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지어는 ‘회색지대’에 있다. ‘목적의식’과 ‘생존’ 사이에.
“예술이 고상한 정신을 양양시키기 위해서나 자신감을 제공하기 위해 고안된 어떤 것이라고 생각지 마라. 예술은 브래지어가 아니다.” 줄리언 반스는 소설 (10장 기소 중 15번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브래지어는 예술과는 멀단다. 브래지어가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욕망’이 두드러지니 예술이 되기에는 ‘속되다’. 예술의 가장 나쁜 곳이다. 하지만 이 낡은 브래지어는 가장 속된 곳에서 울음을 왈칵 내뱉게 한다. 박영희 시인은 아내의 브래지어를 빨며 이리 감상했다.
“한 남자만을 위해/ 처지는 가슴을 세우고자 애썼을/ 아내를 생각하자니 왈칵,/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이처럼 아내는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 동굴처럼 웅크리고 산 것을….”
24시간 내내 이 두꺼운 벨트를 가슴팍에 두르고 있는데, 그것은 ‘한 남자’만을 위한 퍼포먼스. 그쯤이면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생존이다. 그 안타까움은 브래지어를 빨아봐야 알 수 있다.
찌르고, 누르고… 이 썩을 놈의 와이어!
브래지어는 극단의 풍경을 왔다 갔다 한다. 1970년대 서구의 여성운동가들은 브래지어를 화형시켰다. 브래지어는 여성의 구속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그들은 벗어던졌다. 그러나 ‘노브라’는 되레 반대로 달려나갔다. 노브라를 실천하는 사람은 자유가 아니라 끈적한 시선을 입고 만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렇다. 어렵게 노브라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인다. 여성주의 검색사이트 ‘언니네 지식놀이터’에는 이런 고민이 올라온다. “얼마 전 브래지어를 안 하고 다니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알게 되었는데, 반응이 좀 왜 그런 거 있죠? 뭔가 성적 대상화되어 기분 나쁜. 그 사람에게 브래지어를 안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려줄 수 있는 그런 책 뭐가 있을까요?”
그래서 많은 여성은 어정쩡한 ‘회색인간’이다. 아름다움을 향해 봉긋한 욕망을 드러내지 않아도 노브라는 할 수 없는 회색인간. 불편하지만 브라는 해야 한다. 그들에게 한낱 남은 희망은, 조금이라도 더 편함이다. 많은 여성은 그래서 와이어와 싸운다. 불쌍하다. 초딩도 아니고 와이어와 싸우는 여자들이라니!
“며칠 전 외출하려고 옷을 갈아입고 준비를 모두 마쳤는데 갑자기 비가 퍼붓는다. 젠장, 낭패다! 하고 외출 포기, 기냥 고대로 침대에 엎드려 낮잠에 들었다. 그리고 2시간 후 눈을 떴는데 기분이 무척 나빴다. 악몽에 시달린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몸이 무척 불편하고 힘들게 느껴졌다.(…) 역시 범인은 와이어가 갑옷처럼 명치를 압박하는 브래지어! 그래, 너였냐? 브래지어 자체는 필요성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도대체 와이어는 정말 너무 쓸데없고 불편한 장치 아닌가? 네가 진정 없는 가슴도 모아주고 처진 가슴도 올려주는 마법의 손이란 말이냐? 에잇! 뻥치지 마! 넌 고문 도구일 뿐이야. 내가 미쳤지 왜 그동안 쇠줄로 가슴을 압박하고 다녔담? 옷장에 있는 브래지어를 전부 꺼내 와이어를 제거해버렸다. 역시나 와이어 없어도 멀쩡하고 착용감도 훨씬 편하구만. 음하하하하하하~ 만족.”
미국에 유학 중인 ‘테라네’(34)는 몇 년 전 이런 일을 감행했다. 와이어 예술도 했다. 빼낸 와이어로 웃는 눈을 만들기도 하고 달리는 모양을 만들었다. 가장 만족스러운 것은 ‘짝짝이 가슴’. 정말 ‘형상기억합금’이긴 했던 건가.
와이어는 브래지어의 밑에서 가슴을 받쳐주고 모아주는 역할을 한다. 1970년대 브래지어의 기본 목적인 가슴을 처지지 않게 한다는 측면에서 발군의 실력자로 등장했다. 1980년대 ‘형상기억합금’이라는 식으로 ‘첨단기술’과 결합하면서 대부분의 브래지어에 들어갔다. 그러나 첨단기술은 뾰족이 적의를 드러낸다.
첫째, 빨래를 세탁기로 끝낼 수 없게 하는 제1의 적이다. 손빨래를 해야 한다. 와이어가 만든 모양이 망가지기 때문이다. 중성세제로 가볍게 한다. 와이어 브래지어를 세탁기에 넣어 돌릴 수 있도록 개발된 것이 ‘빨래망’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세탁기에 넣지 않고 손빨래를 한다. 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너무 소중해서도 아니다. 원래 생겨먹기가 부려먹는 놈이다(심지어 와이어, 컵, 끈을 분리해 세탁하라기도 한다).
둘째, 비틀어지고 낡는다. 비틀어지면서 천을 뚫고 나온다. 그리고 가슴팍을 콕콕 찌른다. 미팅 자리라면 시선은 상대방의 얼굴에 고정한 채 어설픈 자세로 손을 오묘하게 구부려 천을 뚫고 나온 와이어 끝을 밀어넣는다. 그래도 이미 늦었다. 가슴팍이 빨갛게 부어오른다. 싸움은 극에 달한다. “이 썩을 놈의 와이어!” 그러다 보면 와이어도 브래지어와 싸운다. 와이어가 걸려서 세탁기가 고장난 경험을 주부들은 재미 삼아 이야기하곤 한다. 와이어와 브래지어의 불화 결과다.
셋째, 압박감이다. 가슴 밑으로 와이어 닿는 부위를 따라 짙은 선이 생겼다는 이도 있다. 배와 가슴의 경계선 역할을 하며 양쪽의 공격을 받아 푹 꺼져 있다. 몸을 누르고 있다는 말이다.
노와이어가 매장 구석에 숨은 이유2002년 압전형 센서가 삽입된 의복으로 측정한 의복압 조사(송경헌·김정화·박성하 배재대 의류학부 패션산업전공·대전보건대학 패션섬유산업과)에서 와이어가 있으면 없는 경우보다 전체적으로 5~10% 의복압이 높았다. 20대에서는 안쪽 가슴에서, 40대에서는 바깥쪽 가슴에서 2배 정도의 의복압을 보였다.
그래서 불편함도 더한다. 2007년 ‘브래지어 착용 실태조사-청년기 여성을 중심으로’(나미향·권윤희·김미선, 제8집, 대구·경북 지역 20~34살 여성 147명 조사)에서 브래지어를 항상 착용한다고 한 이는 72.9%에 이르렀다. 브래지어 착용시 답답함을 느끼는 부위에 대해 58.6%가 와이어라고 답했다. 다음으로는 뒤여밈 9%, 겨드랑이 20%, 어깨끈 6.9%, 기타 5.5%였다. 비슷하게 가장 불편한 부위는 49.3%가 앞여밈이라고 답했다.
2009년 ‘여대생의 브래지어 착용과 선호에 관한 연구’( 2009년 10월, 20대 초반 미혼여성 설문지 189부 분석)는 가슴 유형에 따라 브라의 만족도를 측정했는데, 표준과 다른 가슴 유형의 사람들은 불편감이 크다는 점을 지적한다. 브라가 표준 체형을 기준으로 제작되어서다.
와이어에 시달리다 보면 노와이어 브래지어를 찾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렵다. 직장인 ‘블루’(38)는 3년 전에 산 브래지어를 아직도 쓴다. 마음에 드는 노와이어 브래지어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직접 브래지어 매장을 돌아보았다. 서울 명동의 A백화점 4층 란제리 매장. A 국내 메이커 매장에는 진열대의 제일 구석에 보라색과 연지색 두 가지의 노와이어 브래지어가 있었다. “튀지 않는 색을 원하시면…”이라며 한 매장 직원은 수유용과 같이 걸린 살색의 노와이어를 권했다. 건너편 B 국내 메이커 매장, 전면에 길게 배치된 진열대에 노와이어는 하나도 없다. 노와이어를 찾자 구석편에 놓인 매대로 데려갔다. 3종의 노와이어 브래지어가 있었다. “그것도 맘에 들지 않는다면?”이라며, 진열대 밑 서랍에서 패드가 든 노와이어 브래지어를 꺼내줬다. 1월 출시품이라고 했다. “진열대에는 진열 안 하시네요?”라고 묻자 “다른 예쁜 브라들이 많으니까요”라 했다. C 해외 메이커(프랑스) 매장에도 노와이어가 많이 걸려 있진 않았다. 그러나 매장 직원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예쁜 색의 브래지어를 보여줬다. 직원은 “한 라인이 출시되면 한 종 정도는 노와이어”라고 답했다. 한 라인이란 5~6종의 비슷한 제품군을 말한다. “많이 찾느냐”고 묻자 “많지는 않다. 나이 드신 분과 가슴이 작으신 분이 찾는다”고 답했다.
서울 홍익대 근처의 A 국내 메이커는 젊은 여성을 위한 속옷을 파는 곳이다. 노와이어는 하나도 없다고 했다. B 해외 메이커(미국) 매장에서는 노와이어 브래지어가 있지만, 작은 사이즈뿐이라고 했다. ‘틴용’(청소년용 브래지어, 노와이어를 권한다)이냐고 묻자, 큰 사이즈도 출시되는데 지금은 없다고 했다. 그 옆에는 회색과 검정색의 스포츠 브래지어(훅 없이 입는 방식의 브래지어)가 있었다. 그는 와이어가 아프지 않다고 강조하면서도, 정 필요하면 빼내서 수선해준다고 했다. C 해외 메이커(미국) 매장에도 노와이어 브래지어는 없었다. C 해외 메이커의 미국 온라인 매장에는 유독 노와이어가 많았다.
비비안 홍보팀에서는 보정·기능성 란제리를 내는 BBM 브랜드에서 노와이어 제품이 있다고 한다. BBM에서는 총 18종 중 3종의 제품이 노와이어 브래지어다. 판매량은 브랜드 전체의 10%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브래지어 형태에 자유를 부여하라
다른 브래지어를 꿈꾼다. 브래지어의 대안으로 ‘누브라’가 지난해 인기를 끌었다. 누브라는 접착력 있는 패드로 가슴 부위에 붙이는 것이다. 압박감은 없애주지만 안절부절이다. 여름에 땀이 차면 접착 부위에 접촉성 피부염이 생기기도 한다.
테라네는 다른 형태의 브래지어가 나왔으면 한다고 말한다. “브래지어 회사의 가슴둘레와 컵 크기, 모양 등이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러닝 형태인데 컵이 있고 가슴둘레를 자기 마음대로 끈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어떨까요?”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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