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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에게 독기 그만 뿜으시라

등록 2007-10-19 00:00 수정 2020-05-03 04:25

‘독한 개그’의 선두주자 김구라에게 독설이 아닌 개그를 바라다

▣ 안인용 기자 한겨레 매거진팀nico@hani.co.kr

개그는 말로 한다. 개그에 쓰이는 말은 다른 데서 쓰이는 말과는 조금 다르다. 재치라는 요소가 무엇보다 강하고, 풍자적이며 비판적이기도 하다. 개그맨들이 개그 무대뿐 아니라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진출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개그의 형식도 무대 위 공개 개그와 콩트 등으로 다양해지면서 개그의 말은 조금씩 그 영역을 넓혀왔다. 단어는 더 다양해졌고 표현도 풍부해졌다. 그런데 개그의 말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만한 변화가 있다. 개그의 말이 독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독하다’는 것은 독기가 있고 심하게 자극적이라는 뜻이다. 독한 개그는 호통 개그의 뒤를 잇는 최근 개그의 가장 뚜렷한 경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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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파 언어장벽 깼을 땐 신선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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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 개그의 선두주자는 이름부터 독한 김구라다. 공중파부터 케이블 방송까지 수많은 프로그램을 통해 연예인들 중 가장 자주 텔레비전에 얼굴을 내비친다는 김구라는 어떤 프로그램에 출연하든 일관성을 유지한다.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내뱉고, 표현의 수위를 자체 조정하며, 출연자들에게 가끔씩 반말도 하고, 출연료 등 현실적인 소재에 집착한다. 물론 김구라는 어느 프로그램에 출연하든 무척이나 웃긴다. 문화방송 부터 SBS , 한국방송 까지 예능 프로그램을 종횡무진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텔레비전에서 김구라를 보고 있으면 피로감마저 느껴진다. 그의 독한 개그가 문제다.

인터넷 방송 시절에는 지금보다 더했는데 그의 독한 개그가 왜 지금에 와서 문제가 되냐고? 그때는 김구라의 온갖 욕과 적나라한 얘기, 안하무인의 태도가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안겨줬다. 늘 근엄해야 하는 방송의 틀을 와장창 부숴버리고 친구들끼리 모이면 쓰는 단어와 말을 사용해 방송을 한다는 데에서 대리만족 비슷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가 공중파로 진출했을 때 누구보다도 반가웠던 이유는 공중파의 견고한 언어장벽이 그의 ‘구라’로 인해 무너지는 모습에서 더 큰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그가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인터넷 방송이나 케이블 방송에서 할 때와 똑같은 태도와 말투를 선보였을 때 정말 시원하게 웃었다. 그의 개그는 이경규나 박명수의 호통식 개그와는 뚜렷하게 달랐다. 호통 개그가 텔레비전 앞에서 가볍게 웃는 정도라면 김구라의 독한 개그에는 진한 웃음이 있었다.

개그의 정수는 풍자와 비판이다. 정색하고 욕하면 논란이 되지만 개그라는 최상급 필터를 통해 비판하고 풍자하면 예술이 된다. 김구라의 독한 개그가 재미있는 이유도 조금 더 센 말을 통해 더 견고한 틀이 무너지면 더 센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대놓고 서로의 ‘라인’이나 ‘서열’에 대해 얘기하는 건 무척이나 웃긴다. 그 모습을 통해 사회 속에서 늘 경쟁하고 싸우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공적인 매체인 방송에서는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겼던 라인이나 서열을 까놓고 얘기하는 데에서 규율을 깼다는 희열을 느끼기도 하니까. 그런데 그런 형식이 계속 반복되고 복제되면서 껍데기만 남으면 희열은 금세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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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면 ‘유해물질’에 불과할 뿐

독한 개그도 마찬가지다. 적절한 수준의 독기는 긴장감을 느끼게 해주지만 일정 수준 이상을 넘으면 그저 ‘유해물질’에 불과하다. 독한 개그가 느끼게 해주는 카타르시스의 적정선을 유지하지 못하고 선을 넘으면서 툭툭 내뱉는 독하고 자극적인 말만 남으면 그건 더 이상 개그가 아니다. 그저 성격 못된 사람의 괴팍하고 예의 없는 말에 불과할 뿐이다. 요즘 김구라의 독한 개그를 보고 있으면 시원한 웃음이 나오기보다 씁쓸한 웃음만 나온다. 그리고 그의 독한 개그를 무늬만 따라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 속 말은 점점 더 독해지고만 있다. 경계경보가 필요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말에서 자극을 주기 위한 독기를 조금만 빼고 사람들이 독한 개그를 즐기는 이유를 한 번만 생각해보면 정답은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김구라식의 독한 개그가 독설이 아닌 개그로 남아줬으면 좋겠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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