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가을이다.
가을이 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짙은 눈썹과 깊은 눈동자, 서정적 목소리의 그 남자는 언제나 회색 바바리를 입고 다녔다. 낙엽이 곧 떨어질 것 같은 초가을, 스산한 바람이 부는 골목에서 소녀를 마주치면 그는 늘 그랬듯 가을 햇살을 닮은 훈남의 미소를 짓는다. 무거운 코트깃을 올려세우며 소녀에게 다가가는 그가 하는 말, ‘서프라~이즈!’
나쁜 상상인 줄 알지만, 엄기영 전 문화방송 사장을 보면 머릿속에 바바리맨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바바리코트 속 감춰진 알몸을 보일 때 쾌감을 얻는 바바리맨이 주로 여학교 앞에 서식한다면, 파리의 바바리맨은 브라운관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프랑스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에펠탑 앞에서, 그리고 개선문 앞에서 “이상 파리에서 엄기영입니다”를 외쳤던 그의 바바리코트 이미지는 그만큼 강렬했다.
엄기영 그가 돌아왔다. 아니 돌아가셨다, 아 이건 아니고 헷갈린다. 자신의 고향 강원도 춘천으로 떠났으니 고향 사람이 볼 때는 ‘돌아왔고’, 서울 사람이 볼 때는 고향으로 ‘돌아가셨다’고 말할 수 있다. 이래저래 이건지 저건지 영 헷갈리기만 한 그의 ‘서프라~이즈!’ 행보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따로 있다. 마침 그의 이사 소식이 들린 날 직무에 복귀한 이광재 강원도지사의 거취와 관련이 있다. 그가 춘천으로 주소지를 옮긴 이유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 등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이 지사의 낙마를 기대하는 것 아니냐는 시선 때문이다. 만약 정말 그런 기대를 품고 춘천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면 엄기영 전 사장에게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정말 ‘서프라~이즈!’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그런 기대 없이 순수하게 고향의 발전을 위해 떠난 것이 맞다면 그것 역시 ‘서프라~이즈!’다. 이럴 땐 차라리 바바리코트 활짝 열어 ‘서프라~이즈!’를 외치는 바바리맨이 그립다. 엄기영 전 사장은 자신의 오락가락 행보를 궁금해하는 국민을 위해 지금 당장 ‘서프라~이즈!’를 외쳐줄 용기는 없을까.
(*당연히 없겠지. 이광재 지사에게는 아직 대법원 상고심이 남아 있다. 과연 어떤 ‘서프라~이즈!’한 선고가 나올까.)“저희 작은아버님이 장관이셔요. 어디를 가면 쌀 한 가마니 없겠어요? 하지만 긴긴 인생에 이런 일도 있어야 늙어서 얘깃거리가 되잖아요.” 쌀이 떨어져 밥 대신 고구마를 내놓은 아내에게 시인은 역정을 부렸다. 부인은 그제야 작은아버님의 정체를 밝힌다. 고교 시절 교과서에 있던 수필 ‘가난한 날의 행복’의 일부다. 교과서를 충실히 익힌 우리는 그때부터 이 문장을 집중적으로 써먹었다. ‘짤짤이’ 하다가 외상으로 돈을 걸어야 할 때도 “저희 작은아버님이 장관이셔요. 어디를 가면 200원이 없겠어요?”, 오락실에서 친구에게 게임비를 꿔야 할 때도 “저희 작은아버님이 장관이셔요. 어디를 가면 게임비가 없겠어요?” 등이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의 딸 외교부 특채 사건을 보며 ‘가난한 날의 행복’이 떠올랐다. 장관의 딸도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저희 아버님이 장관이셔요. 어디를 가면 정규직 사무관 자리 하나 없겠어요? 하지만 긴긴 인생에 ‘계약직’ 5급 자리도 거쳐봐야 얘깃거리가 되잖아요.” 정말 얘깃거리가 됐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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