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정치는 정명(正名)에서 출발한다고 한 공자 말씀을 귀담아들어야 할 것이다.” 2003년 10월 열린우리당이란 이름이 발표되자, 유종필 민주당 대변인이 이렇게 말했다. 열린우리당이 약칭을 ‘우리당’이라고 정하자, “왜 다른 당을 우리 당이라고 불러야 하느냐”고 비꼰 거다. 다른 정당들은 ‘열우당’ ‘열린당’이라고 부르곤 했다.
공자는 “정치를 한다면 어떤 일부터 시작하겠느냐”는 질문에 ‘정명’이라고 답했다. “이름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말(言)이 서지 않고, 말이 서지 않는다면 모든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의한 일에 정의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불의라고 바로잡겠다는 뜻이다. 정명론의 해석이 여러 갈래지만, 이름에 부합하는 실질적 행위가 따라야 이름이 성립한다는 얘기라고 한다.
한국 정당은 이름과 실제가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전두환이 만든 민주정의당이 대표적이다. 어떤 가치와 지향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이름도 흔하다. 열린우리당은 물론, 한나라당·새누리당이란 이름이 그렇다. 미국의 민주당·공화당, 영국의 보수당·노동당 등 이름에서 성격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과 다르다. 대선·총선을 앞두고 당 이미지를 바꾸려 하거나 헤쳐모여를 반복해온 탓이다. 그럼에도 일련의 흐름은 있다. 보수 정당은 3당 합당 이후 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으로 이념적 지향을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이름을 써왔다는 것, 그리고 민주당은 ‘통합’이란 이름을 뗐다 붙였다 했다는 것이다.
진보정당은 어떨까. 1997년 대선 때 권영길 후보를 낸 국민승리21은 약칭이다. 공식 당명은 ‘건설 국민승리21’이었다. 원외정당에는 가나다순으로 기호를 배정하는데, 공화당 허경영 후보(공중부양한다는 그 허경영이다)에 밀려 5번을 받을 처지가 되자, 고육지책으로 ‘건설’을 붙였다. 국민승리21에 참여했던 박용진 민주당 대변인은 “당명에 민중·노동·진보 등을 써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권 후보가 ‘국민’을 쓰는 게 좋겠다는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고 말했다.
국민승리21은 민주노동당으로 탈바꿈했다. 진보정당이었으나 이름에 진보는 없었다. 이후 여러 차례 분열 끝에 현재 통합진보당과 진보정의당, 진보신당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진보정의당과 진보신당은 각각 7월21일과 6월23일 당대회에서 ‘진보’자를 떼어 내고 새 이름으로 바꾸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노회찬·조준호 진보정의당 공동대표는 지난 5월29일 당원들에게 ‘사회민주노동당’(약칭 사민당)을 제안했다. “사민주의를 ‘채택’한 것은 아니지만, 사민주의와 노동 중심의 가치와 지향을 담았다”고 강조했다. 진보신당은 노동당, 녹색사회노동당, 좌파당 가운데 하나를 당원총투표로 정할 예정이다. 두 당의 당명 개정에는 진보라는 말이 종북이라는 이미지와 연결되거나, 통합진보당과 구별되지 않는 현실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안철수 의원의 정책연구소 ‘정책네트워크 내일’ 이사장을 맡은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안철수 신당’의 성격을 ‘노동 중심 진보정당’으로 규정해 관심을 모았다. 노동이 중요한 정치 의제가 되어야 한다는 데는 안 의원도 동의했지만, 중도와 탈이념을 강조해온 안 의원의 지향점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안 의원 쪽은 “노동 의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과 진보정당을 지향하는 건 다른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이른 감이 있지만 ‘안철수 신당’이 탄생할 경우 당명이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진심·미래·새정치·내일 등 안 의원이 즐겨 써온 단어의 추상성을 뛰어넘는 당 이름은 가능할까? 어쩌면 한국 정당에는 이름에 부합하는 실질적 행위가 필요한 게 아니라, 이름이야 무엇이든 ‘실질적 행위’가 필요할 듯싶다. 노동 의제에 대한 능력을 보여주는 정당이 ‘진보정당’이라는 얘기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