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연평도 폭격이 있은 뒤, 한국에서 오는 전자우편들의 톤이 조금씩 거칠고 급박해졌다. 최진실 자살 직후 한 달여간 한국발 전자우편들이 모두 짙은 우울의 안개를 뒤집어쓴 듯하던 것과 비슷하게. 어딘가에 단단히 뿌리박지 못한 범국민적 존재의 불안은, 한순간, 모두를 같은 톤의 감정 상태에 실어나르곤 한다.
위험에도 남고 싶어하는 사람들
최근 수십 년간 우린 한국인 전체의 삶을 뿌리째 뒤흔드는 사건들에 끊임없이 노출되면서 살아왔다. 외환위기가 그러했고, 반드시 “이것은 천재(天災)가 아닌 인재였다”로 결론나고 마는 자연재해들과 막아볼 도리 없이 온 국토를 휘몰아온 개발, 재개발 혹은 골프장 건설의 열망은 끊임없이 우리를 익숙한 삶의 터전에서 뿌리째 뽑아냈다.
시시때때로 남과 북이 서로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긴장을 고조시키거나 완화시키면서 반도 전체를 뒤흔들어온 고단한 분단 현실은, 1953년 종전 이후 최초로 한 섬 주민 전체를 뿌리 뽑아냄으로써,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불가항력적인 뿌리 뽑힘의 사례를 추가한다.
연평도 주민 70~80%가 이주를 원한다. 당연하다. 이토록 확연한 위협 속에서 제대로 삶이 꽃피기 힘들 터이다. 놀라운 점은 오히려 20~30%의 남고 싶어하는, 혹은 지금 나가더라도 돌아오고 싶어하는 주민들이다. 끊임없는 불안과 위험에 노출돼야 하는 곳에 굳이 남으려는 건 왜일까?
“남들은 여기 별로라고 하잖아. 근데 난 여기가 좋아. 물도 좋고 바람도 좋고, 남들이 뭐라 해도 난 여기서 살 거야.” 자식 여섯을 낳고 키워서 육지로 보낸 어르신의 말이다. 물 좋고 바람 좋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그들의 터에 단단히 뿌리박힌 사람들의 놀라운 애착이다. 재개발에 재개발을 거듭하는 도시에서 아파트를 갈아타며 살아온 이들에겐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깊이 박힌 뿌리. 그것을 끊어내는 일은 그들에게 생명을 위협하는 일만큼 고통스럽다는 것을 우린 대부분 간과한다.
200~300명에 이르는 머물고자 했던 사람들도, 결국 주민대책회의의 결정에 따라 대부분 섬을 떠나고, 완강히 떠나기를 거부하는 30여 명만 남았다. 그들을 강력하게 설득한 것은 11월28일의 대규모 한-미 합동군사훈련. 말이 훈련이지, 한 나라 전체의 군사력을 능가하는 규모의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가 출격하는 이번 합동훈련은 한마디로 대북 위협용으로 한반도 주변을 급속히 공포로 냉각시켰다. 이번 훈련이 북에 또 다른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고, 추가 포격이 가해질 수 있다는 걸 가장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연평도 주민들이다. 결국 이들을 익숙한 삶의 터전에서 내모는 자는 누구인가?
박완서의 소설 에는 6·25 때 피란을 가지 않고 모두가 떠난 서울에 남아, 불안과 악몽을 삭이며 지냈던 작가의 기억이 등장한다. 그의 가족은 자신의 존재를 지켜줄 지붕도 벽도 없는 외지에 내던져지느니, 불안한 내 둥지에 남아서 공포를 견디는 걸 선택했다. 그 가족의 결정은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모독당한 삶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군사적 대북 시위를 위해 어딘지 모를 곳으로 내몰려야 하는 이들, 다시 돌아오고 싶어하는 주민들, 끝끝내 그곳을 떠나지 않은 분들 모두의 삶은 뿌리 끝에 매달린 작은 흙덩이 하나까지 존중돼야 한다. 그것이 이 한 포기 풀만도 못한 모독된 삶을 견뎌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파리(프랑스)=목수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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