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대본. 한겨레 박미향 기자
일요일 아침 늑장 부리면서 보기 안성맞춤인 문화방송의 을 보면 ‘TV 명작극장’이라는 꼭지가 있다. ‘흘러간 드라마’를 요약해서 보여주는데, 때로는 몇 년 안 된, 그래서 “저게 명작 맞아?” 싶은 것도 있지만, 오래된 빛바랜 필름이랑, “아니, 저런 때가!” 싶은 스타의 청순한 데뷔 시절을 보는 재미가 은근 쏠쏠하다.
문제는 거기 나오는 드라마 중 낯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거, 다시 말해 대부분 다 본 것이라는 걸 깨닫는 때다. ‘퍼질러’ ‘뒹굴뒹굴’ 등의 단어와 친해지기 시작한 서른 이후야 그렇다 치고, 남들은 뉴스도 챙겨보지 못했다는 이십대 중반은 물론, 기숙사 빨래 건조대 옆에서 층마다 하나 있는 고물 TV 앞에서 치열한 채널 경쟁을 해야 했던 대학 시절 방영되었다는 드라마 줄거리를 빤히 알고, 심지어 그 대사까지 익숙하다면… 이건 좀 심각한 거다(엄마한테는 비밀이지만 고3이던 1990년 방영된 것 중에도 있다). 도대체 남들 데모 나가고, 연애하고, 책 읽을 때 진탕 드라마만 봤다는 말이냐고? …흠, 그랬다.
드라마가 할 일 없는 ‘아줌마’들의 전유물처럼 이야기되던 시절(?)에는 차마 이야기하지 못했지만, 한류로 효자상품이 되고 중요한 문화 장르가 된 지금,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책장 한구석에 꽂혀 있는 책에 밑줄 그으며, 방송사 대본 공모 공고가 나면 심각하게 고민했던 과거, 인정옥·노희경·신정구 작가의 특강을 숨어 들으며 가슴이 벌렁거렸던 시간들, 그리고 여전히 술만 먹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아이템을 늘어놓으며 주변 사람을 괴롭히고 있음을(지금 시놉시스를 끝내고 한창 취재 + 머릿속 캐스팅 중인 것은 고속도로 휴게소를 배경으로 한 추리물입니다, 관심 있는 제작사는 연락 주세요!). 취미는 드라마 보기요, 특기는 채널 돌리기고, 닥본사(닥치고 본방 사수!)를 위해 사무실 회식 2차를 빼먹는 행각으로 후배들의 원성을 독차지하고 있음을. 그렇게 떠들고 다닌 덕에 이렇게 에 지면까지 받지 않았는가.
왜 그렇게 드라마에 열중하느냐 누가 물으면, 내 대답은 이렇다. 광고만 봐주면, 이게 다 공짜잖아? 일 안 하느냐고 꾸지람을 들을 때면, 이게 웬만한 문화·여가 생활보다 얼마나 효율적이고 시간도 얼마 안 쓰는 일인지 역설한다. 수준 낮다며 혀를 찬다면, 정말 잘못 알고 계시는 거다. 지금 재능 있는 사람들과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방송사에, 드라마 제작사에 모여 있으니 그럴 걱정은 안 하셔도 된다.
당당하게 커밍아웃하고 나니 살짝 걱정도 된다. 이 정부가 들어선 뒤 팔자에 없는 형사사건 전문 변호사로 거듭나고 있는지라, 오랜 드라마 닥본사 전선에 이상이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지난주까지 전 회 닥본사 했으면서…). 그렇지만 뭐, 큰일은 없겠지 싶다. 전직 총리를 기소했다가 의자를 체포하게 생긴, 그야말로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사건들이 벌어지는 법정 이야기라도 갖다 쓰면 될 테니까.
김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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