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차 미술교사 정평한(54)은 그림을 그리고 가르친다. 1992년 교직에 들어선 그는 현재 인천 청라의 인천초은고등학교에 있다. 그의 작품은 학생, 동료 교사 등 학교 주변의 것을 대상으로 한다. 아이들이 쓰던 책상이나 낡은 칠판 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아이들의 웃음과 절망, 동료 교사들의 고뇌와 희망이 그림으로 새겨져 우리 시대 초상으로 남기를 꿈꾸는 그를 5월11일 만났다.
학교를 주제로 작업한 이유가 있나.
“초임 시절 주당 20시간 넘는 수업 시간과 아이들에게 치이다보니 허무맹랑한 작업이 많았다. 1990년대 초반 학교 현장은 교육운동으로 뜨거웠고, 미술계는 제도권으로 옮겨온 민중미술운동 진영이 비판적 반성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 가운데서 옆에 서 있는 수많은 아이의 눈을 들여다봤고, 교사로 있는 동안 이 아이들을 평생 그릴 수 있겠다 싶었다. 이 세대의 ‘학교·교육 현장’을 촘촘하게 그림으로 기록하면 나름 역사성도 가질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교육 현장을 그린다고 좋은 교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좋은 작가가 되는 건 더욱 어려운 일이라 늘 고민하고 있다.”
작품들을 소개해달라.
“<학교-책가방>은 1996년 버린 책상 상판에 그린 작품이다. 당시 학생부실에 배치됐는데, 반성문을 쓰러 학생부에 오는 아이들이 매일 수두룩했다. 이 아이들과 운동장 구석에 무심하게 번진 토끼풀꽃이 유독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름 없는 풀꽃과 이름을 못 외워 번호로 불렸던 우리 아이들, 서로 닮지 않았나?
역시 헌 책상 상판에 그린 <학교-귀가>는 1997년에 작업했는데, 단발머리 주인공은 지금 40대 어머니가 됐겠다. <학교-어머니>는 담임을 할 때 과자봉지만 달랑 들고 소풍 온 학생을 그렸다. 나도 전남 해남에서 자라 초등학교 6학년 때 인천으로 유학 왔다. 아이들이 소풍으로 들떴을 때, 난 김밥을 싸갈 수 없었다. 그래서 제목을 ‘어머니’라 달았다.
<학교-이 선생의 주판>은 상업고등학교에 재직했던 주산 선생님을 2005년에 그린 것이다. 여상을 나온 뒤 야간대학을 마치고 교직에 들어선 이 선생님은 컴퓨터가 도입되면서 더 버티지 못했다. <다시 봄-헌화>에 배경으로 떠 있는 조각 섬들은 전남 진도 앞바다 맹골군도다. 우리 아이들이 그곳에 있다. 그 위에 해당화를 올려놓았다. 2020년 검은 칠판 위에 그렸다.”
스승의 날을 맞는 소감이 어떤가.
“스스로를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아이들에게 어떤 선생님으로 기억되는지 물어보는 것도 겁난다. ‘좋은 선생은 아니었다’는 답을 들으면 남은 교직생활이 힘들어질지 모르겠다.(웃음) 다만 아이들에게 권위를 내세우진 않았다. 스승의 날을 앞두면 나를 가르쳤던, 그리고 지금도 가르침이 여전한 선생님이 그립다. 인천동산고에 다닐 때 미술을 가르쳐주신 이종구 선생님이다. 올해 중앙대 교수에서 정년퇴임하셨다. 늘 격려와 용기를 주신다.”
정 교사는 세월호 참사 뒤 한동안 학교 현장과 학생들을 그리지 못했다. 아이들의 웃음을 그리는 것이 죄스럽고, 절규를 담아낼 수도 없었다. 그가 이제 다시 조심스레 붓을 들고 있다.
인천=사진·글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그림 정평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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