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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함은요? 김덕뱁니다

등록 2007-08-17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 ‘집중토론’의 김덕배, 듣기만 해도 웃겨져 버린 이름이여</font>

▣ 안인용 기자 한겨레 매거진팀nico@hani.co.kr

문화방송 드라마 의 주인공이 김삼순이 아니라 수진이나 은서였다면? 아니, 드라마 속에서 삼순이가 그토록 원했던 희진이가 그의 본명이었다면? 아, 생각하기도 싫다. 김삼순 캐릭터의 팔할은 ‘삼순’이라는 이름이다. 김삼순, 이름만 들어도 대략적인 성장 과정은 물론 어떻게 머리를 묶는지, 방은 어떻게 생겼는지, 이는 어떻게 닦는지까지 알 것 같다. 이름의 힘이다. 삼순이라는 이름이 갖고 있는 아우라는 이토록 대단하다.

이름이 캐릭터를 지배하는 또 하나의 장르는 개그다. 최근 개그계에서 상종가를 예고하는 이름은 ‘김덕배’다. 한국방송 의 ‘집중토론’에는 매회 빠지지 않고 의견을 얘기하는 한 명의 방청객(송준근)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김덕배. 성형 문화에 대해 한창 스페인어로 떠들던 외국인, 진행자가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라고 묻자 멀쩡하게 이렇게 대답한다. “김덕뱁니다.” 미국 고등학생으로 나와 교육 문제를 얘기하다가도 “What’s your name?”이라고 물으면 대답은 “김덕뱁니다”. 흡연을 반대하는 여성으로 나와 가냘픈 목소리로 의견을 얘기하다가도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하면 “김덕뱁니다”. 개고기를 반대하는 프랑스 여성 역할을 하다가도 “성함은요?”라는 질문이 나오면 대답은 “김덕뱁니다”.

떠오른다, 떠올라, 그 이름

처음에는 외국인 역할인데 이름이 김덕배라는 게 웃겼다. 그다음에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절대 김덕배가 될 수 없을 것만 같은 미국 고등학생, 프랑스 여성으로 똑같이 김덕배라고 말하는 게 웃겼다. 지금은 ‘김덕배’라는 이름만으로도 웃음이 나온다. 매번 다른 노선을 달리지만 종점은 늘 한 곳인 버스처럼, 매번 다른 역할을 하지만 결론은 늘 김덕배다. 태연한 표정으로 ‘덕’자를 살짝 내리는 억양으로 얘기하는 “김덕뱁니다”는 중독성이 강하다. “성함은요?”라는 질문만 나와도 어떤 대답이 나올지 예상 가능하지만 “김덕뱁니다”를 꼭 들어야 속이 시원하고 마음이 안정된다. 게다가 김덕배는 제법 잘 지은 이름이다. 김덕배라는 이름의 캐릭터는 ‘절대 거짓말을 못할 것 같은 사람’이다. 김덕배라는 사람은 모르지만, 김덕배라는 이름에는 어딘가 진실성이 있다. 의견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기꺼이 무슨 말이든 해줄 것 같은 이름, 김덕배는 엉망진창 토론이라는 콘셉트의 ‘집중토론’과 묘하게 잘 어울린다.

김덕배씨 얘기를 하다 보니 떠오른다, 떠오른다, 이름이 떠오른다. 이제는 전설이 된 그 이름, 김창식씨와 한보람양이다. ‘호구와 울봉이’를 통해 세간에 알려진 김창식씨와 한보람양은 천의 얼굴을 가졌다. 가제트의 만능 팔이나 만능 다리처럼 김창식씨와 한보람양은 모든 질문에 정답이 되는 만능 이름이다. “파리 에펠탑은 314m다. 그렇다면 파리 에펠탑 꼭대기에 맨 처음 올라간 사람은?” “한보람양?” “엄마가 머리를 자른 미용실의 이름은?” “블루블루클럽.” “미용사의 이름은?” “김창식씨?”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가 부부의 연을 맺은 곳은?” “신길동 새천년웨딩홀.” “주례는?” “김창식씨?” “피아노는?” “한보람양?”

김창식씨와 한보람양은 현대판 철수와 영희다. 거의 모든 교과서에 등장하는 대화의 주인공이었던 철수와 영희, 이들은 학년을 초등학교 1학년에서부터 6학년까지 넘나들며 수시로 가족·친구 관계를 바꾸고 취미도 늘 바꿨다. 그렇지만 철수와 영희는 대화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늘 그곳에서 얘기를 나눴다. 김창식씨와 한보람양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궁금증이 있는 곳이라면 늘 찾아가 정답이 되어주었다. 실체는 없지만 왠지 잘 알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그들이 바로 김창식씨와 한보람양이다. 김창식과 한보람은 김덕배에 비해 조금 더 대중성이 있는 이름이다. 김창식이라는 이름에서는 뭐든지 주어지는 것을 열심히 할 것 같은 성실함이 느껴진다. 스무 살 이하로 추정되는 한보람은 반에서 10등 안에는 꾸준히 들 것 같고 제법 똘똘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다. 김창식씨와 한보람양이 없었다면, 그 많은 질문에 대한 정답을 찾지 못해 얼마나 난감했을까?

이름 개그의 선구자는?

어떤 이름이든 이름에는 개인적인 역사가 있다. 개그에 걸맞은 이름은 개인적인 역사를 넘어 공통의 역사를 갖고 있어야 한다. 이름 석 자만 들어도 그의 과거와 현재를 짐작할 수 있을 만한 이름, 그래서 그 이름을 들으면 ‘아, 내가 아는 누구와 이름이 같네’가 아니라 ‘그 이름을 가진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인 것 같아’라는 반응이 나오는 그런 이름 말이다. 그런데 이름 개그 얘기를 하다 보니 한 가지 궁금한 게 생겼다. “우리 개그맨 중에 가장 먼저 이름 개그로 웃긴 개그맨은?” “김창식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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