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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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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감수성

등록 2004-07-09 00:00 수정 2020-05-03 04:23

[겸이 만난 세상]

겸/ 탈학교생 queer_kid@hanmail.net

딸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남편의 석방에 손가락을 잘라 항의 표시를 했다는 한 어머니의 기사를 보고 절망에 휩싸여 있던 날 밤, 김선일씨의 부고를 접했다. 그의 죽음과 ‘이라크 파병해서 복수하자’는 사람들의 반응이 참으로 섬뜩했다. 그날 밤은 지난해 이라크전 때와 같이 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그때 난 자신과 딸의 평화를 침범한 남편을 향해 손가락을 잘라 항의한 어머니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당사자가 아닌 상황에서 기만적인 말일 수 있지만, 나 또한 손가락을 잘라 나의 평화를 지킬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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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의 충격으로 한숨도 자지 못하고, 다음날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뒤 추모식이 있을 광화문에 갔다. 그러나 광화문의 집회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불편했다. 모인 맥락이야 다르겠지만 중앙집중식 집회문화는 학교의 전체주의적 월례 조례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각 반의 깃발 아래 이열로 줄 맞춰 서 있는 학생들은 조직의 깃발 아래 집결한 대열 같고, 집회마다 을 교가 제창하듯 불러야 하고, 각계 인사들이 ‘김선일을 살려내라’와 같은 선동적인 계몽적 연설을 하는 것 또한 그러했다. 이러한 전형적인 방식이 고인을 추모하고 파병 반대의 목소리를 하나의 힘으로 묶어내는 데 효과적이라 할지라도, 기존의 체제를 공격하는 자리에서마저 학교와 사회의 폭력적인 문화에 길들여진 모습을 재확인해야만 하는 것일까 하는 마음에 안타까웠다. 무엇보다 평화를 기원하는 집회에서 평화 감수성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염려스러웠다.

그리고 다음날 광화문 집회 이전에 하는 피스몹(peacemob)에 참여했다. 반전 구호를 쓴 종이를 덮고 드러누운 사람, 기도하듯 국화꽃을 꽉 쥐고 엎드린 사람, ‘죽인 것도 나 죽은 것도 나’라고 적힌 검은 리본을 달고 무릎을 꿇은 사람 등 피스몹에 참여한 20여명 사람들의 퍼포먼스 형태는 각기 달랐다. 나는 종이박스에다 ‘국익은 없다. 국가와 법 앞에 인간의 권리를 논하지 말라’는 글을 써서 얼굴에 뒤집어쓴 채 가부좌를 틀고 왜 내가 여기에서 박스를 뒤집어쓰고 평화를 바라는가에 대한 명상을 했다. 누군가의 선동으로 통합된 구호를 외쳐야 하는 광화문 집회와 달리, 침묵으로 일관한 피스몹은 내가 원하는 평화를 고민할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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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표현하는 방법이나 옳고 그름의 기준은 다르지만, 파병 반대를 외치는 사람과 이라크에 파병하자는 사람들 모두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자신의 평화를 지키려는 마음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광화문 집회나 피스몹에 참여하는 것 또는 인터넷에 자신의 분노를 표하는 방법들 자체가 문제는 아닐 것이다. 타인이 아닌 자신의 문제로서 평화를 성찰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지는 각자의 몫이 아닐까? 적어도 난 손가락을 잘라야 한다거나 누군가의 비극적인 희생을 통해 평화를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되지 않길 바라는 만큼, 나의 평화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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