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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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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 검증과 무분별한 폭로의 갈림길

‘후보에서 시작해 후보로 끝나는’ 선거 보도 벗어나
정책·공약 검증하고 당면과제 해법 찾는 보도를
등록 2021-09-23 12:42 수정 2021-09-24 01:13
2017년 4월 대선을 아흐레 앞두고 대전 중구 으능정이 문화의거리에서 열린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선거 유세에서 유권자들이 후보의 연설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2017년 4월 대선을 아흐레 앞두고 대전 중구 으능정이 문화의거리에서 열린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선거 유세에서 유권자들이 후보의 연설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대선이 다가옵니다. 당선자가 결정되는 2022년 3월까지 대한민국은 혹독한 ‘정치의 계절’을 견뎌야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대통령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 아니라 ‘우리 편’이라는 선과 ‘상대편’이라는 악이 사느냐 죽느냐를 놓고 다투는 한판 승부니까요.

정치인들만의 승부가 아닙니다. 싸움의 한가운데에는 늘 언론이 있습니다. 언론은 검투사들의 시합에 모든 판돈을 건 도박사처럼 자기편을 열렬히 응원하다가, 승부의 고비가 되면 경기장에 뛰어들어 함께 싸웁니다. 유권자들마저 진영 논리와 정치공학 셈법에 중독된 건 이런 언론 탓인지도 모릅니다.

선거 뉴스에 쏠린 눈과 귀

선거가 코앞인데 우리가 당면한 핵심 문제가 무엇이며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할 지도자로 적합한가를 묻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오로지 우리에게 무엇이 유리하고 저들에게 무엇이 불리한가를 따질 뿐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은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기후위기, 지역 소멸, 차별과 혐오 등 숱한 난제가 다음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론도 한가한 처지가 아닙니다. ‘언론 종말 시계’의 바늘은 이미 한밤중을 가리킵니다. 언론을 향한 불신은 위험수위에 이르렀습니다. 선거 국면은 뉴스에 특히 눈과 귀가 쏠리는 시기입니다. 이번 대선에서도 언론이 부끄러운 행태를 반복하고 변화의 조짐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언론 종말 시계’는 더 빨라지겠지요.

안타까운 건 지금 언론이 선거를 다루는 방식에서 별다른 위기의식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물론 현장 기자들은 늘 해오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까지 관행적으로 해왔던 보도를 열심히 답습한다고 해서 언론이 위기를 탈출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선거철에 언론이 열심히 하는 일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 후보 동정을 전하는 일입니다. 언론사마다 대선 주자를 전담 취재하는 이른바 ‘마크맨’이 있습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후보가 가는 현장에 동행하며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선거캠프 인사들과 수시로 접촉하며 이슈를 좇는 일을 맡지요.

대선 주자들이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 알리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언론사가 기자들을 대거 투입해서 똑같은 장소에 가고 똑같은 말을 받아쓰며 획일화된 뉴스를 만드느라 인력을 낭비하는 게 지금 언론 상황에서 합리적인지 의문입니다. 캠프 간의 입씨름이나 인신공격을 단순 중계하는 뉴스가 많은 이유도 이런 취재 관행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전담 마크 취재는 과감히 통신사에 맡기고, 그 자원과 시간을 차별화된 취재에 투자하면 어떨까요?

경마 저널리즘의 전형

둘째, 후보 지지도를 전하는 여론조사입니다. 언론사들은 수시로 조사기관에 의뢰해 지금 어느 후보가 앞서는지 선거 판세를 중계하는 보도를 합니다. ‘1위로 올라섰다, 격차를 벌렸다, 뒤쫓고 있다’ 같은 표현이 뉴스에 넘쳐납니다. 선거를 승패 위주의 게임처럼 접근하는 경마 저널리즘(Horse-race journalism)의 전형입니다.

시민들이 지지율 등락에 관심이 많은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수요에 비해 여론조사 보도는 분명 과열돼 있습니다. 지지율은 선거의 본질이 아닙니다. 부실 조사와 과잉 해석이 민심을 왜곡할 우려도 있습니다. 적지 않은 여론조사 비용을 다른 보도에 투자한다면 훨씬 값진 기사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셋째, 후보와 관련한 의혹을 제기하고 검증하는 일입니다. 대선이 다가오면 언론사마다 특별취재팀을 꾸려 탐사보도에 나섭니다. 유력한 대선 주자의 부정을 파헤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뉴스는 기자들이 가장 탐내는 특종이지요. 공직 후보와 관련한 새로운 정보를 발굴해 알리는 일은 국민의 알권리에 봉사하는 언론의 책무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이런 보도는 더 활성화되고 장려돼야 합니다.

하지만 언론의 의혹 제기가 어떤 경우에도 다 용인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가족의 사생활 등 후보 본인과 아무 관련 없는 내용이라거나 최소한의 사실 확인 없이 이뤄지는 무분별한 폭로는 위험합니다. 탐사취재가 반대 진영의 의혹만을 대상으로 하거나 정파적 공격의 수단으로 악용된다면 위험의 정도는 더 커집니다. 우리 언론의 검증 보도는 얼마나 건강한지 한번쯤 돌아볼 일입니다.

후보의 동정·지지율·의혹. 언론이 지금까지 열심히 해온 세 가지 일은 모두 ‘후보’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선거를 보도하는 언론은 후보를 쫓아다니느라 바쁩니다. 후보에 관한 소식을 전하는 일,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언론이 제 역할을 다했다고 주장하면 곤란합니다.

후보뿐만 아니라 언론도 ‘시험대’

지속가능성의 위기를 맞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는 ‘너는 어느 쪽이냐’를 묻는 정치가 아니라 개인과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언론은 특정 정파의 이익에 복무하는 언론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질과 역량을 제대로 검증할 줄 아는 언론입니다.

그렇다면 언론은 ‘후보에서 시작해 후보로 끝나는’ 보도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와 그 해법에 집중해야 합니다. 후보 개인의 도덕성을 검증하는 보도만으로는 안 됩니다. 공약의 방향과 타당성, 실현 가능성을 정교하게 따지는 보도가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언론이 완전히 손을 놓고 있던 분야입니다.

기자들은 부동산 투기, 위장 전입, 탈세, 논문 표절 등 후보자의 과거 경력을 검증하는 취재에 익숙합니다. 많이 해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책과 공약을 검증하는 취재 방법은 막막합니다. 안 해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꾸 시도해봐야 합니다. 많이 하다보면 여기서도 노하우가 쌓이고 숙련된 기자들이 나올 겁니다.

위기는 곧 기회라고 합니다. 이번 대선은 언론 불신이 고조되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언론이 신뢰를 회복하는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기성 언론이 허위조작 정보를 전파하는 유튜브 채널과 차별화된 효용을 제공한다면 떠나간 독자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늘 해오던 선거 보도 관행을 혁신하고 새로운 모델을 계발한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대선에 출마한 정치인뿐 아니라 언론도 국민의 평가를 받는 중요한 시험대에 오른 셈입니다.

박영흠 협성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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