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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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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같은 사랑

등록 2013-09-05 14:21 수정 2020-05-03 04:27
어쩜 우린 복잡한 인연에
서로 엉켜 있는 사람인가봐
……
연인처럼 때론 남남처럼
계속 살아가도 괜찮은 걸까
……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너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사랑

정국은 한순간에 급반전됐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불법 개입’ 사실이 드러나 강도 높은 개혁 압력에 내몰렸던 국가정보원은 자신에게 불리하던 여론 흐름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를 일단 손에 쥔 듯한 모양새다. 지난 6월 말, 국정원이 2007년 당시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을 무단 공개한 뒤에도, 촛불집회로 상징되는 시민들의 저항 물결은 오히려 국정원으로 하여금 근본적인 개혁에 나서도록 거듭 압박해왔던 터다.

정국을 휘몰아치고 있는 이른바 ‘통합진보당 사건’으로 인해, 거센 개혁 압력에 국내 파트 존속과 수사권 확대 요구로 맞서온 국정원의 기존 주장은 마치 ‘일말의 진실’인 양 더욱 날개를 달게 될지도 모른다. 더없이 ‘적절한’ 타이밍에, 그것도 역사책의 한 페이지로 영원히 밀려난 것만 같던 ‘내란음모죄’라는 어마어마한 단어를 꺼내든 국정원의 화끈한 행동으로 인해, 정권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막무가내식 공안몰이와 불법 탄압을 수시로 일삼던, 국정원과 그 전신의 흑역사도 잠시나마 시야에서 가려질 수도 있을 테니.

이번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아직 명확하게 가려진 것은 아니나, 논란이 불거진 때를 전후해 통합진보당 쪽과 그 주요 인사들이 보인 행태는 그들에게 쏠리는 의혹을 더욱 부추기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핵심은 애써 비켜가며 석연치 않은 해명으로만 거듭 일관한 탓이다.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진 녹취록 내용을 들여다보노라면, 이들의 상황 인식에 놀라움을 넘어 허탈함마저 벗어던지기 힘들다. “박근혜 대통령 말고, 20세기에 살고 있는 사람이 또 있었네”라는 허무한 우스갯소리마저 나도는 형국이다.

어찌 보면 이번 사건은 민주주의 헌정 질서를 수시로 유린하는 보수 공안 세력과, 그에 맞선다는 명분 아래 극단적 우상에 스스로를 가둬둔 우리 사회 내 일부 극단 세력이, 사실은 ‘서로를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이’인지를 속 시원하게 까발려준 기회인지도 모르겠다. ‘적대적 공존’이란, 바로 이럴 때 이르는 말이다. 겉으로는 격하게 비방하고 다투면서도, 정작 둘 중 하나가 사라지면 더 이상 존재 기반을 잃어버리고 마는, 마치 ‘내 몸 반쪽이 떨어져버리고 마는’ 듯한 슬픈 운명 공동체 말이다.

어느 쪽이든 지난날 이 땅을 맘껏 유린했던 낡은 냉전 시대의 유물이자, 우리 사회 일각의 퇴행적 병리 현상일 뿐이다. 이번 사건의 진짜 교훈은, 제때 청산되지 못한 얼룩진 과거, 반칙과 불법을 엄중하게 단죄하지 못한 경험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진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임을 일깨워준 데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댓글 공작의 전모를 끝까지 밝혀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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