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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호구

청년 고용 20만
등록 2015-08-04 16:56 수정 2020-05-03 04:28
그래픽 김민하 <미디어스> 기자

그래픽 김민하 <미디어스> 기자

7월27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청년 일자리 기회 20만+ 프로젝트’ 정부-경제계 협력선언식이 열렸다. 그 자리에서 청년 일자리를 20만 개 늘린다는 정부의 계획이 발표됐다. 재계 인사들도 적극 협력하겠다고 화답했다. 일자리를 만들겠다니, 좋은 일 아니냐고?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런 말이 쏙 들어가게 된다. 저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들로 날밤을 새우며 성토해도 모자라지만, 딱 한 문장으로 요약 가능하다. ‘더 적은 임금으로, 더 자르기 쉽게!’

공공부문에서 4만 개의 일자리를 만든다는 건 그렇다 치고, 나머지 16만 개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일자리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 의아하다. 설명을 들어보니 16만 개 일자리 중 7만5천 개는 인턴, 5만 개는 직업훈련 및 일·학습 병행제도라고 한다. 결국 16만 개 중 12만5천 개는 불안정노동이다. 그나마 이런 일자리에도 재계는 생색을 내며 거들먹거린다. ‘노동시장 구조개혁이 제대로 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노동시장 구조개혁’은 지금보다 더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만드는 것이다. 비정규직 1천만 명 시대가 이미 도래했는데 저들은 여기서 더 비정규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강한 데자뷔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일자리를 늘린다는 명목으로 청년고용을 불안정노동으로 산산이 쪼갠 다음 이익은 기업이 나눠먹는 이런 야바위, 처음이 아니다. 내가 평소 ‘청년노동 대학살’이라 부르는 대졸 초임 삭감 사태가 이 분야의 원조였다. 때는 2009년, 미국발 경제위기로 한국 사회 역시 뒤숭숭하던 시절이다.

2009년 1월15일 열린 제2차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고통 분담 차원에서 임금을 안정시켜 실질적으로 고용을 늘리는 ‘잡 셰어링’(Job Sharing)에 대한 구체적 대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한다. 그 유명한 ‘청와대 지하벙커 회의’다. 같은 해 2월26일치 보도에 따르면 그 자리에서 “대졸 신입사원의 초임을 낮추는 안이 구체적으로 논의됐다”고 한다. 청와대 벙커 회의로부터 한 달 남짓 지난 시점인 2월25일, 전국경제인연합(전경련)은 30대 그룹 채용 담당 임원들이 참석한 ‘고용 안정을 위한 재계 대책회의’를 연다. 거기서 전경련은 대기업 신입사원의 임금을 최대 28% 삭감한다는 계획을 발표하며 “인건비 절감을 통해 인턴 직원을 더 뽑기 위한 일자리 나누기”라고 밝혔다. 며칠 뒤 공기업 경영진들도 ‘신입사원 임금을 최대 30% 삭감할 것’이라 선언하면서 대졸 첫 취업자를 향한 ‘대학살’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정부와 재계는 ‘고통 분담’이니 ‘고용 안정’ 같은 말을 내뱉었지만 어떻게 봐도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모두가 힘들다’면서 재벌 임원들 연봉을 삭감했다는 소식은 어디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저 ‘일자리 나누기’의 실체는 처음 사회로 진출하는 젊은이들의 몫을 빼앗아서 그 돈으로 더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인턴)의 임금을 지급하겠다는 것으로, 고용 안정은커녕 고용 불안정을 더 배가하는 최악의 조치였다. 시간당 임금은 두되 노동시간을 줄여서 일자리를 나누는 ‘워크 셰어링’(Work Sharing)이라면 고용 안정이라는 말은 그래도 설득력이 있었을 테다. 그러나 당시 전경련이 한 짓은 청년층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만 일방적으로 삭감해 비정규직을 늘리는 것이므로 ‘일자리 쪼개기’(Job Splitting)라고 불러야 적확하다. 한 사회의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특정 세대 전체의 몫을 단번에 가로챈, 유례없이 비열한 세대 간 착취 사례였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건 다 이유가 있다. 정부는 고용통계상 수치가 올라갈 수 있으니 좋고, 기업은 본래 청년노동자들 몫으로 돌아가야 할 돈을 뜯어먹을 수 있으니 좋다. 격렬하게 저항하는 세력도 없으니 비슷한 짓을 말만 바꿔 계속하는 것이다. 결국 당하는 쪽은 매번 청년들이다. 저들, 한국의 정치·경제 권력은 청년들의 팔과 다리를 모두 뜯어먹고 나면 이왕 이리 되었으니 머리마저 떼어달라고 천연덕스레 말하겠지.

박권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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