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5월, 어느새 4주기다. 5월23일 공식 추도식 전후로 각종 추모 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는 노무현재단은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미공개 영상 기록을 공개했다. 2000년 총선 때의 장면들이다. 그해 총선에서 노 전 대통령은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했다가 낙선한다. 이길 수 있다고 믿었기에, 패배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개표 결과가 발표된 직후 선거 사무실에서 분루를 훔치는 관계자들을 ‘정치인 노무현’은 이렇게 위로한다. “우리가 겪은 일보다 더 참담한 일들을 겪으면서 다들 살아요. 훨씬 더 참담한 일을 겪고, 또 일어서고…. 제일 좋은 약은 시간이에요.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은 시간이 약이에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시간만큼 확실한 대책은 없어요. 감당하기 벅차지만, 갑시다.”
당시 총선의 상대 후보는 허태열 현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다. 허 실장은 선거 유세 도중 “살림살이가 나아졌다고 생각하는 분은 손을 들어보라”고 말한 뒤 손을 든 시민에게 “혹시 전라도에서 오신 게 아니냐”고 되묻는, 악질적인 수준의 지역감정 조장 발언으로 논란을 부른 당사자다. 현장에 있던 노 전대통령이 유세장을 박차고 나간 일화도 잘 알려져 있다. 허 실장은 2010년 이른바 ‘섹스프리’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가 실장으로 있는 청와대 비서실에서 ‘윤창중 사태’가 벌어진 건 어쩌면 이상한 일도 아니겠다.
어쨌든 노 전 대통령은 “시간이 약”이라고 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을 보좌한 사람들은 이 말을 별로 수긍하지 않는 것 같다. 여전히 ‘비서관’이라는 호칭이 더 편하다는 김경수 노무현재단 봉하사업본부장은 “해마다 5월이 되면 대통령을 모셨던 사람들은 오히려 봉하마을과 멀리 있어야 더 애틋해한다. 정작 봉하에 있으면 행사 준비하느라 경황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행사를 마치면 갑자기, 어느 순간 먹먹해진다. 시간이 지난다고 달라질 문제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따지고 보면 ‘시간’을 우회한 건 노 전 대통령 자신이었다. 스스로를 ‘폐족’이라 일컬었던 사람들이, 세력이, 조직이 거짓말처럼 되살아났다. 충분한 시간이 흐르고, 한 시대에 대한 냉철한 평가와 반성이 이뤄졌기 때문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어쩌면 ‘노무현의 깃발’은 너무 빨리 부활했던 것인지 모른다.
대선 뒤 5개월이 지났다. ‘국회의원 안철수’가 탄생했다. 앞으로 그는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정책과 비전, 그리고 그릇의 크기를 검증받아나갈 것이다. 하지만 야권의 한 축을 이뤘던 대선 주자로서, 대선과정 전반을 복기하고 성찰한 결과물은 내놓지 않고 있다. 대신 안 의원은 “내가 가는 길이 새정치”라는 식의 순환논법에 여전히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민주당은 친노의 그림자를 지우느라 여념이 없다. 문성근 전 상임고문과 배우 명계남씨가 민주당을 탈당했다. 한때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이라고 불리던 유시민 전 장관이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김한길 신임 대표가 봉하마을을 예방할 때 명계남씨는 지도부의 행렬을 향해 “노무현을 부관참시하지 말라”고 고함을 질렀다. 일부 인사들을 향해선 욕설도 했다. 여전히 민주당을 ‘친노 정당’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친노의 퇴장은, 그 깃발의 부활만큼이나 생경하게 느껴진다.
야권을 아우르는 리더십의 공백기는 당분간 지속될 듯하다. 대선 후보였던 문재인 의원은 5월15일 서울백범기념관에서 열린 창간 25주년 행사에서 “국민이 바라는 것은 정치집단과 유력 정치인 간의 세력 재편이 아니다. 시민들이 정치의 주체가 되어 역동성을 담는 새로운 질서와 근본적인 쇄신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때 자신의 경쟁자였던 안철수 의원에 대한 견제 심리가 담긴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발언이었다. 자, 시간은 과연 약인가? 야권 전반의 지리멸렬은 단지 시간이 흐른다고 나아질까?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