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정국’ ‘안개정국’ 같은 말은 오랫동안 한국 정치의 어떤 전형적 국면을 가리키는 말로 애용되어왔다. 하지만 요즘 같은 시국에 저런 말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모두가 악취에 코를 움켜쥐고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지켜봐야 하는 이 상황을 뭐라 불러야 할까? ‘극혐정국’ 아닐까.
청와대 민정수석 우병우를 둘러싼 비리 의혹은 극우 성향 대형 언론사와 청와대 간 공방으로 이어졌다. 우병우의 경기도 화성 땅 차명 소유는 명백한 범법 행위지만 청와대는, 아니 정확히 말해 박근혜 대통령은 사과나 경질 대신 전면전을 택했다. 그런데 전면전이라고 부르니 뭔가 석연치 않다. 마치 ‘정정당당한 정면 대결’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 대결은 ‘누가 더 선한가’ 내지 ‘누가 더 정의로운가’의 경쟁이 아니었다. 이건 ‘누가 진짜 최악으로 더러운 놈인지 한번 대볼까?’ ‘네가 과연 남의 잘못을 지적할 자격이 있는 놈이야?’라며 서로의 ‘신상을 터는’ 대결이다.
우병우 건으로 기세등등 청와대를 압박하던 는 송희영 주필의 대우조선해양 사장 연임 로비 폭로라는 크로스카운터를 맞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1등 신문이 이대로 주저앉을 리 없다는 예상이 나왔지만, 종편 심사를 앞두고 있어 쉽게 반격하지 못할 거란 전망도 나온다.
그러나 ‘극혐정국’은 대 청와대의 싸움에만 한정되진 않는다. 인사청문 시즌을 맞아 공직자들의 전력이 도마 위에 올랐다. 아파트 매매로 27억원의 시세차익을 올린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 음주운전 사고를 내고도 신분을 속여 징계를 피한 이철성 경찰청장 등의 행보는 ‘공혐’(公嫌)을 사기에 충분했다.
‘고위 공직자 모럴해저드의 끝판왕’도 등장했다.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후보자다. 그는 경기도 용인의 88평 아파트를 ‘전액’ 농협 대출로 사서 자신의 돈을 한 푼도 들이지 않은 채 3억4700만원의 시세차익을 올렸다. 김 후보자의 모친은 10년 동안 빈곤계층으로 등록해 2500만원 이상의 의료비 혜택을 받았고, 청와대 인사검증이 시작된 다음날 외국계 기업 임원인 김 후보자 동생의 직장건강보험 피부양자로 이름을 올린 게 밝혀지기도 했다. 김재수 후보에 비하면 다른 후보들이 청렴해 보일 지경이다.
이 혐오스런 면면은 놀랍게도 다시 청와대 민정수석 우병우로 돌아온다. 최근 인사검증을 거친 공직 후보자들을 선정한 책임자가 그였기 때문이다. ‘유유상종’이라 해야 할까 ‘이이제이’라 해야 할까.
동서고금의 많은 지식인이 정치혐오는 나쁘다고 이야기했다. 정치가 혐오스럽다면 사람들은 그것에 달려들어 바꾸려 들기보다 피하려 하고, 결과적으로 그런 경향이 모여 민주주의의 근간인 참여의 동기를 허물기 때문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는 주체와 대상을 떨어뜨리지만, 분노는 다가서게 만든다’고 말했다. 우리가 혐오하는 대신 분노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혐오’나 ‘분노’라는 특정 감정이 아니다. 사실 혐오는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 가깝다. 사회의 모순을 바로잡을 수 없다는 체념, 내가 참여하고 있다는 실감이 없는 무기력한 상태야말로 혐오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다.
그러므로 지금의 ‘극혐정국’이 가리키는 진정한 문제는, 아무개의 기상천외한 법적·도덕적 일탈들 각각이라기보다 그런 문제들이 이름만 바꾼 채 마치 루프물처럼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이 반복 구조를 끊어내려면 무기력과 체념을 떨쳐내야 하는데, 이것은 개인의 의지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조직, 뛰어난 지도자, 핵심 지지그룹 같은 정치적 매개가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이를 통한 대중적 승리의 경험이 필요하다.
야당 세력은 청와대가 정권 말에 벌이는 이 ‘광란의 질주’를 전혀 제지하지 못하고 있다. 변화의 매개이기는커녕 공고한 기득권 구조의 일원으로 변화를 가로막는 세력인 것이다. 과연 우리는 정치혐오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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