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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슈퍼갑’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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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3-05-15 20:42 수정 2020-05-03 04:27
한겨레 강창광 기자

한겨레 강창광 기자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오다)라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하나봐요. 그땐 일이 이렇게 커질 줄 꿈에도 몰랐으니까요. 남양유업 대리점 전직 사장님의 ‘갑을관계’ 폭로가 눈덩이처럼 파장을 낳고 있어요. 남양유업 대표이사가 결국 대국민 기자회견장에서 머리를 숙였어요. 평소 잘해둘걸 후회하고 있었는지 몰라요. 하지만 그땐 이미 늦은 거죠.

공정거래위원회가 ‘갑의 횡포’를 뿌리뽑겠다고 나섰어요. 들불처럼 이는 ‘을의 민란’에 정부가 손을 걷어붙이고 나선 거죠. 아까도 말했지만, 평소 잘해둘걸 후회하면 그땐 이미 늦은 거예요. 그러나 이왕 일이 이렇게 커졌으니, 강경책을 꺼내봐요. 아예 ‘갑’이라는 단어의 씨를 말려버리자고요. 이 땅에 평화가 찾아오려면 갑이라는 말이 사라져야 하니까요. 자, 대통령령으로 갑이라는 단어를 금지어로 지정해요. 포털 사이트에도 연관검색어로 뜨지 못하게 해야 해요. 갑이라는 단어를 쓰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을 적용해 엄중히 처벌하도록 하자고요.

이를 위해선 먼저 전국에 퍼져 있는 운전면허학원부터 압수수색해야 해요. 대놓고 갑이라는 단어를 쓰는 현장이거든요. 운전면허시험 문제에서만 문제 보기를 낼 때 ‘①②③④’ 대신 ‘갑을병정’이라고 쓰고 있어요. 갑을 최고로 치는 사회 분위기를 주입시키는 것일지 모르니, 시험지 싹 거둬들이도록 해요.

그다음은 ‘갑돌이와 갑순이’예요. 전국에 수배령을 내려 반드시 잡아들여야 해요. 두 사람이 “한 마을에 살았더래요”라는 결정적 단서도 남아 있어요. 갑돌이와 갑순이만 특혜를 받고 이들을 위한 노래가 존재하는 건 사회정의에 걸맞지 않으니까요. 마지막으로는 전국에 퍼져 있는 갑 지역구 국회의원·지방자치단체 의원을 모두 잡아들여 구조조정하도록 해요. 억울하다고요? 할 수 없어요. 갑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 자체가 죄악이니까요.

그런데 무서운 건, 이렇게 하면 갑의 횡포도 사라질 거라 믿는 이들이 있다는 거예요. 최근 현대백화점이 앞으로 계약서에 ‘갑을’이라는 표현 대신 ‘백화점·협력사’라는 단어를 쓰기로 했다니 말이죠. 하긴 갑의 횡포를 잡겠다고 나선 박근혜 정부가 청와대 안에 숨어 있던 ‘슈퍼갑’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걸 보면, 별 기대 하지 말아야 했나봐요. 지난 5월10일 윤창중(사진) 청와대 대변인이 방미 일정 중에 주미대사관 인턴 여대생을 성추행한 혐의로 경질됐어요.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상대로 ‘단독기자’를 자처하면서 정보 통제에 힘쓰던 그가 진정 갑인 이유는 이번에 ‘한국의 갑을 문화’를 확실히 알렸기 때문이에요. 전세계에서 갑 노릇을 해온 미국, 게다가 워싱턴에서 미국 경찰의 범죄 조사를 가볍게 무시하고 홀로 한국에 돌아온 그의 갑 의식, 세계 최고 수준이에요. 게다가 청와대의 갑인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순방 뉴스를 가볍게 묻어버린 그의 대범함이란! 이렇게 갑에 둘러싸여 사는 우리나라, 참 갑갑해요. 에라이, 차라리 을을하다 말하는 게 낫겠네요.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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