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다. 청와대에 계신 그분의 말실수를 자꾸 지적질하는 것, 좀 실없어 보인다. 그래도 ‘기왕 쓰기로 한 것’, 쓴다. 서울·경기 1만5천 가구의 안방까지 물이 들어찬 추석 전날. 퍼내도 퍼내도 밀려드는 흙탕물에 울 새도 없는 수재민을 향해 “기왕 이렇게 된 거니까, 편안하게 마음 먹으라”는 한 말씀. 수재 한 번 안 당해본 분들이라면 말실수는 그냥 넘기자고 할 만하겠다. 반지하에 사는 것도 억울한데, 비만 쏟아지면 양동이로 물 퍼낼 걱정부터 해야 했던 서울 강서·구로 지역의 그들도 과연 그럴까. 그래서였을까. “편안하게 먹을 수 없다”는 말대답이 그 자리에서 ‘감히’ 튀어나왔다. 동사무소도, 119도 불통이던 그 시각, 서울시는 “10년 만에 한 번 내릴 만한 호우에 대비해 설계됐는데 이번에 광화문·강서 지역에 102년 만의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져 별 방법이 없었다”고 해명했다. “천재(天災)니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늘상 그분을 편들던 그 신문들이 이번에는 길길이 날뛴다(그들은 이번에 크게 수해가 난 곳 가운데 하나인 광화문에 자리잡고 있다). 예견된 듯 인터넷은 ‘열폭’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서울을 수영장으로 만들자”는 말부터 “기왕 이렇게 된 거 3년까지 못 참겠다”는 말까지 앞뒤를 가리지 않는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운이 따라주질 않아서 그런 것이니 마음을 편히 먹고 살아가야 할 일이었을까. 피해가 가장 심했던 강서 지역에 내린 비는 293mm였다. 배우 정우성의 2억원을 호가하는 승용차가 물에 잠길 위험에 있다는 기사가 관심을 끌던 강남구도 정확하게 293mm가 내렸다. 그럼, 정우성 차는? 침수를 면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이 말의 수혜자는 따로 있다. 이제는 국무총리 후보자가 된 김황식 감사원장이다. 기왕 (국민이 뽑아서) 이렇게 (대통령이) 된 거, 자신의 결격 사유로 지목된 병역기피 의혹, 위장전입, 친인척 특혜 정도는 흠도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청와대의 그분 덕분이다. 군대에 가지 않겠다며 생니 9개를 뽑은 혐의로 경찰조사까지 받은 인기 연예인은 사회적 생명이 끝날 위기에 몰렸음에도 김 후보자가 떳떳할 수 있는 이유다. 광주지법원장, 감사원장 등 요직에 임명될 때마다 누이가 총장으로 있는 대학은 비정상적으로 많은 국고 지원을 받았다는 의혹에 “대한민국이 그렇게 허술한 나라가 아니다”라고 일갈하는 그 눈빛은 형형하다. 병역 연기 사유가 된 갑상선 기능 항진증은 2년 이상 장기간 약물치료를 요하는 난치병이니 그 병을 앓았다면 당시 병무청 기록을 내놓으라는 요구에 “(45살이 넘으면) 기록은 폐기한다”(2008년 감사원장 청문회)는 말에는 재치가 번득인다. 병역 면제 사유가 된 부동시가 2년 만에 정상회복된 불가사의에는 “임관 신체검사는 대충해서 한다. 정확한 검사를 하지 않는다”(2008년 감사원장 청문회)고 답한다. 답 속에 꼭 해내고 말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김 후보자는 알고 있을까. 내놓은 말들은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은 허술하지도 않지만, 정확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앞뒤의 말들이 묘하게 모순을 이룬다. 소장수 아들이라며 호기롭게 나섰던 김태호 후보자가 했던 “기억이 나지 않아 죄송하다”는 말의 세리머니보다 세련되고 뻔뻔하다. 그렇다면 김태호 후보자는 심정이 어떨까. “기왕 이렇게 된 거, 따져보면 내가 당신보다 못할 거 없다” 아닐까.
기왕 이렇게 된 거,
돌아온다는 말이 나돌았던 신정환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원정도박보다는 거짓해명으로 팬들의 공분을 산 신정환이 “기왕 이렇게 된 거, 내 연예계 생활은 끝난 줄로 알겠다”는 자포자기의 고백을 했다는 추측성 기사도 나돈다. 그의 상황에 ‘기왕에 이렇게 된 거’를 전제한다면 동료 김구라가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남긴 말은 의미심장하다. “친구야.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돌아와서 충분히 너의 잘못을 까발리고 조사받을 것은 받고 마음의 병도 치유를 하자.”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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