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순간적인 말장난·비웃음·자학에 웃음 코드 맞춰진 시대, 잘 짜인 개그는 설 곳 없어 </font>
▣ 안인용 기자 한겨레 매거진팀nico@hani.co.kr
습관은 무섭다. ‘어떤 행위를 오랫동안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익혀진 행동 방식’인 습관은 한번 익숙해지면 바꾸기가 쉽지 않다. 습관이 무서운 것은 웃음에서도 마찬가지다. 만담식 웃음에 익숙해져버리면 속사포처럼 대사를 주고받는 개그에만 허파가 꿈틀하고, 몸 개그에 꽂히면 우선 누구든 넘어져야 웃음에 발동이 걸린다. 이렇게 사람들은 누구나 익숙해진 웃음 코드에만 장단을 맞추게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시대별로, 또 나라별로 웃음의 습관은 다 다르다. 2008년 대한민국의 웃음 코드는 버라이어티쇼에 맞춰져 있다. 지금은 바야흐로 ‘버라이어티쇼 전성시대’니까.
개인 플레이에 능한 연예인 과대평가
버라이어티쇼식의 웃음은 철저한 ‘말 위주의 개인 플레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개개인의 순발력이나 즉흥성에 기대고 있는 버라이어티쇼는 90% 이상 순간적으로 만들어지는 상황을 이용한 말장난이나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나 비웃음, 자학 등으로 웃음을 만들어낸다. TV를 점령하고 있는 등의 프로그램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 식의 자극적인 웃음 코드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는지를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웃음은 때로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인다. ‘웃음’에 대한 정의와 기준이 점점 더 버라이어티쇼에 맞춰지고 그런 식의 웃음에 능통한 연예인들이 과대평가되면서, 정작 아이디어와 연기로 끌어내는 진국 웃음은 점점 더 외면받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다.
웃음에도 밀도가 있다. 똑같이 ‘깔깔깔’ 하고 웃어도 웃음의 질은 다 다르다. 웃음이라고 다 같은 웃음은 아니라는 얘기다. 버라이어티쇼에서 선사하는 웃음은 한번 웃고 버리는 웃음이지만, 잘 짜인 한 편의 개그가 선사하는 웃음은 마음속에 남는다. 오랜 시간 아이디어를 내고, 웃음의 지점을 측정하고, 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대사를 만들고, 대사를 바탕으로 촘촘한 동선과 연기를 짠 뒤 나온 결과물로서의 웃음은 여러 가지 감정을 자극한다. 그 감정들은 단지 ‘재미있다’나 ‘웃긴다’는 몇 가지 단어에 그치지 않는다. ‘즐겁다’ ‘유쾌하다’ ‘창의적이다’ ‘기분이 좋다’ 등 수많은 단어로 표현이 가능하고, 그 단어만큼 다양한 감정으로 연결된다.
잘 짜인 개그는 사소한 손동작이나 동선, 눈빛과 억양까지 웃음으로 이끌어낸다. 툭툭 내뱉는 식의 말이 아닌 정제된 대사와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대사가 주는 웃음은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해준다. 또 여러 명의 개그맨이 정확하게 호흡을 맞추는 ‘팀플레이’ 웃음은 한 사람의 개인기가 좌우하는 ‘개인 플레이’와는 다른 웃음을 만들어낸다. 음식으로 치자면 즉흥적으로 뚝딱 만들어내는 ‘개인플레이’ 웃음은 패스트푸드 햄버거에 가깝고, 아이디어와 연기를 깔고 있는 ‘세트 플레이’ 웃음은 여러 가지 재료를 넣어 오랜 시간 푹 끓인 탕이나 국과 비슷하다. 버라이어티쇼식의 웃음에 익숙해지는 것은, 풍부하고 다채로운 웃음이 주는 즐거움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청률은 한 자릿수
잘 짜인 개그, 밀도 높은 개그를 선보여야 하는 개그 프로그램들이 오르지 않는 시청률과 전혀 화제가 되지 않는 코너들로 속병을 앓으며 하향길로 접어들었다. 와 는 한 자릿수 시청률로 고전하고 있고, 는 ‘제8의 전성기’를 지나 비슷비슷한 개그만 무한 반복하고 있다. 개그 프로그램의 침체에는 ‘세트 플레이’ 개그만이 줄 수 있는 웃음을 연구하기보다 버라이어티쇼식의 웃음을 흉내내거나 따라 하려는 개그맨들도 조금은 영향을 주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버라이어티쇼식의 웃음에 익숙해져버린 시청자의 시청 습관도 큰 몫을 하고 있다.
아이디어와 연기를 기반으로 잘 짜인 밀도 높은 웃음을 마음껏 즐기고 싶다면 웃음 전문가인 개그맨들이 더 열심히 해주기를 바라는 것 말고도 한번쯤 우리의 웃음 습관을 점검해보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또 가벼운 웃음을 가려내는 데는 더 야박해지고, 진국 웃음에는 한 번 더 박수를 쳐줘야 하지 않을까. 진짜 ‘웃긴’ 삶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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