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와 자메이카가 지척인 카리브해의 히스파니올라섬 서쪽에 아이티가 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혹사당하던,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흑인 노예들이 무장혁명으로 1804년 세운 나라다. 아이티는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연안에서 서구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들어선 첫 독립국가다.
가진 것 없는 신생국의 앞날은 순탄치 않았다. 외세의 힘은 여전히 막강했고, 왕정과 공화정을 오가며 정치는 안정될 줄 몰랐다. 급기야 1915년 미국 해병대가 들이닥쳐 나라를 접수했다. 1934년 미군이 물러간 뒤에도 나아질 건 없었다. 외세와 결탁한 군사독재가 뒤를 이었고, 부자 세습독재가 기승을 부렸다. 1986년 민중봉기로 독재자가 축출됐지만 정정 불안은 그칠 줄 몰랐다. 선거와 쿠데타가 되풀이됐다. 툭하면 허리케인이 할퀴고 지나갔고, 잊을 만하면 대지진과 감염병이 창궐했다. 가난한 이들이 흙으로 빵을 구워 허기를 채웠다.
2021년 7월 조브넬 모이즈 당시 대통령이 사저에서 무장괴한의 총에 맞아 숨졌다. 모이즈 대통령이 숨지기 전 총리로 지명한 아리엘 앙리가 후계자로 나섰다. 앙리 총리 정부는 정국을 장악하지 못했다.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거리에서 반정부 시위가 그칠 줄 몰랐다. 국민 90%가 극빈층인 나라에서 빈민가를 중심으로 독버섯처럼 번진 갱단의 폭력이 불을 뿜었다.
2024년 2월29일 포르토프랭스를 사실상 장악한 갱단 두목 지미 셰리지에가 기자회견을 열고 앙리 총리 정부 ‘퇴진 투쟁’을 선포했다. 사로잡은 적을 불태우는 잔학함으로 ‘바비큐’란 별칭이 붙은 자다. 치안을 유지할 경찰력 지원을 요청하러 케냐를 방문 중이던 앙리 총리는 귀국길이 막혔다. 그는 3월11일 사임을 발표했다.
후임 정부는 아직 구성되지 않았다. 국가는 작동을 멈췄다. 거리는 갱단이 장악했다. 흑인 노예가 세운 첫 독립국가의 파탄이다.
사진 REUTERS·AP 연합뉴스·EPA 연합뉴스, 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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