봐야 해.” 정치에 관심 가진 친구들이 혀를 내두르며 종종 하는 말이다. 정당과 정당 사이에서도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전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정당 안을 들여다보면 정당 속 정파 간에도 전쟁하다시피 한다. 지지자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팬데믹 상황에서 몸을 밀치는 건 장난으로 보일 정도로 아수라장이 되곤 한다. 대통령선거 국면이라 과열되는 건 당연하다지만 지금의 양상은 이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전쟁

어떤 이유든지 문제만 벌어졌다고 하면 ‘흥분한’ 사람들이 몰려들어 서로를 적대하고 저주를 퍼붓는다. 그만큼 적대감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는 일시적으로 똘똘 뭉친다. 그렇다고 적대감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공고한 것도 아니다. 언제 다시 적대적으로 돌아설지 모른다. 어제까지 ‘숭고한 피해자’라고 여기며 그를 위해 촛불을 들었다가 오늘은 그를 ‘배신자’라 욕하며 책을 불태운다. 대단히 일시적이다. 다른 사건이 벌어지면 곧바로 휘발된다.

누군가는 이런 모습에서 사람들이 정치 효능감을 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른 나라와 달리 한국은 시민들의 정치적 행동으로 대통령을 탄핵하기도 처벌하기도 했다. 시민들이 노력해봤자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다는 무력감이 아니라 정치적 행동의 효능감을 맛봤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많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게 정말 정치에 대한 효능감일까? 혹시 정치에 대한 무력감을 은폐하고 회피하는 ‘전쟁’의 효능감인 것은 아닌가? 물론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라고 하지만 정치와 전쟁은 근본적 차이가 있다. 정치가 내부에서 수행하는 것이라면 전쟁은 외부와 하는 것이다. 전쟁은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가 당연한 원칙이다. 반면 정치는 상대의 죽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제법 많은 사람이 지금의 양상을 정치 과열이 아니라 내전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정치의 효능은 상대의 절멸에 있지 않다. 특히 근대사회에서 정치적 참여가 주는 효능은 ‘자유’에 있다. 정치적 참여로 시민들은 지배로부터 해방되고 자기 삶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하고 발견할 수 있다. 리처드 세넷이 저서 <짓기와 거주하기>에서 말한 것처럼 자유란 “시민들이 단 한 명의 주인만 섬기는 것, 즉 경제적 사회적 먹이 질서의 고정되고 세습적인 위치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약속”이었다. 이 자유, 해방의 약속은 정치적 참여로 실현된다.

단지 신분제로부터 해방됐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사람이 자유로워졌다는 건 그의 삶이 다양한 가능성에 개방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태어나서 정해진 하나의 직업이나 신분 위치가 아니라 다양하게 ‘변신’하며 개방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됐다. 리처드 세넷의 말처럼 그는 ‘되고 싶은 존재’가 될 수 있다. 다양한 가능성이 그에게 열린다. 다양한 가능성이 사람에게 열리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이동의 자유’이며 ‘만남의 자유’다. 한 사람의 변화와 그 가능성은 전적으로 이동과 만남의 자유에 의해 열린다. 자유는 인간 삶에 어느 시대에서도 상상할 수 없었던 ‘역동성’을 부여했다.

대선후보끼리, 정당과 정당 간, ‘정치’가 아니라 ‘전쟁’을 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공동취재사진

대선후보끼리, 정당과 정당 간, ‘정치’가 아니라 ‘전쟁’을 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공동취재사진

개인의 역동성 대신 적을 박멸하는 쾌감

나아가 자유의 역동성은 사회를 활성화하는 역할을 한다. 자유로운 개인은 결코 ‘고립된 개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은 혼자 있을 때보다 함께할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 그 함께함이 강제가 아니라 개인들의 자유로운 움직임에 의해 만나고 흩어지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과 ‘연합’하며 새로운 것을 도모해 경험을 확장할 수 있다. 경험이 확장된 사람들이 더 활발히 연합할수록 더 창의적인 것이 출현한다. 이 역동적인 연합의 장이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상적으로 말해서 둘이 만나면 세 가지 새로운 생각이 만들어지는 것, 그 공간을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 가능성의 공간이 바로 사회이며, 그 사회를 만들어내는 게 근대 정치의 효능이다.

언제부터인가 정치적 참여를 통한 효능이 사회적인 것이 아닌 경우가 많아졌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실제 삶의 변화에서 효능감을 맛보기는 힘들다. 특히 코로나19 대유행은 이 절망을 더 심화하고 있다. 자영업자는 자신들이 조직화한 힘이 아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겉으로는 분명 대다수 정치인이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을 이야기하며 그들을 우선으로 염려하고 보호하려 노력한다고 말하지만 말이다.

정치가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가능성을 개방하는 사회를 구축하는 효능감을 맛보게 하지 못하면서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무력감과 타인 혐오다. 이렇게 되면 정치는 어떻게 사회를 열지 토론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사회를 닫을지를 중심에 두고 논쟁한다. 저들을 돌본다고 우리를 돌보지 않는다는 식으로 감정이 표출된다. 대다수 사회에서 이민자에 대한 공격과 혐오가 늘어나는 이유의 한 축이다. 나에게 돌아올 자원이 그들에게 돌아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혐오와 적대감은 외부인만을 향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정치가 이렇게 무능한 것은 반대 정치세력이 무능하거나 사악하기 때문이다. 저들이 이 사회의 전진을 타락시키고 있다. 따라서 그들을 처단하고 완전히 도려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사회가 활성화하고 삶에 생기가 돌고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정치적 효능감을 시민들이 느낄 수 없다. 정치세력뿐만 아니라 다른 시민들에 대해서도 적대감이 고양된다. “어차피 도태될 사람들은 버리고 가자”는 정서가 퍼진다. 혐오와 적대가 전방위로 확산된다.

이렇게 되는 순간부터 정치는 중단되고 전쟁이 수행되기 시작한다. 정치의 효능감은 전쟁의 흥분으로 전환된다. 사회 구축은 뒷전으로 밀리고 적을 박멸하는 것에서 오는 쾌감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다. 더구나 이 전쟁은 ‘신성한’ 전쟁이 된다. 자유나 공동체 등 가치를 수호하는 것을 전면에 내걸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전쟁은 이기거나 지거나 둘 중 하나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정치적 무력을 느끼는 사람들의 삶에 아드레날린 넘치는 역동성을 가져온다.

코로나19 대유행에서 자영업자들은 삶의 변화를 이끄는 정치를 맛보기 어렵다. 박승화 기자

코로나19 대유행에서 자영업자들은 삶의 변화를 이끄는 정치를 맛보기 어렵다. 박승화 기자

정치냐 내전이냐, 부족이냐 사회냐

전쟁을 수행하는 단위, 이것을 ‘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 부족의 가장 큰 특징은 외부에 대한 극단적인 경계이며 내부의 단일성이다. 그만큼 부족적 삶은 풍부한 것보다는 명료한 것을 선호한다. 내부 사람들이 이견을 가지거나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은 곧바로 적으로 간주되며 부족을 지키기 위한 신성한 ‘전쟁’이 수행된다. 내부는 이견을 가지지 못할 정도로 단순하지만 외부는 끊임없이 타 부족과 전쟁하며 삶에 활력을 주는 것이 부족적 삶이다.

부족적 삶의 특징인 이런 단순성과 역동성은 매우 유혹적이다. 사람들은 흥분하고 삶은 생기가 넘치게 된다. 적을 물리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아지고 같은 편 사람들끼리 도모해야 할 것도 많아진다. 사회 비슷한 것이 만들어진다. 삶에 활력이 돈다. ‘고립된’ 개인은 없다. 게다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전쟁은 신성하기까지 하다. 사실 신성하기 때문에 전쟁이고 정치의 중단인 것이다.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정치는 타락한 것에 불과하다. 그 타락과 단호하게 단절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전쟁 수행이다.

반면 그만큼 외부와의 전쟁이 아닌 내부에서의 만남을 통해 삶을 다양한 경로로 개방하고 역동성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자유로운 삶’과 ‘사회적 삶’은 불가능해진다. 사회적 삶의 역동성은 피곤하고 지루하고 재미없다.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말하고 설득하고 타협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안전하지도 않다. 다수의 사람은 사회가 아닌 부족적 삶에 이끌리지 않을 수 없다. 사회가 폐허가 된 자리에서 전쟁만이 시민들을 흥분시키고 삶에 활력을 돋게 한다. ‘혐오’는 이 전쟁의 정당한 근거이자 땔감이다. “저들은 저토록 혐오스러운 자들이다.” 사회는 항구적인 내전 상태에 빠져든다.

돌이켜보면 한국 사회만이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대부분의 사회는 논쟁거리가 생길 때마다 시민들이 내전 상태로 접어드는 것을 지난 몇 년간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 사이에 쌓이는 감정은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환멸뿐이었다. 그리고 통치자를 포함한 정치인들은 그 혐오의 감정을 정파적 이익을 위해 묵인하거나 조장하는 모습도 보였다. 국가 지도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내전의 지휘관이 되는 모습이었다.

이번 대선은 특히 이런 양상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빨갱이는 죽여도 되고, 친일파는 그 자손까지 다 처단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저 적들과 내통하고 부화뇌동하는 내부의 적을 색출하고 처단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모두가 ‘원팀’을 강조하지만 기실 저 말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신이 수행하는 게 정치가 아니라 전쟁임을 고백하는 일이다. 한쪽에선 저들이 우리가 물리쳐야 하는 적이라 외치고, 다른 쪽에선 바로 네가 그 적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내전이다.

뿔뿔이 흩어진 ‘원팀’

정치권에서 사건이 발생할수록 내전만 더 심화하는 양상이다. 이 악순환 속에서 공론장의 주민인 시민은 사라지고 부족 전사만 활개를 친다. 정치인은 통치가 아니라 내전의 지휘관이 주는 효능감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부족 전사와 내전 지휘관, 둘의 악순환을 끊어내야 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삶을 다양한 가능성에 개방하고 활력을 주는 사회를 구축하는 정치의 효능감이기 때문이다. 내전 지휘관이 되라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맞서는 이가 이번 대통령선거 후보 중 단 한 명이라도 있기를 바란다. 정말이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시민의 삶은 기로에 서 있다. 정치냐 내전이냐, 부족이냐 사회냐.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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