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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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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정권 운동은 계속된다

등록 2012-03-30 16:42 수정 2020-05-03 04:26

“여자들은 판단력이 부족해서 잘생긴 남자에게나 투표할 거다.” “여자들은 월경주기에 따라 감정에 휘둘려 일관된 판단을 할 수 없으니 투표해선 안 된다.” “여자들은 남편을 따라 투표를 할 테니 투표권을 가질 필요가 없다.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가정에 분란이 생길 테니 더더욱 안 된다.” 20세기 초반, 유럽에서 여성의 참정권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내세웠던 논리다. 지금은 황당하게까지 보이는 내용들이지만 그때는 다들 공공연하게 이런 주장을 펼쳤다. 차별은 편견으로, 때로는 과학의 외피를 쓰고 정당화되곤 했다. 여성 참정권 운동뿐 아니라 유럽 등지의 노동자·빈민들의 참정권 운동이나 미국에서 흑인의 참정권 운동도 이와 비슷한 논리들과 맞서 싸우며 이루어졌다.

참정권은 권력관계의 문제

참정권은 대의제 민주주의에서는 선거권과 피선거권 등으로 대표되는 권리다. 대개의 인권이 그렇듯, 참정권도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역사적으로 만들어져왔다. 우리는 흔히 참정권이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성숙한 사람에게 보장된다고, 그리고 그걸 편의상 ‘나이’로 판단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과거 노동자·빈민·여성·흑인들은 공부를 하고 지성을 발달시켜서 참정권을 얻을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 밖에도 나라마다 서로 다른 선거권 연령 등을 생각해보면, 참정권이 단순히 합리성이나 성숙도에 따라 보장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참정권은 말하자면 ‘누가 시민이냐’ 하는 문제, 어떤 집단이 사회의 의사결정에 참여해 그들의 의견과 이해를 반영할 수 있느냐 하는 권력관계의 문제다. 참정권을 가질 만큼 성숙도나 합리적 판단능력이 있는지 어떤지 왈가왈부되는 사람들 자체가 정해져 있는 것이다. 여성들의 미성숙함은 월경주기까지 들먹이며 언급됐지만, 여성 참정권에 반대하며 무리한 억지 주장을 내세우던 이들의 미성숙성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 한국 정치의 큰 병폐로 지역주의 문제를 꼽곤 하지만, 지역주의 묻지마 투표를 하는 이들의 참정권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 “청소년들은 게임기 준다는 후보나 뽑을 테니 투표권을 못 준다” 같은 말은 공감을 얻지만, 집값 올려주겠단 후보를 뽑는 이들의 참정권을 제한하자는 건 말도 안 된다고 할 것이다. 합리적이고 성숙한 이들이 권리를 가지는 게 아니다. 권리를 가진 이들이 스스로 합리적이고 성숙하다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다.

참정권 운동에 힘을

올해는 큰 선거가 두 번이나 있다. 총선을 코앞에 두고, ‘스스로 합리적이고 성숙하다 이름 붙일 수 있는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참정권 운동’은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선거권 연령 인하, 정치적 활동의 자유 등을 주장하는 청소년들, 비정규직, 장애인, 성소수자, 그 밖에 정치적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말아달라. 그리고 꼭 특별히 차별받는다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한국 사회에서는 표현의 자유도 그렇고 참여할 권리나 자치권도 아직 많은 부분이 불충분한 것이 사실이다. 참정권 운동은 과거에 끝난 운동이 아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계속되어야 한다. 그 참정권 운동들에 힘이 될 수 있는 쪽으로 당신의 권리를 행사해줄 것을, 부탁해본다.

공현 청소년인권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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