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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언니의 ‘스토리 개그’에 빠지다

등록 2008-02-28 15:00 수정 2020-05-02 19:25

데뷔 20년을 넘기며 생활밀착형 수다로 ‘빅 웃음’ 주는 개그우먼 이경실, 박미선

▣ 안인용 기자 한겨레 매거진팀nico@hani.co.kr

케이블TV 채널 중에는 20~30대 여성들을 대상으로 패션부터 연예 및 연애 프로그램이 줄줄이 방영되는 ‘스타일온’과 30대 이상 여성들을 위한 토크쇼가 중심이 되는 ‘스토리온’이라는 채널이 있다. ‘스타일’과 ‘스토리’는 여자의 인생에서 대표적인 키워드다. 자신을 가꾸는 데 푹 빠져 살던 여자들은,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어느 순간을 넘어서면 다른 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알고,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는 데 익숙해진다. 그 기점은 아마도 나이듦이 아닐까 싶다. 시간만이 만들어내는 삶의 내공은 나이로 가늠할 수 있으니까.

“남편이 난폭하게 다뤄줬으면” 하는 센스

개그우먼 이경실과 박미선을 보면 ‘스토리’의 위력을 새삼 느끼게 된다. 각각 1987년과 1988년에 데뷔해 이제 데뷔 20년을 넘긴 이경실과 박미선은 개그계의 ‘큰언니’들이다. 한동안 TV나 라디오 등 방송 진행이나 드라마 감초 역을 하며 버라이어티쇼 프로그램이나 개그와는 조금 멀어진 줄 알았던 이 둘이 최근 온갖 프로그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쟁쟁한 개그맨들에게 밀리지 않는 새로운 웃음을 주고 있다. 이들이 구사하는 개그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이야기가 있는 개그, ‘스토리 개그’다.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시청자들은 이경실과 박미선의 개그를 TV로 봐왔고 이경실의 결혼에서부터 이혼, 재혼까지 또 박미선의 결혼과 가정사까지 이들의 삶을 지켜봐왔다. 그러면서 이경실과 박미선에게는 이야기가 생겨났고 그 이야기는 개그를 통해 유쾌하게 보여지고 있다(개그우먼은 아니지만 노사연이나 양희은 역시 이 언니들과 맥을 같이한다).

한국방송 나 문화방송 등에 출연해 시청자들을 울리고 웃긴 이 둘의 입담을 보면 이야기의 폭발력을 쉽게 알 수 있다. 결혼 10년이 훌쩍 지나니 “남편이 (자신을) 난폭하게 다뤄줬으면 좋겠다”는 박미선의 얘기나 “나한테 지금 패는 얘기를 하는 거야”라고 맞받아치는 이경실의 얘기에서 ‘개그가 이야기를 만났을 때’를 깨닫게 된다. 이들의 살아온 얘기를 알기 때문에 웃을 수 있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조근조근 남편 이봉원 얘기를 하면서 ‘빅 웃음’도 놓치지 않는 박미선의 개그 센스는 에서 더욱 빛난다. 이경실 역시 자신이 진행하는 케이블TV 토크쇼 에서 때로는 거침없는, 가끔은 잔잔한 수다식 웃음을 선사하고 있다. 이런 식의 웃음은 비슷한 연배라고 해도 이야기의 맛을 모르는 남성들이 구사해내기에는 어려운, 생활밀착형 이야기와 툭 터놓고 시작하는 수다에 강한 ‘언니들’의 특권이기도 하다.

이경실과 박미선 같은 ‘큰언니’들을 개그의 소재로 다룬 코너도 있다. 한국방송 의 ‘달려라 울언니’다. ‘칠공주파’ 출신 여고 동창생들이 15년 뒤에 만났다는 설정인 이 코너에서 김시덕, 김재욱, 류담, 오지헌은 여장을 하고 등장한다. 언니들의 외모는 누가 뭐래도(!) 여성스럽지만 행동 하나하나에는 아직도 그 시절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코너에서 제일 흥미로운 것은 언니들의 이야기다. 큰언니 김시덕은 아직도 결혼 안 한 노처녀이고, ‘아름이’ 류담은 아이 문제로 시어머니 눈치를 보다가 드디어 임신에 성공했고, ‘다솜이’ 김재욱은 매일 PC방에서 오락하는 철없는 백수 남편 때문에 속이 시커멓다. 언니들은 나란히 모여 앉아 수다를 떨면서 사는 얘기, 드라마 얘기를 풀어놓고 그 속에서 웃음을 찾아낸다. 그래서인지 이 코너는 여성 시청자에게 유독 인기가 높다.

김구라식도 유재석식도 중화해내는 힘

버라이어티쇼와 개그 프로그램의 웃음이 ‘거친 벌판으로’ 사정없이 달려나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삶이 있고 이야기가 있는 언니들의 개그는 일종의 중화제 역할을 하고 있다. 언니들이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램에 연일 등장하고 있는 것은 이들의 역할의 중요성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김구라나 박명수식 독한 개그도 이경실이 옆에서 거들면 기분이 나쁘지 않고, 유재석식 수다 개그도 박미선의 이야기가 더해지면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큰 소리로 “형님”을 외치면서 시작하는 ‘조폭 개그’ 형식도 언니들이 등장하니 눈살이 찌뿌려지는 대신 공감대가 형성된다. 젊은 그대? 아니다. “나이든 그대, 잠 깨어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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