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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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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조사는 민주주의에 기여하는가

정치권력 견제하지만, 후보자 지지율에 매몰돼 삶의 문제 외면하기도
등록 2021-08-24 14:46 수정 2021-08-25 01:55
서울 서대문구의 한 여론조사 전문기관 사무실에서 조사원들이 선거 관련 여론조사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서울 서대문구의 한 여론조사 전문기관 사무실에서 조사원들이 선거 관련 여론조사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여론조사에 대한 불신이 높지만, 여론조사는 민주주의 발전에 긍정적 역할을 해왔다. 가장 큰 기여로는 부정선거 시도를 차단한 게 꼽힐 것이다. 과거 군사독재 시대 선거를 보면 부정선거가 대규모로 자행된 사례가 많다.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은밀하게 실행된 경우도 많을 것이다. 여론조사가 도입되면서 이전처럼 과감한 부정선거는 못하게 됐다. 대략적인 선거 결과를 여론조사로 대중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저한 차이의 결과가 나오면 유권자는 의심하게 되고, 결과를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여론조사가 없던 시절에는 부정선거의 증거가 발각되지만 않는다면 투표 결과가 민심을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비교 검증할 수 없었다. 선거 부정 의혹이 있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비교적 간단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보는 여론조사의 출현으로 부정선거의 유혹을 느끼더라도 실행에 옮기기는 어려워졌다.

가장 큰 기여는 부정선거 시도 차단

물론 여론조사가 있더라도 자유롭게 실시되지 못하는 환경이라면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실제 여론조사가 과거 군사정권의 출범을 도운 전례도 있다. 전두환 정권 출범 직전에도 여론조사가 여러 제약 속에 존재하긴 했는데, 한 신문에 ‘국민여론, 전두환을 새 지도자’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설문 중에 국민이 가장 원하는 지도자의 항목이 있었고, 선택지에 ‘박력 있는 사람’이 제시됐다. 이를 전두환과 연결지어 국민여론으로 포장해 대중을 기만하기도 했다. 지금은 경쟁적으로 여론조사가 실시되고 감시의 눈도 많기에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조사와 보도는 찾기 힘들어졌다.

선거문화 개선에도 긍정적 역할을 했다. 지금은 보기 힘들지만 과거에는 대규모 군중 유세가 선거마다 등장했다. 서로 세를 과시하기 위해 사람들을 불러모아 공원 유세장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여론조사로 확인하니 엄청난 동원 비용을 들이고도 실제 지지율 변화는 미미했음을 알게 됐다. 거리 유세에서 인원을 확보하려는 관행이 근절되지는 않았지만 과거 같은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려는 행태는 없어졌다.

평소에 여론조사는 권력을 견제하는 기능도 한다. 삼권분립으로도 견제와 감시가 부실한 때가 많지만 어떤 사안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면 정부나 정치권, 심지어 사법부도 이를 외면하지 못한다. 임기가 보장되고 권력이 위임돼 있다 하더라도 국민의 생각이 정권이 결정하려는 방향과 다르면 강행하기 어렵다. 만약 여론조사가 없었다면 정보 독점을 기반으로 권력의 은밀한 횡포가 일상화됐을 것이다. 임기 중 국민 눈치를 살피는 일도, 국민에게 사과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렇듯 여론조사는 자의적 권력 행사를 막는 임무를 수행한다.

선거는 4년, 5년에 한 번 실시되지만 국민의 삶과 직결되는 사회적 이슈는 상시로 존재한다. 선거를 통해서만 국민 뜻을 확인한다면 선거가 없는 시기에 정부의 의사결정은 국민의 뜻을 충실히 반영할 수 없다. 선거는 비용도 많이 든다. 여론조사는 적은 비용으로 국민 의사를 확인할 수 있다. 투표를 통하지 않고서도 국민 의견을 투표 결과처럼 알 수 있다. 여론조사로 간접적인 투표가 이뤄지면서 선거 때가 아닌 평소에도 현대 민주주의의 주권자는 노예가 아니라 주인 행세를 할 수 있게 됐다.

찬반 양자택일 여론조사는 위험

홍수처럼 여론조사가 쏟아져 국민적 피로감도 있지만 크게 볼 때 여론조사는 민주주의의 동반자라고 할 만하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데 여론조사의 순기능이 크기 때문이다. 문제는 늘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부정적 기능이 만만치 않게 커지고 있다. 여론조사는 도구이기 때문에 잘 사용하면 약이 되고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독이 된다. 어떨 때는 흉기가 되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최근 우리 사회의 여론조사 운용에서도 여러 문제점이 노출되고 있다.

우선 찬반양론 선택 위주의 여론조사가 횡행하는데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이슈가 발생하면 바로 여론조사가 실시되고, 다음날 찬성 여론과 반대 여론이 수치로 언론에 보도된다. 일반 대중은 충분하게 해당 사안을 인지하지도 못했는데 찬반 결과가 벌써 나와버려 더 이상 깊이 있는 논의가 이뤄지지 못한다.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빈번한 조사와 이에 대한 자극적인 언론 보도는 우리 사회가 극단화되고 있다는 주장을 지속해서 확산시키고 실제 그렇게 받아들이게 한다. ‘찬반양론으로 사회가 분열됐다’는 식으로 보도된다.

민주주의는 건전한 중간지대가 필요하다. 모든 사람이 충분한 정보를 갖지 않은 상황에서 확고부동한 의견을 지닐 수는 없다. 그런데 여론조사는 1번 찬성, 2번 반대 중 하나를 고르라고 강요한다. 찬성하는 마음과 반대하는 마음이 모두 있는 사람도 있다. 잘 모르겠다며 응답을 유보하는 사람도 있지만 찬성과 반대 2개의 선택지만 제시될 경우 억지로 하나를 택하게 되어 실제보다 과도하게 의미부여가 되고 전체 국민의 흔들림 없는 여론인 양 외부로 전해진다.

지지율 말고 정책 여론조사도 필요

선거여론조사도 문제가 많다. 선거 공간은 곧 거대한 정책마켓이다. 국가 발전과 국민 삶의 개선을 위해 오랫동안 연구하고 준비한 공약을 후보들이 풀어놓게 된다. 지금 국민을 괴롭히는 일은 무엇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여론조사로 가능하다. 이를 통해 후보들은 공약을 수정하거나 정교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선거여론조사는 후보들 지지율에만 매몰돼 있다. 누가 1위인지, 2인인지에만 집중한다. 국민적 삶의 문제와 해결 방안에 대한 고민은 뒷전이다. 여론조사를 보도하는 미디어의 책임도 크다.

여론조사는 국민 생활의 문제를 드러내고 이를 해결하는 방안을 찾는 데 쓰일 때 빛을 발한다. 지금처럼 스포츠 경기인 양 순위 경쟁을 확인하는 데만 쓰는 것은 여론조사를 오용하는 것이다. 또 여론조사는 다수의견이 아닌 쪽은 입을 닫으라는 데 활용하는 게 아니다. 논의의 시작을 돕는 자료가 돼야지 지금처럼 종결자가 돼서는 안 된다. 깊이 있는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때 성급하고 설익은 여론조사로 논의의 문이 닫혀서는 안 된다.

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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