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연인간, 부모자식간, 상사부하간 관계 떠오르게 하는 ‘누렁이’</font>
▣ 안인용 기자 한겨레 매거진팀nico@hani.co.kr
누구에게나 그 어떤 생명체의 주인(혹은 주인격)이었던 기억 하나쯤은 있다. 유난히 눈이 멍하던 그 강아지 개똥이나 충혈된 눈으로 애처롭게 풀을 뜯어먹던 토깽이였을 수도 있다.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가방 끈을 잡고 따라다니던 순이나 말 한마디도 못하고 애꿎은 학만 접어서 가져다주던 코찔찔이 철이였을지도 모른다. 거꾸로 그 어떤 생명체에게 본의 아니게 길러졌던(혹은 복종했던) 기억도 하나쯤은 있다. 지시만 떨어지면 한겨울에 산딸기라도 구해다줄 수 있을 만큼 좋아했던 미자씨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잽싸게 뛰어다녔던 손가락 임자 김 과장도 떠오른다. 알고 보면 사람들은 늘 인간관계 속에서 항상 누군가에게 지배당하고 있거나 혹은 복종하고 있다. 자기는 절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누렁이’를 보길 권한다. 이 코너를 보면서 마음 한구석이 짠하다면, 곧 고개를 끄덕이게 될 테니까.
맹인안내견 하자니 제가 길치라…
주인과 그의 충실한 소속인의 관계가 유지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둘 중 누구 하나가 그 관계를 그만두고 싶어질 때, 비극은 시작된다. 이 둘도 그렇다. 잡종개 안누렁(안상태)과 주인님(박휘순)의 2인극인 ‘누렁이’는 ‘주인-소속 개’로 행복했던 시절이 끝난 그때부터 시작한다. 주인님이 누렁이를 두고 말도 없이 이사를 가버리고 누렁이는 이사간 주인님 집 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주인님의 마음은 이미 떠나버린 뒤다. 이런 비극을 두고 우리는 신파라고 하고, 이런 비극을 다룬 개그를 보고 우리는 신파 개그라고 한다. ‘누렁이’는 하도 웃어서, 또 웃다 보니 슬퍼져서 나오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개그다.
누렁이는 항상 주인님 집 밖에서 주인님이 나오기만을 기다린다. 누렁이는 주인님과 얼굴이라도 마추지면 어떻게든 떠난 마음을 돌려보려고 애를 쓴다. 애를 쓰는 그 대사가 참으로 구구절절하게 웃긴다. “제가 명식(주인님 아들)이가 던지는 공 다 물어줘가며 명식이 키웠는데….” “마음속에 생긴 응어리가 풀릴까 해서 짖었어요.” “주인님 저 버리지 마세요!” 애원하는 누렁이를 향해 주인님은 이렇게 말한다. “구질구질하게 왜 이래, 너 쿨한 애였잖아.” “우리 집 형편상 너를 키울 수는 없을 것 같아.” “가족회의를 했는데 개는 키우지 않기로 했어.” 그러나 집 담벼락 안쪽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그 개는 다름 아닌 푸들 ‘까뜨린느’(홍순묵)이다. 누렁이는 주인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잘난 척하는 까뜨린느의 팔을 힘껏 물어도 보지만, 주인님의 마음은 영 돌아서지 않는다.
주인님이 너무 매정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주인님 얘기를 들어보면 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주인님은 누렁이에게 늘 독립하라고, 자격증도 따고 기술도 배우라고 하지만 누렁이는 유독 의욕이 없고 지나치게 열정이 없다. 누렁이는 이렇게 변명한다. “개썰매는 추워서 못하겠고, 맹인안내견은 길치라서 못해요. 경찰견 하기에는 풍치이고, 애완견을 하기에는 개인기가 너무 없어요. 정육점에서 일하면 좋겠지만 제가 또 콜레스테롤이 높아서 고기를 못 먹어요. 카메라 울렁증도 있어서 오디션은 아무래도 좀…. 뽀삐랑 결혼할 생각도 있는데 처가살이는 쉽지 않더라구요, 사료도 입에 안 맞고….” 즉, 누렁이는 주인님 없이는 못사는 과도하게 의존적인, 21세기를 살아가기에는 지극히 20세기적인 개다.
누렁이와 주인님의 관계는 개와 주인의 관계, 그 이상을 보여준다. 먼저 변심한 애인 바짓단을 붙잡고 돌아오라고 애걸하는 비련의 주인공이 생각난다. 주인님을 향해 “저 다시 한 번만 키워주세요”라며 세차게 꼬리를 흔들어대는 누렁이의 심정은 김중배의 다이아가 좋아 떠나가버린 심순애를 향해 “다이아가 그리 좋더냐”고 부르짖었던 이수일의 심정 그대로다. 지난해에는 나를 최고의 부하직원이라 칭찬하더니 올해는 신입사원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린 부장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성인이 됐는데도 실력을 키울 생각은 하지 않고 백수로 부모 집에 얹혀 살겠다는 백수 아들도 떠오른다. 그래서 그런지 누렁이와 주인님 중 누구 편을 들기란 쉽지 않다.
누렁이 받아줘라, 당신의 선택은?
누렁이는 과연 다시 주인님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여기서 잠깐, 마지막에 나오는 설문조사를 실시해보자. “‘누렁이가 무슨 죄냐, 한번 주인은 영원한 주인이다, 까뜨린느 쫓아내고 누렁이를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1번을, ‘무한경쟁 사회인 요즘 자기계발도 하지 않고 받아달라고 떼쓰는 누렁이는 각성하라, 누렁이는 제 살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2번을 적어서 지금 제 이메일로 보내주세요. 결과는 다음 ‘개그쟁이’에서 발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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