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기사를 읽다가 뜬금없이 이 생각났어. 완판본과 경판본을 현대어로 옮긴 민음사판 말이야. 이몽룡과 춘향은 16살이었지. 한국의 16살과 사뭇 삶이 달랐어. 이몽룡은 주야장천 과외받고 홈스쿨링만 했겠지. 양반 자식이었고 당시엔 서당 말고 학교가 딱히 없었으니. 춘향은 기생의 딸로 태어나서 홈스쿨링만 받았겠지만, 과목은 이몽룡과 달랐을 터. ‘가사’(바느질·요리 등등) 과목 비중이 높았겠지. 요즘 16살은 그냥 고1. 전국 모의고사에 벌벌 떠는 인생.
다 아는 이야기지만 이몽룡과 춘향은 성교육을 따로 받진 않았어. 구성애씨는 아직 태어나기 전이었으니까. 그냥 자연발생적인 성실습 장면이 에 잘 나오지. 아마 직접 인용했다간 당장 “시사정론지에서 황색 저널리즘이냐”고 악플과 악메일을 보낼 터. (사실 다들 아시잖아요? 다들 그 부분만 찾아 읽으셨잖아요?) 어린 것들이 ‘도깨비방망이’니 ‘말 타고 업고 놀기’ 따위의 비유법까지 써가며 체위 비유하며 진탕 놀데.
생각해보면 익숙한 장면이야. 간단히 표현하면 ‘술 먹고 놀다 같이 잤다’ 아니겠나. 지금 이 시간에도 영등포 나이트나 이태원 클럽에서 무수히 벌어지는 일이지. 다만 이몽룡이나 춘향과 달리 고1은 ‘공식적으로’ 열외라는 점은 큰 차이. 간 큰 소수의 고1은 벌벌 떨며 기껏해야 멀티방에나 들어가야겠지. 이몽룡과 춘향은 즐기지 못했던 야동을 즐긴다는 게 유일하게 지금 16살이 이몽룡보다 나은 점? 담배는 말할 것도 없지. 구한말 서양 선교사들의 조선 방문기 아무거나 펼쳐봐. 애부터 노인까지 담뱃대 무는 장면 묘사가 막 나와. 담배 피우는 거, 사실 도덕과 무관한 거거든.
헤어스타일 규제는 양쪽 다 비슷한 듯. 양반 자제 이몽룡이 머슴처럼 짧은 더벅머리를 했다간 귀족 아버지에게 개욕을 먹었겠지. 기생 딸 춘향이도 길게 땋는 것 말고 무슨 선택지가 있었을까? 헤어스타일 좀 꼴리는 대로 하겠다는 의사표시조차 ‘두발 자유’ 같은 거창한 담론과 이념의 형태를 가져야 하는 기막힌 2012년 한국과 이건 좀 비슷하네. 뭣 하나 마음대로 못하게 하면서 ‘애들을 늙어 죽을 때까지 애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 꼰대들 덕분이지.
그러니 한국 16살들 사는 게 춘향이보다 한 발짝도 더 나아지지 않은 건 그렇다 치자. 불행을 참아야 서울대 가고 삼성 간다는 명분도 그렇다 치다. 제발 좀 불행을 예측 가능하게 해주시면 안 되겠니? 2013학년도 수능이 또다시 난이도 조절에 실패했다는 말이 많아. 언어와 외국어, 수리 ‘나’형에서 전부 만점을 받은 인원도 288명이래. 하나 틀리면 등수 급전직하. 그렇게 힘들게 대학 가서 또 학점 따고 편입시험 공부나 의료전문대학원 공부해야 하니까 숨이라도 좀 쉬게 해주쇼들. (그 맛 좋은 술 마실 시간도 없이.)
이쯤 쓰고 나니 벌써부터 아버지의 한 말씀 들리네. “넌 아직도 20대(처럼 불만이 많)냐.” 생각해보니 그 말씀도 맞긴 한데, 내가 벌써 서른일곱 섬아저씨인데 어떻게 내 고딩 때랑 애들 헤어스타일이 그리 달라진 게 없냐고요. 내가 문젠가, 꼰대들이 문젠가. 사실 수능 기사 보며 욱한 진짜 이유는, 조카 가율이가 고1이 되는 그 시대엔 제발 좀 염색한 거 가지고 뭐라 하지 않는 정도의 이성은 찾았으면 하는 생각에서. 가율아, 16살엔 탈색해서 오렌지 헤어를.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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