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이근 기자ryuyigeun@hani.co.kr
21세기가 ‘새로운 것’만으로 채워져 있는 건 아니다. ‘낡은 것’도 도처에 널려 있다.
“1392년 이후 굳어진 ‘사농공상’의 대치 구조가 그대로 우리의 질곡으로 아직 건재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면 그 ‘사’의 방대한 세력이 정계, 관계, 재계에 포진해 큰 흐름들을 장악하고 이 사회를 호령하고 있다.”
21세기 첫해인 2000년 권오대 당시 포항공대 전자전기공학과 교수가 에 “‘사’여 ‘농공상’을 옥죄지 말라”는 제목으로 쓴 칼럼의 일부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은 봉건시대(정확히 말하면 조선시대)의 네 가지 사회계급, 곧 선비·농부·공장(工匠)·상인을 말한다.
사농공상은 21세기 정치판에도 존재한다. 2004년 17대 국회가 들어선 이후의 일이다.
“요즘 국회 참 좋아졌어. ‘장사꾼’들이 다 들어오고 말이야.” 식사를 마치고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들어서는 3~4명의 의원들이 ‘앞서 걸어가는 의원’이 들릴 만한 소리로 얘기를 주고받았다. 앞서 걷던 의원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들이 말하는 ‘장사꾼’이 국회에 출입하는 ‘잡상인’(잡다한 물건을 파는 상인을 이렇게 부르는 건 정말 ‘부당’한 게 아닐까?)을 말하는 게 아니라 바로 자신을 말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소속 정당이 다른 것도 아니었다.
중앙선관위가 2004년 17대 총선 직후 당선된 국회의원들의 출신 직업별 분포 현황을 보면 ‘상업’이라고 자신의 경력을 기재한 사람은 299명 중 단 1명이었다. 정치인이 103명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은 국회의원(89명·연달아 당선) → 교육자(34명) → 기타(31명) → 변호사(30명) → 농수축산업(3명) → 약사·의사(3명) → 회사원(3명) 등의 순서였다. 가장 수가 적은 직업은 언론인·건설·상업으로, 각각 1명씩이었다. 현대캐피탈과 현대카드 대표이사 회장을 지낸 이계안 의원(서울 동작을)은 지난 6월 기자에게 “국회에도 사농공상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장사꾼’이란 말엔 ‘돈이나 벌던 사람’이란 의식적·무의식적 비하가 깔려 있다. 그렇지만 사농공상의 맨 끝자락에 있는 ‘상’은 장사꾼이 아닌 ‘최고경영자(CEO)형 리더십’으로 불릴 때도 있다. 정치판에도 ‘경제’가 시대적 화두가 된 만큼 CEO형 리더십은 따라 배워야 할 타이틀이 됐다. 장사꾼과 CEO란 말은 간극이 크지만, 혼재돼 쓰이고 있다.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자천 타천 ‘경제 대통령’ 후보로 불린다. 현대건설·인천제철 등 현대계열사 10곳의 사장 및 회장 출신이라서 그렇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에게서 경제를 살릴 CEO형 리더십을 보려 애쓴다. 그를 지지하지 않거나 폄하하는 사람들 일부는 그를 ‘장사꾼’으로 부른다. 대통령 선거 후보로 급부상하기 전까지 한나라당의 ‘주류’들은 서울시장까지 지낸 그를 사석에서 비난할 땐 늘 ‘장사꾼’이라고 불렀다.
이상한 건 이명박 후보의 ‘상’의 경력이 도덕성과 반비례할 것이라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이나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나 별 의심 없이 똑같이 생각한다는 점이다. 정직하게 장사를 하는 수백만의 ‘상인’들이 이런 집단적 편견에 항의 성명이라도 내야 하는 건 아닐까? 이명박 후보의 도덕성은 그가 한때 장사를 했든지 안 했든지 그의 출신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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